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15. 미남은 덮밥을 좋아해(4)
* * *
펜션으로 들어간 화연이 두리번거리며 막내 삼촌을 찾았다.
“삼촌! 저 왔어요!”
“오, 화연이 왔구나!”
그녀의 부름에 방 한 켠에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구나.”
“저번에 제사 때 봤으면서 뭘.”
“허허허.”
풍채 좋은 체구를 지닌 사내가 화연을 보며 후덕한 미소를 지었다.
30대 중반이니 화연과의 나이 차이는 불과 10년 정도.
나이 차이도 비교적 적고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라 그런지, 화연은 다른 친척들에 비해서 삼촌이 가장 허물없이 느껴졌다.
몇 안 되는 남자 지인 중에서 가장 털털한 성격이기도 했고.
허나 그리 여겼던 것도 이제는 옛 말.
자신이 아는 가장 털털한 성격의 남자는 눈앞의 삼촌이 아니었으니까.
‘그 쪽은 너무 털털해서 문제긴 해.’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것도 잠시.
씁쓸한 기분을 털어내듯 화연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잘 지냈어요, 삼촌? 아직도 여친은 없고?”
“너는 오자마자 한다는 말이 그거니?”
“안쓰러워서 그러죠.”
“그거 저번에 볼 때도 말했거든, 조카야? 일단 짐부터 옮기자.”
못 말린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은 화연의 삼촌이 함께 밖으로 나왔다.
차에서 짐을 옮기던 와중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화린이가 안 보이는구나.”
“먼저 내려가 있으라고 했어요. 일행한테 근처 구경도 시켜줄 겸.”
“그러고 보니 친구 한 명 더 온다고 했었지. 화린이랑 같이 있는 거니?”
“네.”
“남자랬지?”
그리 물은 삼촌이 문득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남자친구?”
“친구에요. ……일단은.”
“호오?”
짙어지는 삼촌의 미소를 보며 화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다니까.’
사람을 곧잘 놀리려는 저 장난끼 가득한 성격.
현수도 그렇지만 눈앞의 삼촌도 그런 면이 꽤 있다.
어릴 적에야 그런 털털하면서도 장난끼 넘치는 삼촌이 좋아서 졸졸 따라다녔더랬지.
‘그런 점이 좋았었지.’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이제는…….
더 소중한 사람이 생겼으니까.
‘현수도 딱 이 정도만 됐으면 좋았을 걸.’
물론 삼촌은 딱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현수만큼 문란하게 노는 사람도 아니었고.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노총각이니 좀 문란하게 노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화연이 내심 둘을 비교하는 사이, 삼촌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이어갔다.
“남자 혼자서 자매 여행에 낀다는 것부터가 평범하진 않은데 말이다.”
“그럴 수도 있죠 뭘.”
“허허. 삼촌 눈은 못 속이지. 내가 네 기저귀도 채워줬는데.”
“무슨 20년도 더 전 얘기를 하고 그래요…….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그래서 남자친구가 아니면 뭐냐. 썸?”
“……노코멘트.”
“그 애매한 대답은 뭐니, 조카야?”
“그, 그런 게 있어요. 설명하기가 좀…….”
“쯧쯧.”
머뭇거리는 화연을 본 사내가 작게 혀를 찼다.
“너는 참 여전하구나.”
“뭐가요?”
“그 소심하게 구는 거 말이다.”
“…….”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겨서 참 얼굴값을 못 하니. 쯧쯧, 이 삼촌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됐거든요?”
“너 자꾸 그렇게 남자 앞에서 숙맥처럼 굴면 정말 남자 하나 못 사귄다.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진짜 삼촌이 할 말은 아니네요.”
“지금도 여자는 충분히 만날 수 있어.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안 사귀는 거지. 나 좋다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니?”
“노총각이 그리 말해봤자 설득력 하나도 없거든요?”
“인연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리고 또 혹시나 싶어서 말이다.”
“네?”
“우리 귀여운 조카 때문에 일부러 옆자리를 이렇게 남기고 있는 거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너도 어릴 적에 그랬잖느냐. 그 때는 무조건 나랑 결혼할 거라면서? 심지어 집에 갈 때는 나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아주 온갖 떼를…….”
“으아악!”
도대체 이 아저씨는 몇 년 전 얘기를 하는 거야!
얼굴이 빨개진 화연이 손을 거세게 내저었다.
“그, 그건 어릴 적 얘기잖아요! 친척끼리 무슨!”
“으하하!”
당황한 화연의 모습에 삼촌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당연히 농담이지! 뭘 그리 당황을 하고 있어,”
“으, 하여간……. 걔 앞에선 절대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역시 좋아하는구나?”
“…….”
“하하.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째려보지 마라.”
그제야 장난을 멈춘 삼촌이 진지한 표정으로 화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전혀 안 바뀐 건 아닐지도 모르겠어.”
자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삼촌의 말에 화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 성격 말이다. 소심하다고 말은 했다만, 의외로 할 건 다 하고 있나 보구나.”
“…….”
“하하. 그 소심했던 조카가 남자를 데리고 올 줄이야.”
“그만 좀 놀려요……. 그리고 뭐, 저도 이제 스물여섯이니까요.”
“그렇지. 그 쯤 먹었으면 성장할 때도 됐다.”
그렇게 이후로도 잡담을 하면서 화연은 삼촌과 함께 짐을 옮겼다.
짐이라고 해 봐야 옷 몇 벌과 음식들 정도라 옮기는 데에는 별 시간이 들지 않았다.
모든 짐을 옮기고 방을 둘러본 화연이 말했다.
“방 진짜 좋네요.”
“괜찮지? 이번에 새롭게 인테리어 했다.”
“성수기에 너무 좋은 방 잡아주신 거 아녜요?”
“뭘. 조카 부탁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짐은 이걸로 끝?”
“네. 고마워요 삼촌.”
“고맙긴. 그럼 가보마. 그 남자친구는 여유 되면 삼촌한테도 소개시켜 주고.”
“아직 남자친구 아니래도요.”
“아직이란 건 시간문제란 얘기지?”
“그만 좀 놀리라니까, 진짜…….”
“하하. 그러면 재밌게 놀거라.”
껄껄 웃으며 떠나가는 삼촌을 보며 화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친구라…….’
홀로 남은 방 안.
화연의 머릿속으로 문득 삼촌이 한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과연 다른 섹파들이 있는 상황에서 남자친구라 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거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장 먼저 현수와 잔 건 자신인데.
……맞겠지, 처음?
‘그러고 보면 처음도 그런 곳에서…….’
발그레진 얼굴로 화연은 현수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고깃집 화장실에서 여자를 덮치는 미남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진짜 믿겨지지가 않는다.
화장실에서 처음 만난 여자를 달아오르게 만들고, 여자가 기뻐할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어리버리한 자신을 휘어잡으며 모텔로 데려가고, 심지어 밤일도 엄청나게 잘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그 날의 기억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꽃뱀이 아니라는 답을 받은 그 순간.
‘다른 건 생각도 안 났지. 정말로.’
자신의 머릿속에는 그저 단 하나.
‘섹스’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날 성욕에 지배당해 마구잡이로 든 생각들.
‘으으, 진짜 미쳤지…….’
그 기억들을 떠올리는 순간, 화연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양 손으로 푹 가렸다.
‘그 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남자와 자고 싶다.
당시에는 오로지 그런 욕망뿐이었다.
좋아하고 말고 따위는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4달 동안 그와 몸을 섞고, 중간 중간 대화를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심지어 현수가 몸을 막 굴리는 애였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어느 순간 자신은 계속해서 현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의 하나뿐인 여자 친구가 되고 싶다.
하지만 현수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의 곁에 남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와 몸을 섞은 지 벌써 4달.
허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고민을 해 봐도 뭘 어쩌고 싶은 건지는 확답이 서지 않았다.
남자친구니 여자친구니,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님은 안다.
현수라면 다른 여자들을 쉽사리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그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화연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단 하나.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다른 여자들보다는……. 내가 최고로 여겨졌으면 좋겠는걸.’
자신은 현수를 누구보다 좋아하니까.
그렇기에 현수도 자신을 누구보다 좋아해줬으면 하니까.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도 자신만을 바라봐 줄지도 모른다.
꾸준히 곁에 머무른다면, 언젠가는 당당하게 그를 자신의 ‘남자친구’라 소개하는 날이 오게 되리라.
“……좋아, 힘내자!”
짝!
자신의 볼을 두들기며, 화연이 기운차게 소리쳤다.
거기에는 앞서 보였던 어두운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할 수 있어, 주화연! 아자아자 화이팅!”
그렇게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당부의 말을 건넨 뒤.
텐트를 양 손으로 기운차게 집어든 화연이 힘차게 방문을 열었다.
“꺅!”
“……너 안에서 뭐 하냐?”
하지만 눈앞에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현수를 본 순간, 다부졌던 화연의 표정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혀, 현수야?”
***
“뭘 그렇게 놀라? 안에서 뭐 하길래 아자아자 그러고 있는데.”
“어? 드, 들었어?”
“그야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데 들리지.”
하도 늦길래 도대체 뭐 하는가 와 봤더니 뭘 하는 건지 원.
“으윽…….”
내 말에 화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말이 없어진 화연을 대신해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거 텐트지?”
“응? 아, 으응.”
“그래. 짐 정리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으면 도울 걸 그랬네.“
”아냐. 이제 다 끝났으니까. 아, 차라리 잘 됐다. 올라온 김에 나 좀 도와줘.”
“어, 근데 지금 화린이가…….”
“화린이는 혼자서도 잘 노니까 괜찮아. 일단 좀 따라와 볼래?”
“뭔데?”
“됐으니까.”
얘가 내 말을 다 끊을 때도 있네.
뭐, 화린이 상태도 지금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닌 거 같으니까.
잠깐 정도야 괜찮겠지.
그렇게 나는 화연을 따라 펜션 뒤편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에는 공기가 빠진 각종 튜브들이 종류별로 이리저리 모여 있었다.
텐트를 내려놓고 자리에 주저앉은 화연이 튜브를 들고는 공기 펌프를 펌프질하기 시작했다.
“읏차.”
펌프질을 하던 화연이 가만히 서 있는 날 보며 앉으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뭐해. 너도 해야지. 이거 공기 채워서 가자.”
“아, 응. 그건 알겠는데 지금 화린이 혼자서…….”
“……왜 자꾸 화린이 얘기를 해?”
“어?”
“신경 쓰여?”
“혼자 있는데 당연히 신경 쓰이지.”
“흐음…….”
“그리고 지금 그런 얘길 하려는 게 아니라…….”
“설마 너 화린이도 건드릴 생각인 건 아니지?”
“뭐?”
어느새 펌프질을 멈추고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화연.
그런 화연을 보며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상하네.
평소에 이런 얘기 먼저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심지어 지금은 자기 동생한테 질투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펜션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면 혼자 짐 옮긴 것 때문에 삐지기라도 했나?
“야. 걔 네 친동생이야.”
“나도 알아.”
“알면서 그런 소릴 하냐?”
“그, 그야 나도 이런 말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현수 네가 평소에 보여준 게 있으니까 그렇잖아.”
흠, 그렇게 말하니까 또 할 말이 없네.
왜 갑자기 불안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더 불안해하지 않도록 안심시켜줘야겠네.
그리 생각한 나는 이전부터 생각한 부분을 솔직하게 전달하기로 했다.
“딱 말하는데 나 걔한테 아무 감정 없어.”
“진짜로?”
“그래. 애한테 무슨 감정이 있다고. 설마 털도 다 안 났을 거 같은 애 건드리거나 할 거 같냐?”
“털은 났을걸?”
“……어, 그래. 아무튼 화린이한테는 너나 다른 애들처럼 몸 섞거나 그러진 않을 거야. 그냥 귀여운 동생 보살펴주는 거지.”
“그래도 민짜는 안 건드린다 이거네?”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아무 여자한테나 다 집적거리는 나쁜 남자.”
“이젠 안 그럴 거야.”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화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믿어도 돼?”
“당연하지.”
“하지만 화린이는 너 좋아하잖아.”
아니, 잠깐만.
은근슬쩍 엄청난 얘길 막 꺼내네.
“너 알고 있었냐?”
“모를 리가 없잖아.”
내 말에 화연이 고개를 으쓱였다.
“같이 사는데. 애초에 걔 처음에 너 만날 때 엄청 들떴었다고. 집에서 아주 난리 부르스를 쳤다니까? 나한테 같이 가야 한다고 얼마나 떼를 쓰던지.”
“아, 그 때 너 아니면 안 본다고 했었나.”
“응. 그러니까 어차피 현수 너도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그야 뭐…….”
“그런데 현수 너는 오는 애 안 내치는 주의잖아. 그러면 계속 그렇게 모른 척 한다는 얘기네?”
“그건…….”
그 말에는 나도 쉽사리 대답하기 힘들었다.
분명 앞으로 여자는 함부로 만날 생각은 없다.
화린과 다른 섹파들 마냥 진도를 뺄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는 사람 안 내친다는 말 자체는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태다.
“……대답 못 하는구나.”
내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화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진짜 나쁜 놈.”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던 화연이 갑자기 내 아래쪽에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에서 나는 그녀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욕정이 피어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얘, 설마 밖에서 하려는 건…….
“뭐 하려고……?”
“뭐 하는 거 같아 보여?”
내 말에 도리어 도발적인 표정으로 씨익 웃는 화연.
그 모습에 다급해진 내가 뭐라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얍!"
"으악!"
내 골반에 손을 댄 화연이 순식간에 내 아랫도리를 확 내렸다.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