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15. 미남은 덮밥을 좋아해(3)
* * *
얼핏 봐도 3미터는 떨어진 거리.
일반적이라면 곧바로 반응해도 늦을 수 있을 만한 거리다.
하지만.
“화린아!”
내게는 작가가 준 완벽한 신체 능력이 있단 말이지.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 화린의 등을 겨우 붙들었다.
내 몸임에도 짐승에 달하는 반사신경이었다.
“허윽!”
고개가 휙 젖혀진 화린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허리를 젖혔다.
마치 왈츠 동작을 연상케 하는 자세로.
아슬아슬한 자세로 화린을 잡은 채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네…….
방금 그걸로 수명이 1년 정도는 깎이지 않았을까.
“오, 오빠?”
“괜찮아? 안 다쳤어?”
“어, 어어……. 오빠 엄청 빠르시네요.”
“너 진짜……!”
순간 소리를 버럭 지르려던 것을 참고 화린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지 화린은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화린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됐다. 아무튼 막았으면 됐지.
놀러왔는데 화내기도 그렇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
“화린아?”
얘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
아까까진 그렇게 까불거리던 주제에.
’설마 다쳤나?‘
의아한 표정으로 화린을 살펴보던 것도 잠시.
나는 금세 화린이 입을 다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슬쩍 한 번 떠 볼까…….
“야, 주화린.”
“왜, 왜요.”
“너 얼굴 빨개졌다.”
“읏?!”
내 말에 서둘러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화린.
살짝 젖은 머리카락 너머로 목 뒤가 빨갛게 익은 게 보였다.
설마 얘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건가.
“큭큭.”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화린이 다시 내 쪽으로 돌렸다.
분함과 부끄러움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화린.
그 얼굴빛은 완전히 홍당무 마냥 달아올라 있었다.
“우, 웃지 말고 이거 놔요! 다 쳐다보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쪽팔려, 씨이…….”
버둥거리는 화린을 꽉 잡은 뒤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게 화린이 바로 서기 직전.
나는 기습적으로 그녀의 오금 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꺅!”
순식간에 공주님 안기를 시전하자 화린이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와, 근데 얘 엄청 가볍네.
평소에 밥 잘 안 먹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뭐, 뭐하는 거예요?!”
내게 안긴 채 소리치는 화린의 표정이 꽤나 볼만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뻥이지롱."
“잠, 오빠아!”
“공주님 안기를 당한 소감이 어때?”
“공주님 안기가 아니라 왕자님 안기겠죠!”
아, 그런가?
여기서는 공주님 안기가 아니겠구나.
“아, 진짜!”
“야, 야. 다친다.”
깜찍하게 손발을 휙휙 내젓는 화린.
내려오려고 버둥거리는 화린의 몸을 꽉 붙잡은 채 낄낄 웃었다.
“큭큭. 뭐하냐?”
“내, 내려줘요!”
“싫은데?”
“다 쳐다보잖아요, 좀……!”
“쳐다본다고?”
화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제야 우리에게 집중된 시선을 깨달았다.
’진짜네.‘
물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은 물론이고, 텐트 주변에 있던 보호자들까지 모두들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확 트이는 공간에 있는지라 더 시선이 집중된 모양이다.
음, 의식하니까 확실히 좀 민망하네.
“오빠 땜에 쪽 다 팔렸어……!“
이제 내게 반항하는 건 포기한 화린이 얼굴을 양 손으로 푹 가렸다.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니까 좀 미안해지네.
뭐, 이 정도 놀렸으면 나도 다 즐겼지.
“진짜 내려줄게.”
“으으.”
물가를 벗어난 나는 그제서야 화린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두 다리로 선 화린은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얼굴 못 들겠어…….“
“혹시 화났어?”
“화난 게 아니라 부끄럽다고요……!”
자리에 푹 쪼그린 채 고개 숙인 화린.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놀렸나.‘
이 세계에서는 익숙한 안기가 아닌가?
뭐, 원래 세계도 그리 흔한 건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이렇게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원래 세계에서 공주님 안기는 일종의 로망 비슷한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부끄러워하는 화린을 보아하니, 이 세계 기준의 왕자님 안기는 여자에게 상상 이상으로 민망한 행위인 듯했다.
하긴, 이 쪽 기준으로는 여자가 남자를 안고 싶을 터인데 그러긴 쉽지 않을 테고.
정작 힘이나 체구는 원래 세계 그대로니까.
26년을 남성 위주의 세상에서 살아온 만큼 이 괴리감은 쉽게 좁혀지지 않을 거 같다.
나는 쭈그려 앉은 화린 맞은편에 쭈그려 앉은 뒤 말했다.
“너 계속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 더 본다.”
“……사과해요.”
“엥?”
“사과 안 하면 안 일어날 거예요.”
“아니, 이건 애초에 네가 잘못해서 벌어진…….”
“안 일어나.”
이게 이젠 떼를 쓰네.
뭐, 나도 잘 모르고 한 건 사실이니까.
“알았어.”
나는 푹 숙인 화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분 나쁘지 않게, 부드러운 느낌으로.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공주님 안기는 안 할게.”
“…….”
그제서야 빼꼼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화린.
무언가 망설이듯 입을 쪼물거리던 화린이 작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딱히 싫다는 건 아닌데.”
귀를 대고 들어야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
자기 딴에도 안 들리게 말할 생각이었을 테지.
허나 이 말도 안 되는 육체는 청각마저 발달한 모양이다.
뭐, 평소 같으면 모른 척 했을 테지만…….
저러는 거 보니까 또 놀리고 싶어지네.
나는 그런 화린을 보며 또다시 씩 웃었다.
“그래, 싫은 건 아니었다……?”
“힉!”
“그럼 왜 사과하라고 한 건데? 성격 참 못됐네?”
”오빠 성격이 더 못됐거든요! 진짜 귀도 밝네엑!“
“목소리 삑사리 났다.”
“아으으으……!”
내 도발에 결국 화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윽!”
허나 그 순간 다시 신음을 내지르며 주저앉는 화린.
뭐야, 설마 진짜 다쳤어?
“잠깐만.”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화린을 편하게 앉히게 한 뒤 발목을 살폈다.
가녀린 발목에 손을 댄 순간 화린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읏……!”
“가만히 있어봐.”
“아니, 오빠. 그게 아니라…….”
“화 안 낼 테니까 가만히 있어.”
방금 전과 달리 진지한 어조로 말하자 화린이 그제서야 얌전해졌다.
하, 먼저 확인부터 했어야 되는데.
진짜 다쳤으면 이렇게 장난칠 때가 아니었잖아.
“발목 조금씩 돌려볼래?”
내 말에 화린이 발목을 살살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또 한 번 새어나왔다.
“으…….”
“많이 아파?”
“아, 아뇨. 좀 아프긴 한데 그 정돈 아니에요.”
“뼈 다쳤으면 큰일인데. 발목은 돌아가?”
“네에.”
“흐음.”
일단 돌아가는 거 보면 그냥 삔 수준인 거 같긴 한데.
아니, 내가 이걸 본다고 알 리가 있나.
그래봤자 의학 지식이라곤 군대에서 배운 지혈법 정도밖에 모르는 수준인데.
“잘하면 병원 가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 그 정돈 아니라니까요. 그냥 조금 삐끗한 수준인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진짜 괜찮은데…….”
그리 말하는 화린의 어깨가 축 쳐졌다.
슬쩍 표정을 바라보니 아주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방금 전까진 그렇게 활발하던 녀석이.‘
이런 걸 보면 또 그 언니에 그 동생인가 싶다.
그래도 소심한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일단 저기 큰 바위로 가자.”
나는 풀이 죽은 화린을 향해 일부러 밝은 어조로 말했다.
“앉아서 상태 좀 기다려 보고.”
“오빠. 저 걸을 수 있어요.”
“안 돼. 그래도 일단은 무리하지 말자.”
“……으, 죄송해요.”
나한테 꾸중이라도 들을 줄 알았던 걸까.
내 사근사근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아직 불안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뭐, 놀러왔다가 자기 부주의로 망칠 수 있다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만…….
그래도 그렇게 풀이 죽으면 보는 나도 기분이 안 좋다고.
이거 기운이라도 좀 북돋아 줘야겠는걸.
“화린아.”
내 부름에 고개를 든 화린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네…….”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나 화 안 났으니까.”
“……정말요?”
“그래. 대신 앞으로 조심해야 돼. 알았지?”
그리 말한 나는 불안해하지 않도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기가 밴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손길에 옅게 흩어졌다.
쭈그려 앉은 나와 시선을 맞춘 채로,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여전히 표정에는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그런 화린을 보며 다시 한 번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린의 고개가 작게 끄덕이는 게 보였다.
“좋아, 착하다.”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자 슬슬 불안했던 표정도 풀리는 게 보인다.
그제서야 나는 쭈그린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펜션 가서 파스 좀 가지고 올게.”
그리 말하고 발을 때려던 그 순간.
“오빠.”
갑자기 화린이 내 팔목 소매를 확 붙들었다.
“잠깐만요.”
“왜?”
“그러니까……. 가, 가까이 좀 와 봐요.”
“뭔데 그래?”
“됐으니까 빨리요!”
이게 괜찮아지자마자 또 성질이네.
피식 웃은 나는 그녀의 요구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오빠.”
“왜. 빨리 말해.”
“그, 그러니까……. 오, 오빠는 6.25가 왜 일어났는지 알아요?
"갑자기 왠 뚱딴지 같은 소……."
아니, 잠깐만.
이 구닥다리 멘트는 분명…….
쪽.
그야말로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에 나는 화들짝 고개를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날 보며 새빨개진 얼굴로 화린이 중얼거렸다.
”바, 방심해서.“
어, 어어…….
확실히 방심하긴 했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오빠 어차피 저 여자로 안 보잖아요.”
당황한 나와는 달리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화린.
입을 열 때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좋아하는 거 알고 있으면서.”
“아니…….”
“그러니까 이, 이 정도는……. 오빠한텐 상관없는 거잖아요.”
화린의 말대로 얘가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 전화번호를 따간 애가 아닌가.
당연히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곤란한데…….‘
이렇게 화린이 대놓고 들이댈 때까지 기다리려던 건 결단코 아니었다.
아무리 이런 세계라도 미자인 이상 끝까지 간다는 건 불안한 요소가 있다.
그러니 기왕이면 화린 앞에서는 그냥 동경하는 오빠로 남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게…….
지금 난 니 언니랑 섹스하는 관계라고?
“그, 일단 약부터 가져…….”
“언니랑은.”
일단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화린은 그조차도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멈칫한 날 향해 화린이 충격적인 얘기를 꺼내들었다.
“언니랑은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어?”
“저희 언니, 언제부터 오빠랑 사귀었냐고요.”
아니, 거기까지 들킨 거야?
설마 화연이가 다 말한 건 아니겠지?
“다 알고 있어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화린이 말했다.
”언니랑 사귀는 거.”
방금 전의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냐는 듯, 무덤덤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화린은 가만히 날 주시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걸 뭐 어떻게 하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하지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화린 쪽이었다.
“오빠는……. 제가 먼저 좋아했잖아요.”
“어, 그게 말이지…….”
“고백도 내가 먼저 했는데…….”
으음…….
그래도 섹스 순위는 언니 쪽이 올타임 넘버원인데…….
“근데 언니는, 언니는……!”
그 순간 화린의 눈가로 눈물이 핑 고였다.
아니, 잠깐만.
설마 여기서 울려고?!
“씨잉……!”
“야, 야…….”
“히이잉……!”
결국 화린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내가 먼저, 크흡!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주륵 주륵 눈물을 흘리는 눈물을 우악스럽게 닦아내는 화린.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혀는 멈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금세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화린은 마음껏 진심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흐윽! 내가 먼저, 내가 먼저 오빠 찜했는데에! 훌쩍, 언니는, 평소엔, 킁! 남자도, 안 만나는, 히끅! 주제에!”
“야, 야.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흣, 흐으윽……!"
본인은 참으려 입을 막아보려 해도 흐느낌 소리는 갈수록 커져갈 따름.
한 번 울음보가 터진 이상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점차 흐느끼는 소리가 커지면서 다시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흐어어어엉!”
결국 참지 못하고 화린이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하.
이젠 나도 모르겠다.
갈팡이던 나는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흐어어엉……."
내 품에서 안기자 오히려 더 서러워진 걸까.
도리어 울음소리가 커지는 거 같다.
이제는 거의 오열하고 있는 화린을 안은 채, 나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