〈 141화 〉 16. 이미 끝난 싸움(3)
* * *
카페를 나선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 사태에 대해 떠오르는 여인들이 몇 명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빠르게 소식을 알려야 될 인물이 하나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여보세요? 오빠?”
“화정이니?”
피버 에이전트의 간판 연예인 윤화정.
사태가 터진다면 내 친한 지인들 중에서는 그녀야말로 가장 큰 피해자가 될 확률이 컸다.
다른 연예인들도 피 보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걸린 게 많은 화정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현재 피버 에이전트 소속 연예인 중에서는 최고로 이름값을 날리고 있는 이상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거는 건 내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별일이네. 오빠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전화기 너머로 말하는 화정의 말투에는 섭섭한 기색이 묻어나 있었다.
사실 최근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섹파 몇 명 외에는 거의 얼굴도 못 보고 지냈기 때문이다.
“그야 너 바쁜 거 아니까 그러지.”
“흐응. 글쎄. 나 아니라도 다른 애들이랑도 자주 못 보는 거 같던데?”
“어?”
“왜? 다슬이 말이야. 요즘 오빠 걔랑 완전 냉전 상태라며?”
“…….”
얘는 이건 또 어떻게 안…….
아, 아니지. 단톡도 있으니 그런 얘기 정도는 하겠구나.
화정의 말대로 최근 나는 최다슬과의 관계에서 상당히 서먹해진 상태였다.
약 두 달 쯤 전, 다슬과의 잠자리에서 일어났던 일이 계기였다.
[……오빠. 나 이젠 못 참겠어.]
[뭘?]
[오빠 안을 때마다 몸에서 다른 여자 냄새 나. 한 두 번이면 나도 이런 말 안 했는데, 이젠 진짜 못 참겠거든?]
[엥? 아니, 씻었는데…….]
[그 말은 오늘 딴 여자애 안은 적은 있다 이거네? 그러고 나 보는 거고?]
[아니, 그건…….]
[후……. 오늘은 그냥 헤어지자.]
그렇게 그 날 밤은 섹스도 못 하고 헤어졌다.
이후로 나는 끈덕지게 다슬과 연락을 하면서 관계 회복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미안해. 아직 생각 정리가 안 돼서. 오빠가 다른 여자 만난다는 거 생각하면……. 요즘 들어 그게 너무 스트레스야.]
[그래…….]
[우리 텀을 조금 두자. 이대로 봐도 서로 기분 좋게 볼 수 있을 거 같지가 않네.]
이전과 다르게 최다슬은 어느 시점부터 내가 다른 섹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점차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로서 그런 다슬의 심경 변화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사람 생각이라는 게 딱 정해진 대로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감정적으로 굴기 쉬운 남녀 관계라면 더욱이.
막상 다른 섹파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다슬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모로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이리라.
나는 이후로도 다슬과 여러 번의 대화를 나누었지만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게 된 결과, 최근 그녀와는 상당히 서먹서먹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최다슬과의 일로 심란해지려는 기분을 다시금 다잡고자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보다 시간 좀 괜찮아? 급한 일인데.”
“뭐야, 다슬이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었어? 또 내가 중재해야 될 일이라도 생겼나 했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지금 말할 건 전혀 다른 이야기야.”
“다른 이야기?”
“우리 회사 말이야. 관련해서 너한테 꼭 해야 될 말이 있거든.”
“우리 회사라면 피버 에이전트? 뭐야, 전혀 감이 안 오는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음, 전화로 하긴 좀 그렇고.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
“오늘 봐야 되는 일이야? 오후에 스케줄이 하나 있는데.”
“기다릴게.”
“……어?”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이상한 말 했나?”
“아니, 설마 오빠가 붙잡을 거라곤 생각도 못해서……. 일단 알았어. 그럼 7시 이후에도 괜찮아?”
“응. 내가 회사로 갈게.”
“아냐, 매니저한테 태워달라고 하면 되니까. 나중에 어디서 볼지 톡으로 보내줘.”
“알았어.”
그렇게 화정과 통화를 마친 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곧바로 피버 에이전트로 향했다.
‘두 시간 정도 남았나.’
가는 동안 앞으로 있을 일도 고민할 겸 걸어서 가는 게 나을 듯 싶다.
마음을 정한 나는 그렇게 부지런히 목적지로 향했다.
30분 가량 그렇게 걷고 있자니 어느덧 점차 해가 지면서 주변이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노을이 지며 붉은빛을 발하는 하늘과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이 눈에 띄었다.
슬슬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쳐가면 나를 힐끔힐끔 살피는 것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회사로 향하는 내 머릿속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한가득이었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 조금 불안하긴 하네.’
일단 대표 경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된 상황.
그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지가 문제다.
소설 속의 주인공, 정기발은 그야말로 단순무식한 방식으로 이걸 해결했다.
대표를 성노예로 만들어 회사를 뒤에서 조종하는 방식을 이용, 거기에 그 할망구를 꼬드겨 회사의 돈까지 마음껏 이용하기까지 했다.
하물며 대주주 이사진 몇 명마저 몸으로 유혹하기까지 하며 회사 내 권력의 중추에 섰다.
그 모든 게 정력과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서 만든 결과물이었다.
‘누가 야설 속 대물 주인공 아니랄까봐.’
주인공의 행보를 떠올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꼴릴 목적으로 보기만 하던 이야기였건만, 막상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 격 인물이 되었다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늙은이들 상대로 참 비위도 좋아.’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무슨 할카스 성애자도 아니고.’
그 방식 자체가 음습하고 비현실적인 건 둘째 치고, 애초에 회사 대표나 이사진이나 나이가 최소 40대, 하물며 60살을 바라보는 진짜 할머니뻘 되는 사람도 있었다.
나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방식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나는 그냥 대표가 경질되고 회사가 굴러가는 걸 손가락 빨고 구경이나 하느냐?
‘절대 아니지.’
나에게는 정기발의 정력 및 체력에 또 하나의 무기가 있다.
바로 내가 소설 속 설정에 대해 상당 부분 키를 가지고 있다는 것.
변호사 소진 누나를 만난 것도, 장부를 건네주고 때를 기다린 것도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나만이 알고 있는 설정.
그리고 이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면 정기발 이상으로 회사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꿈은 아니다.
그리고 이 정보를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나를 비롯한 사람들.
그렇다면 나는 피날레를 장식할 배우들과 입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다 왔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회사에 도착한 상태.
회사 앞에서 남은 시간을 확인한 나는 근처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쯤 기다렸을까.
“오빠! 여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반가운 얼굴.
저 멀리서 멋들어지게 입은 겨울 패션의 윤화정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우, 연예인 아니랄까봐 멀리서 보는데도 빛이 나네.
“후후, 오랜만!”
멋들어진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화정이 소매로 반쯤 가려진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나는 그런 화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밖에서 와?”
“그럼 스케줄도 있는데 회사에 죽치고 있겠어? 나 같은 대스타가.”
“평소에 그런 말 안 하는 녀석이…….”
후후, 하고 웃으며 허리에 척 손을 얹는 화정의 익살스러운 행동에 나도 피식 웃음에 새어나왔다.
“어째 텐션이 높네.”
“그야 오빠 얼굴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러지! 됐으니까 우선 가자!”
그리 말한 화정이 앉아 있는 내 팔뚝을 홱 잡아 이끌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나는 어어, 하는 소리만 내며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야, 야. 너무 달라붙는 거 아니냐?”
“에이,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간단한 스킨십이지~.”
“너 나랑 스캔들 있었던 거 잊었어? 매사에 조심해야 될 녀석이.”
“됐네요. 그런 말은 매니저한테 듣는 걸로 족하거든? ‘너 혼자 산다’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스캔들 타령이람.”
“그래도 연예인이 그렇게 조심성이 없으면 안 되지 않나?”
“하. 걱정도 팔자셔. 연예인은 뭐 이성 친구랑 놀지도 못하나?”
그리 말하며 꽉 붙잡는 기색이 강해지는 걸 보아하니, 내가 뭐라 해도 팔짱 끼는 걸 놓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오랜만에 봐서 어지간히도 반갑긴 한가 보다.
‘어쩔 수 없지.’
내심 포기한 나는 그런 화정의 이끌림에 얌전히 끌려가기로 했다.
내 팔뚝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며 화정이 재잘재잘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여기 근처에 괜찮은 카페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아, 혹시 밥 안 먹었으면 저녁 먹을래? 나야 몸 관리 중이라 안 먹어도 되긴 하는데.”
“그냥 카페로 가자.”
“그럴까? 그래서, 갑자기 이렇게 바쁜 연예인 오라가라 한 이유가 뭘까나? 평소에 나 쉴 때 놀자고 불러도 매정하게 내치던 주제에.”
“말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건 기분 탓이냐.”
“흠, 아니면 설마……. 회사 핑계까지 대면서 보고 싶으셨나? 후후.”
“화정아.”
계속 장난을 거는 화정을 향해 나는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미안한데, 이렇게 장난칠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야.”
단호한 내 태도에 화정의 미소도 점차 지워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 반갑게 맞이해주는 거야 나도 고맙긴 하지만……. 앞으로 할 얘기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단 말이지.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 않고.
“뭔데? 심각한 일이야?”
“심각하다면 심각하지.”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어차피 길어질 얘기긴 한데, 일단 가면서 짤막하게 얘기해 줄게.”
내 모습에 덩달아 심각해진 표정의 화정과 함께 걸으며, 나는 가장 중요한 사안부터 말해주기로 했다.
“피버 에이전트 대표 말이다. 김옥희 대표. 너도 알지?”
“당연히 알지. 그러고 보니 최근에 얼굴 안 보이긴 하더라. 그 노인네가 왜?”
“이번에 분식회계 건으로 비리가 적발됐다더라. 옆에 끼고 다니던 비서랑 나눠먹었다는 모양이야.”
“어?”
“그래서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면 뉴스 타고 기자회견까지 나간다더라.”
“……어어?”
그 순간 환하던 화정의 얼굴색이 단번에 확 변했다.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어……. 오빠. 그건 무슨 농담이야?”
“농담 아니야. 어차피 내일이면 농담 아닌 거 알게 될 거다.”
“오랜만에 얼굴 보고는 하는 말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화정아.”
이제는 팔짱을 풀고 발걸음조차 멈춘 화정을 향해, 나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내일이면 시간이 별로 없어.”
내 확고한 눈빛에서 드디어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던 화정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잠깐……. 농담이 아니라고? 그보다 오빠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아는 건데?!”
“그건 차차 얘기해줄게.”
“잠깐만! 그, 그러면 회사는? 내 처지는? 이번에 데뷔한 연주는 어떻게 되는 건데? 걔네 완전 잘 나가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예전 일했던 불퉁한 미소녀 동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이연주 걔도 피버 에이전트 소속이었지.’
요 반 년 동안 본 적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연주 양을 떠올리는 순간 최근 공중파에서 자주 나오던 아이돌 그룹의 모습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TV에 자주 나오던 것 같은데……. 음반 대박 났다고 광고도 많이 찍는 거 같고.’
확실히 이번에 터지면 가장 타격을 입는 쪽는 화정이가 아니라 연주 양 쪽이 되려나.
그 부분에 대해서도 신경을 조금 써야겠다.
나는 자리에 멈춰선 채 패닉에 빠진 화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은 가서 얘기하자.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까.”
“아, 아니,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너무 걱정하지 마.”
어쩌지도 못한 채 끌려오는 화정을 향해, 나는 안심시킬 겸 작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마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