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15. 미남은 덮밥을 좋아해(2)
* * *
뒷좌석에 앉은 채 화린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인지 주말임에도 막히지 않는 도로.
쏜살같이 달리는 차에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으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날씨도 좋고.’
흘러가는 창밖으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과 부풀어 오른 적란운.
날씨도 쾌청한 걸 보아하니 괜히 저번처럼 비가 와서 텐트를 접을 염려는 없어 보였다.
거기에 그렇게 고대하던 오빠와의 여행이라니.
오늘 하루 오빠와 함께 놀 생각에 화린의 입가에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히힛.“
“그렇게 좋아?”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린이 고개를 돌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현수가 화린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에 웃음꽃이 폈네.”
훈훈하게 미소 짓는 오빠의 얼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린은 스스로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얼굴로 그렇게 쳐다보는 건 반칙이잖아.
‘으으, 너무 히죽댔어.’
부끄러운 마음에 화린이 미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화린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현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으, 쪽팔려…….’
일단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화린이 입을 열었다.
“……놀러가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허나 생각과 달리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퉁명스러웠다.
부끄러울 때마다 보이는 화린의 나쁜 버릇이었다.
“하긴.”
퉁명스레 대꾸하는 화린의 목소리도 불구하고 현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그런 현수의 모습에 화린은 작게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특히 화린이 너는 노는 거 좋아하잖아.”
아, 저 표정.
사람 놀릴 때 나오는 그 얼굴이다.
“맨날 학교 가기 싫다고 톡으로 징징거리면서.”
“제, 제가 언제요!”
“아니야? 저번에도 나랑 야자 째고 영화 봤잖아.”
“악?!”
아니, 여기서 그걸 말하면 안 되는데?!
‘마, 망했다.’
허나 그리 생각해도 이미 늦었다.
그 말에 운전을 하던 화연이 백미러로 화린을 째릿 바라보기 시작했으니까.
“……주화린?”
“어, 언니! 아니야! 나 그래도 성적은 잘 나오잖아! 딱 한 번! 한 번만 짼 거야!”
“그래? 내 기억으론 한 번이 아닌 거 같은데.”
“오, 오빠아……!”
조급해진 그녀의 내심도 모른 채 실실 웃으며 말하는 현수.
그 모습에 화린은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으으, 오빠 진짜…….’
그래도 집에서는 나름 우등생으로 알고 있는데…….
심지어 우리 학교 선생님 언니인 거 다 알면서……!
슬쩍 백미러를 바라본 화린의 시선에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화린이 불안에 떠는 사이 ‘선생님 모드’가 된 화연이 말했다.
“또 그러면 담임한테 핸드폰 압수하라고 할 거야.”
“그, 그것만은…….”
“그럼 앞으로 이런 소리 안 들리게 잘 해. 알았어?”
“네에…….”
아, 진짜…….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
“휴우…….”
한숨을 쉬는 화린을 향해 현수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 마냥.
“음……. 미안.”
“…….”
나긋나긋한 어조로 달래는 현수를 보면서 한 마디 던지려고 했지만…….
결국 화린은 그러지 못했다.
솔직히 저런 현수의 모습도 화린에게는 조금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으, 진짜아…….'
스스로도 콩깍지가 제대로 씌인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약이 오르는 화린이었다.
‘치잇, 나도 화 낼 줄 알거든!’
괜히 심통이 난 화린이 홱 고개를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실제로는 그렇게 화가 안 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현수가 결국 내게 고개를 돌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
뭐야, 그걸로 끝이야?
“…….”
잠시 차 안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괜히 화난 척 했나…….’
묘해진 분위기에 화린은 자신의 태도를 조금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화 난 척 안 할걸.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길 얼마.
“아, 그러고 보니.”
화린을 뒤로 한 채 문득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현수 너 제주도 갔다 오지 않았어?”
“어. 그게 왜?”
“뭔가 한가해 보여서.”
“한가다하니……. 다 사정이 있었거든?”
“흐음.”
“그리고 그 땐 일 때문에 중간에 와야 했다고.”
밖을 보는 화린의 귀로 두 사람의 대화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갑자기 와야 돼서 제대로 놀지도 못했어.”
“평소에도 잘만 노는 주제에.”
“아니…….”
“혼자 놀러가니 벌 받은 거야, 이 한량아.”
“……너 설마 안 데려갔다고 삐졌냐?”
“뭐? 아, 아니거든?”
“너 일 하는데 어떻게 같이 가냐?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혼자 간 거야.”
“누가 뭐래……?”
“목소리가 이미 삐진 말툰데?”
“안 삐졌거든?!”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화 풀어.”
“안 삐졌다고 좀…….”
살랑살랑 애교를 부리는 오빠와 툴툴거리는 언니의 목소리.
시선은 밖을 보고 있는데도 화린의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그림이 그려졌다.
방금 전에는 연기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서운해진 화린이 입을 삐죽였다.
‘씨이, 언니한테는 저렇게 다정하면서 나한테는…….’
화린이 홀로 분을 삭이는 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은 아옹다옹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 뭐해! 잠깐! 꺅!”
“백수라고 놀린 벌이다 임마.”
“백수가 아니라 한량, 꺄흑! 야아!”
“그거나 그거나.”
“아흑! 너, 너어! 진짜 운전 중인데 뭐 하는, 힉!”
내 앞에서 둘 다 뭐 하는 건데.
결국 참지 못한 화린이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화연의 옆구리를 찔러대는 현수와 운전대를 잡은 채 살살 몸을 비트는 화연이 보였다.
“그, 그만 찔러어……!”
“알았어, 알았어.”
장난스레 웃고 있는 오빠와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언니.
그 모습을 본 순간 화린은 가슴이 바늘로 콕 찔리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어째서일까.
두 사람이 친하다는 것 정도는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나는 불편하게 느껴지는 걸까……?
“운전 중이잖아요, 오빠.”
그 순간 화린의 입에서 툭 말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낸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
입을 연 화린도 내심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린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위험하니까 그만해요.”
“어, 어어……. 미안.”
“저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응? 아, 그렇지…….”
“언니도 딱 잘라서 그만 하라고 해.”
“아, 응…….”
“쳇.”
작게 혀를 찬 화린이 홱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로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살피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댜시 무거워진 분위기 속.
화린은 앞서 했던 생각들을 곱씹었다.
‘역시…….’
지금까지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가정.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사귀고 있는 걸까……?’
화린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욱씬거리는 것을 느꼈다.
***
차에서 내린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목적지인 이곳, 계곡 근처 펜션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허나 그 1시간이 이번만큼은 마치 10시간으로 느껴졌다.
차에서 한 소리 한 화린이 내내 저기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뭐, 다 내 잘못이긴 하지만…….’
설마 화린이가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앞으로는 운전하는 사람한테 장난치는 건 자제해야겠다.
그래도 앞에 차 하나도 없이 널널했는데…….
"으읏."
속 좁은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화연이 작게 기지개를 펴며 나왔다.
차 문을 탁 닿은 화연이 날 보고는 씨익 웃었다.
“진짜 금방 오지?”
앞의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걸까, 평소답지 않게 애써 밝은 어조다.
그럼 나도 분위기에 맞춰서 행동해야겠지.
언제 무거운 분위기였냐는 듯 나도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근방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여기 꽤 괜찮아. 가족여행으로 세 번이나 왔는데도 또 오잖아.”
“그럼 오늘로 네 번째네?”
“응.”
“한 번 둘러보고 와도 돼?”
“안 될 거 뭐 있어. 보고 와. 난 방 잡고 있을 테니까.”
“그래.”
손을 흔드는 화연을 뒤로 한 채 나는 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슬그머니 차 밖으로 나온 화린의 모습이 보였다.
“크흠.”
나와 눈이 마주친 화린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화린을 보며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눈치 봐야 되는 건 오히려 내 쪽인데.
‘자매가 둘 다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뭐, 여기서는 일단 어른으로서 먼저 다가가야겠지.
“화린아.”
먼저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자 화린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 화린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나 여기 잘 모르는데 구경 좀 시켜줄래?”
“아, 네에……. 따라오세요.”
내 눈치를 보며 발걸음을 옮기는 화린.
그런 화린을 따라가며 나는 그제서야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와…….”
주변의 경치를 보면서 나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울 근처에 이런 계곡도 있었구나…….”
계곡이라 하면 내심 저기 지방에 있는 산골짜기 계곡이 최고일 거라 생각했는데.
허나 그런 내 편견과는 달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 계곡도 멋들어진 배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건 진짜 안 오면 후회할 뻔했네.
‘아니, 지금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어느새 거리가 벌어져 성큼성큼 걸어가는 화린의 뒷모습이 보였다.
쟤는 소개시켜 달라니까 혼자 가고 있네.
“화린아, 잠깐만.”
내가 서둘러 화린의 뒤를 쫓아 가녀린 팔목을 낚아챘다.
깜짝 놀란 화린이 고개를 홱 돌렸다.
“오, 오빠?!”
“저기, 차에서는 미안해.”
“네? 아, 그건…….”
내 사과에 눈을 끔뻑이던 것도 잠시.
얼굴을 살짝 붉힌 화린이 볼을 긁적였다.
“그……. 아니에요. 괜히 제가 오버해서.”
“뭐, 잘못한 건 사실이니까. 불편할 수 있지.”
“…….”
“앞으로 그런 장난 안칠게. 그러니까 화 풀지 않을래?”
“딱히 화 안 났는데…….”
쑥스러운지 고개를 홱 돌리며 대답하는 화린.
어째 솔직하지 못한 건 이 주씨 집안 특징인가 보다.
“그, 오빠는…….”
팔목을 잡힌 채 있던 화린이 날 보며 머뭇거렸다.
나는 그런 화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내린 내 시야 너머 화린의 꼬물거리는 발가락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오빠 혹시 언니랑…….”
“응?”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기운을 차린 것 마냥 고개를 홱 드는 화린.
그러고는 내 한쪽 팔뚝을 꽉 붙드는 게 아닌가.
“화린아?”
“구, 구경한다고 했죠? 그럼 저 따라와요!”
“아, 응.”
방금 뭔가 중요한 얘기 하려고 한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뭐, 알아서 하겠지.
보아하니 화린도 딱히 아까 일로 아직까지 화가 난 거 같지는 않아 보이고.
일단 분위기는 부드러워졌으니 괜찮겠지.
다시 기운을 차린 화린이 싹싹한 발걸음으로 계곡 쪽으로 날 끌어 당겼다.
나는 그런 화린과 함께 금세 계곡에 도착했다.
쏴아아
물 소리를 들으며 나는 주변의 경치를 감상했다.
떨어지는 물줄기 너머 보이는 작은 폭포수.
얼굴로 조금씩 떨어지는 기분 좋은 물방울의 감촉.
가족들과 온 아이들 몇 명이 꺄르륵 뛰어다니는 소리까지.
“좋죠?”
계곡에 도착한 화린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에는 앞서 보여준 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꼭 니가 여기 주인인 것처럼 말한다?”
급격한 태세전환에 피식 웃은 내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 내 놀림에 도리어 화린의 콧대가 높아졌다.
“헷, 주인은 아니지만 주인 급은 되걸랑요?”
“뭔 소리야?”
“저기 저 펜션요. 저희 삼촌이 운영하는 펜션이거든요.”
“어? 그랬어?”
“네. 언니한테 못 들었어요?”
“그냥 지인이라기에 아는 사람인 줄 알았지.”
오, 그럼 숙박비도 엄청 싸겠군.
보통 이런 건 한철 장사인 만큼 숙박비가 어마어마할 터인데.
하지만 이 집 사람들은 굳이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으힛, 차가워.”
어느새 발목까지 물을 담근 화린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보였다.
“오빠도 들어와요!”
“난 조금 화연이랑 짐 옮기고.”
“치.”
아쉽다는 듯 살짝 볼을 부풀린 것도 잠시.
화린이 작은 체구로 계곡 사이를 휙휙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너 그러다 넘어진다.”
“괜찮아요. 앗, 물고기!”
샌들을 신은 채 발을 휙휙 들어올리는 화린.
그럴 때마다 그녀의 날씬한 종아리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얍!”
활짝 미소를 지은 화린이 내 쪽으로 물을 튀기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반짝이며 튕기는 물방울.
그 물방울이 마치 배경처럼 그녀의 소녀 같은 모습을 더욱 강조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계곡을 뛰어노는 말괄량이 소녀가 있었다.
“…….”
그런 화린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랄까…….
내가 예술인이었다면 여기서 작품 하나 뽑았을 거 같은, 그런 느낌?
“오빠, 여기 물고기! 일로 와 봐요!”
“알았으니까 천천히 움직여.”
“아, 그쪽으로 간다! 오빠! 빨리 빨리!”
“조심하라니…….”
피식 웃으며 화린 쪽으로 향하던 와중.
내 쪽으로 함께 다가오던 화린의 발끝이 삐끗하는 게 보였다.
“꺄악!”
“화린아!”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