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15. 미남은 덮밥을 좋아해(10)
* * *
그날 밤.
예상했던 밤새 수다를 떠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화린이야 나와 말할 기분이 아니기도 했고, 화연도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일찍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실은 그냥 잠든 척 한 거 같긴 하다.
안 그러면 여동생에게 나와의 관계에 대해 추궁을 받을 게 뻔하니까.
‘각방이라 다행이야.’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나도 쉽사리 잠에 들 수는 없었다.
음란함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화연이 혹여 동생을 내버려두고 내 방까지 쳐들어오는 참사가 일어나진 않을까 염려했으니까.
허나 다행히 내가 생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수 시간의 경계태세를 마친 끝에 나도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뜬 이후로 씻고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집으로 갈 준비를 하는 사이.
그러는 와중에도 화린의 기분은 여전히 다운된 상태였다.
심지어 밥도 안 먹는데 나나 화연이나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후우…….”
가기 전에 어떻게 해야 될 거 같은데…….
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네.
멀찍이 떨어진 화린의 모습에 보다 못한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화린아.”
내가 다가가자 화린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슬 갈 준비해야 될 거 같은데…….”
“알아요.”
“그, 아침도 안 먹었는데 배 안 고파?”
“안 고파요.”
“그, 그래.”
말을 걸어도 단답형으로 대답하는데 진짜 살얼음판이 따로 없다.
거북한 분위기를 참지 못한 나는 갈 준비 중인 화연을 따로 불러냈다.
“야, 주화연.”
“어?”
“얘기 좀 하자.”
내가 숙소 뒤편으로 눈짓하자 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 뒤편으로 향하는 사이 화연은 나를 쫄래쫄래 따라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상 얘도 내가 무슨 소릴 할지 대충 예상한 모양이다.
하긴, 자기도 스스로 염치없는 짓을 했단 거 정도는 느끼고 있는 거겠지.
단 둘만 있는 것을 확인한 내가 잔뜩 풀이 죽은 화연에게 물었다.
“쟤 어떡하냐?”
“나도 몰라…….”
내 말에 화연이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몇 번 말 걸었는데 대답도 잘 안 해주고…….”
그래도 언니한테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이거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화가 난 모양이다.
“자기만 빼놓고 놀았다고 삐진 거 같은데.”
“그래도 어떻게 말은 섞어보지.”
“대답도 잘 안 하는데 어떡하라고…….”
그리 말하며 입술을 깨무는 화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래도 둘이 방 같이 잡아서 자던데.
나랑 다르게 둘이서 대화할 기회 정도는 있었던 거 아닌가?
“설마 너 밤에 동생이랑 얘기 안 나누고 진짜 그냥 잔 거야?”
“미쳤어?!”
내 말에 얌전히 있던 화연이 펄쩍 뛰었다.
“텐트에서 한 판 했다고 어떻게 말해!”
“누가 사실대로 말하래? 대충 둘러댈 수도 있잖아.”
“그럼 현수 네가 하지 그랬어.”
“너희가 자매니까 네가 말이 더 통할 거라 생각했지.”
“나야 어제 밤에 네가 잘 얘기한 줄 알고…….”
“딱히 얘기한 것도 없는데…….”
“…….”
“…….”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하.”
어쩌지.
화연이 얘만 믿고 둘이 집에 보내기엔 영 껄끄러운데.
“……일단 도착하면 내가 따로 얘기해 볼게.”
이건 내가 수습하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미안…….”
나한테만 뒷수습을 맡기는 것이 미안한지 화연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내가 괜히 고집 부려서.”
“아냐. 너한테 넘어간 내 잘못도 있으니까.”
“으으, 놀러 와서 이게 뭐야.”
“그래도 중간까지는 잘 놀았잖아. 너무 자책하진 말고.”
“응…….”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우리는 서로 간에 별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저 멀리 떨어진 화린을 불렀다.
“화린아, 가자!”
“…….”
내 부름에 터벅터벅 걸어온 화린이 말도 없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화린의 모습을 나는 물론이고 운전석에 앉은 화연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탕!
거칠게 차 문을 닫는 화린과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떠는 화연.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거 진짜 단단히 삐진 모양인데.
화연이한테는 격려했다만 솔직히 나도 비슷한 기분이긴 하다.
재밌게 놀러 와서 마무리가 왜 이리 찝찝한지.
일단은 나도 타자…….
“다음에 또 놀러 오거라!”
미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주인장만이 차에 탄 우리를 보며 밝게 인사하고 있었다.
아마 여기서 제대로 웃을 기분인 사람은 없을 테지만…….
일단은 잘 대접해 주신 분이니 인사라도 제대로 드려야겠지.
밖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주인장에게 나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잘 놀다 갑니다.”
“그래. 자네도 나중에 화연이랑 사귀면 또 한 번 놀러오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으허허허!”
아니, 지금 그런 소릴 하면……!
인사를 마친 나는 힐끔 뒷좌석에 앉은 화린을 바라보았다.
“…….”
와, 완전 똥 씹은 표정이네.
저걸 어떻게 풀어줘야 되냐.
“……안 가요?”
“가, 가야지.”
화린의 재촉에 눈치를 보던 화연이 급하게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부릉─.
그렇게 찝찝한 마무리와 함께, 주 자매와 함께 하는 여행은 끝이 나고 있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큰 숙제가 하나 생긴 셈이지만.
***
수 시간에 걸쳐 우리는 원래 살고 있던 동네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
하, 진짜 숨 막혀서 질식하는 줄 알았네.
설마 했는데 집에 갈 때까지 진짜 한 마디도 안 할 줄이야.
휴게소에서 맛있는 거 사준대도 됐다고만 하고.
탕.
이제 어떡하나 고민하는 사이 차 문을 닫으며 내리는 화린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꼴을 두고 집으로 보낼 순 없지.
“화린아.”
잠시 망설이던 내가 화린에게 다가갔다.
“왜요.”
어우, 표정 살벌하네 진짜…….
내가 이래서 그냥 놀고 오기만 하려고 했던 건데…….
아니지,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뭐해.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최대한 뒷수습을 잘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게…….”
“빨리 말해요.”
번뜩 째려보는 화린의 눈빛에 절로 몸이 움찔 떨린다.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호, 혹시 오늘 바쁘니?”
“이제 도착했는데 뭐가 바쁘겠어요.”
“어, 그렇지…….”
“빨리 얘기해요. 저 씻고 싶으니까.”
“음, 미안한데……. 그 전에 나랑 얘기 좀 하지 않을래?”
“좋아요.”
“……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화린의 말에 순간 벙찌고 말았다.
태도만 봐서는 다 쌩까고 무시할 줄 알았더니.
그래도 어제 일이 궁금하긴 궁금한 건가?
“뭘 그렇게 놀라요. 자기가 물어놓고.”
“아, 아니. 음, 그래. 그러면 일단……. 카페라도 갈까?”
“그래요.”
뭐, 나야 일이 줄었으니 잘 됐지.
화린의 대답을 들은 나는 아직 차에 타고 있는 화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 안에서 우리를 보던 화연이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다시 쏙 고개를 집어넣었다.
“허 참.”
쟤 뭐 하냐.
그렇게 눈치 볼 거면 그냥 대놓고 듣던가.
“야, 문 열어봐.”
내 재촉에 슬그머니 창문을 내린 화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화린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
“어……. 응. 미안.”
“됐다니까. 자꾸 사과하지 마.”
“나중에 밥이라도 살게.”
그래, 그걸로 네 마음이 편해지면 됐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걱정 말라는 표시로 창문을 툭툭 쳤다.
그제야 불안하던 화연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럼 부탁할게!”
부릉─.
그렇게 차를 몰고 유유히 사라지는 화연.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몸을 돌려 화린을 바라보았다.
“갈까.”
뚱한 표정으로 날 보던 화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팔뚝에 찰싹 달라붙었다.
거 표정은 영 못마땅해 보이는데 하는 짓은 귀엽네.
“그럼 카페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화린과 함께 카페로 이동했다.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화린은 별 말도 없이 그저 내 팔뚝을 잡으며 걸을 뿐이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환하게 웃으며 반기는 종업원의 인사에 화린이 얼굴을 팍 찡그렸다.
아니, 인사하는 것까지 그러면 어떡하라고.
“어……. 뭐 마실래?”
“마실 거 말고 사도 돼요?”
“당연하지.”
“그럼 이걸로 할게요.”
나는 아메리카노, 화린은 초코 케이크에 카페라떼.
지금껏 아무것도 안 먹더니 은근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그렇게 주문을 마친 우리는 들고 온 음식과 음료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
“…….”
서로 마주보는 형태가 된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화린도 그저 날 바라보며 달달해 보이는 음료수를 쪽 빨기만 할 뿐.
그렇게 서로 각을 재듯 눈치만 살피는 시간이 수 분.
결국 침묵을 참지 못했는지 화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시선을 맞추는 화린을 보며 나는 커피를 꼴깍 삼켰다.
“어, 어어.”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요.”
“아니, 너 화난 거 아닌가 해서…….”
“딱히 화 안 났는데요?”
화가 안 나기는 개뿔, 차에서 한 마디도 안 하던데.
물론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얌전히 화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빠가 어제 저한테 그랬죠. 제가 묻는 건 다 대답해줄 거라고.”
“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오빠.”
내 말을 끊으며 화린이 말을 이었다.
“저는요. 막 에둘러서 말하는 거 엄청 싫어하거든요? 그러니까 바로바로 물어볼게요.”
“그, 그래.”
“일단 첫 번째.”
노려보듯 좁혀진 눈매로 화린이 나를 추궁했다.
“오빠 저희 언니랑 무슨 관계예요?”
오우, 처음부터 쌔게 나가네.
이제 와서 그냥 친구 사이라고 해 봤자 안 믿을 게 뻔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찝찝한 게 사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화린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갔다.
“오빠가 분명 애인은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삼촌한테도 연인 관계는 아니라고 말한 거 확실하게 들었고.”
“음, 그게…….”
“제대로 말해주세요. 이 질문에 따라서 앞으로 할 질문들이 달라지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는 화린.
내 대답을 듣기 전까지 저 팔짱이 풀어질 일은 요원해 보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지.
잠시 고민한 나는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연인 미만 친구 이상……. 이라고 해야 되나.”
내 대답에 화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네? 뭐예요 그게?”
“거짓말 아니야. 정말 그렇게 아니면 표현이 안 돼서…….”
“섹파예요?”
“풉!”
너무도 직설적인 발언에 그대로 마시던 커피를 내뿜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놓고 물어보네!
곧바로 휴지로 슥슥 닦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변에 우리 얘기를 듣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안심한 나는 고개를 가져다대며 목소리를 줄여 말했다.
“화, 화린아. 그래도 여기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건 조금…….”
“누가 우리 말하는 거 듣는다고 그래요? 자꾸 피하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줘요.”
“아니, 그게.”
“오빠랑 언니랑 그냥 몸만 주고받는 관계라는 거죠? 사귀지는 않고 그냥 섹스만 했다?”
“야, 야……!”
“불편하면 빨리 대답이나 해요.”
이거 애매하게 대답해서는 끝이 안 나겠네.
“그래, 맞아.”
어쩔 수 없이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네가 생각한 대로야.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걔랑은……. 그렇고 그런 관계지.”
“역시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그런 내 대답에 턱을 괴며 생각에 빠지는 화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의외로 그다지 충격 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역시 이럴 거라고 화린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마침내 고민이 끝난 화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흠, 그럼 두 번째 질문은 그냥 넘어가도 되겠네요.”
“두 번째 질문이 뭐였는데?”
“어제 둘이서 사라진 적 몇 번 있었잖아요. 뭐 했냐 물어보려고 했죠.”
“…….”
“둘이 반응 보니까 굳이 제가 안 물어봐도 알겠더라고요.”
“크흠…….”
“그럼 이것도 됐고, 마지막 질문.”
곤란해 하는 나를 보며 화린이 재차 말을 이었다.
“오빠, 그러면……. 저는 어때요?”
“뭐?”
“뭘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래요? 어제 말한 거 다시 얘기하는 것뿐이잖아요. 저는 두 번째로 안 되겠냐고.”
“아니, 하지만…….”
이번 질문에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화린이 예상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이건 역시 경우가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화린이 넌 미성년자잖아.”
내 대답에 화린이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그 표정은 뭔데.
나도 나름 상황 봐 가면서 하는 거거든?
“그게 뭐가 어때서요!”
“어떻고 말고 당연히 안 되는 거 아냐? 사회적 시선이라는 것도 있고.”
“하, 언제는 저도 여자로 보인다고 해 놓고!”
답답하다는 듯 화린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와, 진짜! 저한테 그렇게 말했던 거 다 거짓말이었어요? 저한테 꼴린다면서요!”
“야, 야! 그렇게까진 말 안 했거든?!”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다고요!”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줄여……!”
잔뜩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화린.
덕분에 내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가고 있었다.
“후우…….”
그렇게 소리치는 화린을 겨우 진정시킨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엔 여기 카페 절대 안 와야지.
“저기, 화린아.”
“왜요!”
“말했다시피 네가 여자로서 매력적인 건 사실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러면……!”
“하지만 지금 건 경우가 다르잖아. 하고 싶다고 해서 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고. 하물며 섹…파 여동생이랑 관계를 한다는 건데.”
“…….”
정론인 내 말에 할 말을 잃고 입술을 깨무는 화린.
테이블 위로 올라온 머그컵을 꽉 쥐는 양 손에 핏줄이 살짝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런 화린을 보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분명 어제 그렇게 얘기하고 마무리 잘 지었잖아. 나도 네가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하지만……. 하지만!”
나긋한 내 어조에도 불구하고 화린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가 어제 언니랑 둘이서 그렇게 막 놀고 있으니까……. 저도 괜히 짜증났단 말이에요!”
“…….”
“나도 예쁘다고 해 놓고, 둘이서만 그렇게, 씨이……!”
그러니까 어제 화연이랑 쌔쌔쌔 했던 게 기폭제였군.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한 건데.
이건 진짜 밥 한 번 비싸게 얻어먹지 않으면 가성비가 안 맞겠어.
“오빠.”
곧바로 이성을 찾은 화린의 목소리가 다시 조금 침착해졌다.
표정은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거 같긴 했지만.
“그러니까 오빠 말은 제가 미성년자라서 안 된다는 거죠? 딱히 저희 언니 때문에 망설인다던가 그런 이유는 아닌 거죠?”
“아니, 그것도 없진 않은데…….”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러면.”
거기까지 말한 화린이 말문을 멈추고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졸업식 날.”
그 순간 화린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들었다.
“올해가 끝나면 저도 성인이란 얘기잖아요.”
“어?”
“그러니까 졸업식 날에 봐요.”
“아니, 그 말은…….”
“그 때면 저도 괜찮다는 얘기잖아요. 사실은 딱 1월 1일에 봐도 되지만 오빠 성격에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할 거 같고. 그러니까 졸업식 날.”
엥?
아니, 그게 그렇게 되나……?
“그 때가 되면 오빠도……. 저 받아주는 거죠?”
그제서야 화린의 말뜻을 깨달은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참고로 현재 날짜는 8월.
즉 화린이 사회적으로 성인이 되기까지 4달도 안 남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화린의 말대로 졸업식이 지난다면, 그건 말 그대로 고등학생을 벗어나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성인이라는 얘기였다.
와,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네.
‘섹파의 여동생과도 섹파라니……. 이게 맞는 건가?’
뭐, 나도 오는 거 안 내치는 주의라고는 하지만…….
심지어 귀엽게 보기만 한 동생인데…….
그렇다고 막상 내빼자니 나도 내뱉은 말이 있어서 무조건 안 된다고 하기도 힘들고.
“아니, 그게 말이야…….”
결연한 표정의 화린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고자 애썼다.
“그, 화린이 너라면 충분히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
“싫어요.”
허나 그런 내 변명에도 불구하고 화린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는 첫 경험은 오빠로 결정했으니까.”
“하지만 졸업식까지면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잖아? 그 안에 혹시 더 좋은 남자랑 사귈 수도 있는 일이니까…….”
“전 오빠 만난 뒤로 다른 남자들은 남자로 안 보여요.”
“…….”
“힘들지만 참아 볼게요. 그 정도야 충분히 참을 수 있으니까.”
“아니, 그게…….”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요.”
이미 마음을 정한 화린의 모습에는 일체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하…….’
그런 화린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네 달 뒤에 보면 알 수 있겠지.
미래의 일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는 걸로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