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15. 미남은 덮밥을 좋아해(1)
* * *
슬슬 여름의 막바지를 보이는 8월 말.
허나 자연은 계절이 인간의 사회적 약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전히 무더운 날씨를 선보이고 있었다.
보자, 내가 이 역전 세계에 오게 된 게 4월 무렵이니까…….
적어도 네 달은 넘었군.
“흐아암…….”
모델 알바도 끝나고 멍하니 있다 보니 벌써 오후 4시.
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지금까지의 일들을 멍하니 떠올리고 있었다.
‘누나랑 한 게 벌써 2주일이나 됐나…….’
대표와의 관계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너 혼자 산다’의 방영과 함께 내 비밀보장의 의무도 끝이 났고, 본사의 방침을 전해들은 나는 이전처럼 다시 모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일을 하러 갈 때는 조금 기대하기도 했다.
첫 잠자리를 한 뒤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는 것이었으니까.
‘적어도 좀 당황하거나 할 줄은 알았는데…….’
허나 아쉽게도 내가 기대했던 숫처녀 같은 반응은 일절 없었다.
첫 날 내가 출근할 때도 수민은 ‘오랜만입니다’ 같은 말을 무덤덤하게 하면서 나를 평소처럼 대했으니까.
그 전날 섹스를 한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뻔뻔한 모습이었다.
진아 씨가 있어서 그런 걸 테지만.
당연히 2주가 지난 지금도 현재도 덤덤하다.
호칭도 이전의 ‘대표님’, ‘현수 씨’로 부르고 있고, 일할 때도 평소대로의 대표였다.
물론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게 맞는 거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무엇보다 그 방정맞은 진아 씨가 있는 한 누나니 뭐니 하면서 부를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도 다른 여자들은 한 번 자고 나면 태도는 좀 바뀌던데.
‘대표님은 그런 게 없단 말이지.’
그래도 좀 기대했던 만큼 대표가 너무 무덤덤하게 대하니까 괜히 아쉬운 기분도 있다.
남자 경험 한 번 없던 사람이란 생각 때문에 괜히 더 기대했던 걸지도.
뭐, 처녀라고 해도 사회생활은 별개라는 거겠지.
“흐어어어억…….”
괴상한 소리로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꿈틀대는 나.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다.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마음껏 뒹굴거리면서 뭘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할 것도 없는데 전처럼 보이스챗으로 게임 하면서 왕벌 짓이나 할까? 근데 그것도 슬슬 질리는데.’
현재 나는 이 2주일 동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처럼 피팅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 상하차 알바를 나가기도 하고, 가끔씩 섹파들과 즐거운 밤을 보내기도 하고…….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은 아무래도 그 두 사람이다.
바로 주화연과 최다슬.
‘걔네는 이제 뭐, 거의 여친 수준이네.’
이전에 만난 4자회담과 제주도 여행.
그 날 이후로 나도 이제는 전처럼 아무 여자나 막 붙잡고 몸을 놀리지는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이라도 최대한 잘 대해주자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웬만해서는 앞으로 또 다른 여자들을 만날 일을 없을 거 같다.
애초에 지금도 충분히 적지 않은 여자들과 몸을 섞고 있었으니까.
일주일 전에는 주화연과 밤 늦게 네 번.
나흘 전에는 최다슬과 데이트 이후 질펀하게 한 판.
‘언젠가 3p도 했으면 좋겠는데.’
사실 이전에 두 사람에게 따로 그런 얘기를 넌지시 꺼내보긴 했다.
다른 섹파들은 몰라도, 이미 다슬과 화연은 적어도 서로 나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한 상태였으니까.
‘말만 꺼내도 아주 학을 뗐었지.’
허나 두 사람 다 영 마땅치 않아 하길래 그만뒀다.
다슬이야 전에 한 번 거절한 경력이 있고, 화연이도 굳이 다른 여자랑 붙어서 3p를 하고 싶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단순히 셋이서 거리 데이트를 하는 것도 싫다나 뭐라나.
아마 이것도 정조역전의 영향이 클 것이다.
'당연히 원래 세계에서도 정상적인 건 아니긴 하지만.'
원래 세계에서 남자 한 명에 여자 두 명이 붙어 다닌다는 건 일종의 승리자로 보일지 몰라도, 이 세계에서는 좀 없어 보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그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꼭 해보고 싶단 말이지.
두 사람 다 가슴은 꽤 크기도 하고.
그런 두 사람이 몸을 맞댄 채로 내게 비부를 들이대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아, 섰다.
“……음.”
할 것도 없는데 오랜만에 딸이나 칠까…….
까똑!
컴퓨터를 켜려던 와중 울리는 폰.
확인하니 익숙한 모습의 프로필 사진이 나타났다.
[화연] 뭐해?
화연이네.
이 시간이면 아직 학교에 있을 터인데.
슬슬 방학 시즌이기도 해서 그런지 톡 할 정도 여유는 있나 보다.
[나] 그냥 뒹굴거리는 중
톡을 확인한 나는 별 고민 없이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5초도 채 안 돼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화연] ㅋ
[화연] 내일 약속 있어?
[나] 내일? 아니
[화연] 주말인데 어디 놀러가자
[화연] 너무 길게는 말고 당일치기나 1박으로
“으음.”
제주도 여행 갔다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뭐, 사실 그 때도 중간에 끊긴 터라 좀 아쉽긴 했다.
1박 정도면 갈만하지.
[나] 어디 가게?
[화연] 계곡!
“계곡?”
계곡, 계곡이라…….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이것저것 준비해야 되지 않나?”
이렇게 전날에 바로 준비해서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고민하느라 톡을 늦게 보내는 사이 연이어 화연이 톡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화연] 이번 여름에 어디 놀러간 적이 없어서
[화연] 동생도 놀러 가고 싶다는데 가자~ 응?
[화연] (너구리가 애교 부리는 이모티콘)
“나 참.”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거 잠깐 안 보냈다고 안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건가.
‘하긴, 애도 생각하고 말 꺼낸 거겠지.’
이렇게 말 꺼낼 정도면 준비 정도야 문제 안 된다는 거니까.
그리 생각하며 톡을 보냈다.
[나] 상관은 없는데 괜찮겠어?
[화연] 뭐가?
[나] 동생 같이 있으면 못할 거 아냐
뭘 못한다는 건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겠지.
그 정도는 이미 통하는 사이니까.
[화연] 아
짧게 답장을 보낸 화연이 잠시 생각하는지 한동안 대화가 멈췄다.
1분 정도 지난 후 다시 톡이 올라왔다.
[화연] 괜찮아
[화연] 그거야 언제든 할 수 있는 거고
“오.”
그래도 의외로 금방 답장 보내네.
꽤 고민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가족애를 버릴 순 없었나 보다.
[화연] 아무튼 그래서……. 갈 거지?
뭐, 가끔은 이렇게 건전하게 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 생각한 나는 답장을 보냈다.
[나] 그래 가자
[화연] 오예~~~~~!!
[화연] (신나게 불을 뿜는 공룡 이모티콘)
[나] ㅋㅋ
[나] 그래서 1박하게?
[화연] 당일치기도 상관없는데……. 현수 너만 괜찮으면?
[나] 1박하지 뭐
[화연] ㅎㅎ그러자
[나] 준비 같은 건?
[화연] 준비?
[나] 잘 거면 숙소 예약도 해야 되잖아
[화연] 아~
[화연] 지인 중에 숙박업 하는 사람 있어서 괜찮아~ 바로 가도 상관없음ㅎㅎ
[화연] 차도 내가 운전할 거고
“오.”
크, 역시 능력 있는 여자라니까.
그러고 보면 화연도 스펙만 따지면 꽤 잘 나가는 편이긴 하다.
허당 같은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자꾸 까먹을 뿐.
공립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는 것 하나만 봐도 뭐…….
[화연] 현수 너는 그냥 몸만 오면 됨
몸만 오면 된다라.
원래 세계의 가치관이 남아있는 탓일까.
이렇게 항상 여자가 주도하는 걸 볼 때마다 조금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진짜 아무것도 안 하면 조금 미안한데.
[나] 뭐 도울 건 없어? 필요한 거라던가
[화연] 아 괜찮아ㅋㅋ 진짜 신경 안 써도 돼
[화연] 대신에…….
잠시 텀을 둔 화연이 톡을 보냈다.
[화연] 단톡엔 얘기하기 없기!
여기서 말하는 단톡이라 함은 바로 그 날의 4자회담 이후 만들어진 톡을 말한다.
나와 주화연, 최다슬과 윤화정이 있는 그 방 말이다.
“나 참.”
피식 웃은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 얘기 안 해 당연히
얘는 설마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는 걸.
화정이야 그렇다 치고 다슬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 봐라.
아무리 공인받은 사이라 해도 좋게 보지 않을 게 뻔할 텐데.
[나] 뭐하러 너랑 놀러갔다는 얘길 거기서 해
[화연] 진짜지?
[나] 그래 임마
[화연] 하긴……. 현수 너라면 말 안할 거라곤 생각하지만
[화연]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나] 별 걱정을 다 하네
[화연] ㅎㅎ
내 대답으로 안심한 걸까.
화연이 곧바로 본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화연] 아무튼 내일 기대된다ㅋㅋ
[나] 그러게
[화연] 아 그리고 진짜 뭐 준비 안해도 돼. 알았지?
[화연] 어차피 너 안 된다고 했어도 동생이랑 둘이서 놀러가려고 했거든
[나] ……나 껴도 되는 거 맞지?
[화연] ㅋㅋㅋㅋㅋ당연하지
[화연] 그럼 내일 보자!
마지막으로 날아오는 귀여운 이모티콘.
다음에는 나도 이모티콘 몇 개 구매해야지.
[나] 그래ㅋㅋ 내일 보자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정체불명의 캐릭터를 보며 나도 답장을 보냈다.
***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주 자매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에 도착한 아파트 주차장 근처에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타다다닥.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
점차 가까워진 발걸음이 내 등 뒤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오빠!”
“우왓.”
가벼운 충격에 살짝 비틀거리며 고개만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환한 미소를 지은 화린이 내 어깨를 잡은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진짜 왔네요?”
“그럼 가짜로 오겠니? 잠깐, 그러다 다친다.”
자꾸만 앵겨 붙는 화린을 팔을 잡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제서야 나는 화린을 마주볼 수 있었다.
하늘색 프릴이 달려 있는 하늘하늘한 하얀색 여름 원피스와 샌들.
심플하기 그지없는 그 옷차림은 고등학생다운 귀여움과 상큼함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크, 진짜 귀엽네.
역시 소설 속 히로인 동생 포지션다운 외모와 몸매다.
뭐, 가슴은 누나에 비해 조금 빈약하긴 하지만.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오빠?”
“보고 싶었지.”
“히히.”
방긋 방긋 웃으면서 다시 한 번 내 품에 와락 안겨드는 화린.
방금 빈약하다고 말했던 거 다 취소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발육이 참…….’
아니, 오늘은 자제해야지.
하물며 섹파 동생한테 이래서야 진짜 안 될 말이다.
포옹을 하고 있는 화린을 슬쩍 떼어낸 내가 말했다.
“옷 예쁘게 입었네.”
“헤헤.”
내 말에 화린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오빠도 멋있어요!”
“고마워.”
“나한테는 그런 소리 안 해주면서…….”
순간 뒤에서 들리는 중얼거리는 목소리.
쟤는 뭘 동생한테까지 질투를 하는 건지.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본 나는 내심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데님 재질의, 잘록한 허리가 강조되는 짧은 핫팬츠.
바지 안으로 집어넣은, 소매가 널널한 하얀색 티쳐츠가 그녀의 거대한 가슴을 가리지 못하고 허리 아래로 아찔한 대각선을 그려냈다.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크록스가 살짝 아쉽긴 하지만.
더불어 평소와는 다르게 분칠까지 한 것인지 얼굴이 살짝 뽀샤시하다.
입술도 자세히 보면 반짝거리고 있고.
동생도 동생이지만 얘도 외모 하나는 꾸미니까 장난 없네…….
평소에도 좀 예쁘게 입으면 좋을 텐데.
“현수야……?”
이런, 나도 모르게 순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괜히 쑥스럽네.
“간만에 차려 입었네.”
이상하게 바라보는 화연을 향해 괜히 툭 내뱉었다.
내 말에 화연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간만이라니!”
“농담이야. 오늘 엄청 예쁘다.”
“아…….”
금세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화연.
힐끔거리며 날 보던 화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현수 너도 멋있게 입었어…….”
귀엽기는.
“그냥 반팔에 반바지인데.”
“그, 그래도.”
“헐……."
옆에서 대화를 듣던 화린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 지금 내숭 떠는 거야?”
“아, 아니거든! 내가 언제 내숭을 떨었다고!”
“지금 내숭 떨고 있는데 뭘. 와. 진짜 개극혐.”
“야! 너는 언니한테 말버릇이!”
“네 다음 꼰대~.”
“이게 진짜!”
그렇게 두 사람이 잠시 투닥거리는 건 덤.
소란스러운 인사를 마친 뒤, 우리는 각종 짐과 텐트 등 이런 저런 짐들을 차까지 함께 옮겼다.
짐을 나르는 동안 나는 화연에게 물었다.
“부모님들은 여행 안 가시나 봐?”
“엄마랑 아빠는 평소에 바쁘시거든.”
“그래?”
“응. 이럴 땐 그냥 나랑 동생이서 놀러가곤 해.”
“그렇구나.”
가족 여행은 잘 안 가는 건가.
혹시 나 혼자 꼽사리 끼는 거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되나 보다.
뭐, 설마 가족여행에 외간 남자를 데리고 가겠느냐만.
“좋아. 다 옮겼네."
"그럼 들어가자."
"히히. 계곡, 계곡."
마침내 짐을 모두 옮긴 우리는 차에 탑승했다.
나는 보조석에, 화린은 뒷자리.
화연은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착석.
“갈까?”
안전벨트를 맨 화연이 나와 화린을 보며 외쳤다.
오늘따라 믿음직스럽네.
평소엔 어리버리한 애가 이러니 뭔가 멋져 보인다.
“뭐 빠뜨린 건 없지?”
“네엥~.”
“나도 다 챙겼어.”
“빨리 갑시다 기사님~.”
“놀리면 안 태워준다?”
“헉.”
그 말에 화린이 헐레벌떡 벨트를 차기 시작했다.
피식 웃은 화연이 앞을 보며 외쳤다.
“그럼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