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14. 미필적 고의(2)
* * *
오후 일곱 시를 넘긴 저녁의 한 지하철 입구 근처.
해가 넘어갔음에도 한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그곳의 한 벤치에 한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
그리고 그런 사내를 바라보는 정장 차림의 여성, 최수민은 맞은편에 선 채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현수를 바라보았다.
“……곤란하군요.”
허나 산전수전 겪은 그녀로서도 지금의 상황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일까.
결국 작게 한숨을 쉰 수민이 현수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자리에 앉은 수민이 현수의 어깨를 작게 흔들었다.
“현수 씨.”
“으음…….”
“정말 안 일어나실 겁니까?”
수민이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작게 잠꼬대만 할 뿐.
가까이 다가가니 술 냄새도 상당했다.
결국 수민은 그가 단시간에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일단은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그리 생각한 수민은 현수의 자세를 바로잡아 자신의 허벅지에 뉘였다.
얇지만 탄탄한 허벅지의 감촉을 기억하지 못할 현수로서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민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런 현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떡하지.’
무심한 표정과는 반대로 수민의 머릿속은 당황 그 자체였다.
상황을 곱씹을 여유가 생기니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감정이 느껴졌던 것이다.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약간의 분노.
일반적으로 약속을 잡고 누가 술을 이렇게 꽐라가 될 때까지 마신단 말인가.
심지어 방금 전에는 웬 이상한 여자한테 끌려갈 뻔했고.
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부주의하게…….
“…….”
허나 그런 기분도 새근새근 잠든 현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그것이 바로 수민이 현재 상황에 당황하는 이유였다.
화가 나야 될 상황인데, 어쩐지 현수의 얼굴을 보게 되면 화를 낼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단순히 잘 생겨서 그런 걸까?
아니면 몸이 좋아서?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한 수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 생기거나 몸이 좋은 남자는 이미 연습생 시절에 어느 정도 겪어 봤다.
실제로 연습생인 자신에게 대쉬를 해 오는 남자 아이돌까지 있었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수민은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당시에는 데뷔를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여 왔다.
제대로 된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그러한 자기관리의 일환으로 수민은 언제나 그런 류의 접근을 뿌리쳐왔다.
‘사실 그 때도 싫은 건 아니었지. 조금 어색하긴 했어도.’
물론 자신도 제대로 성욕이 있는 여자인 이상, 남성들의 육탄공세를 외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결단코 잘생기고 멋진 외모의 남자가 싫다는 건 아니다.
그저 남자라는 생물에 익숙하지 않을 뿐.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남자보다는 꿈을 더 우선시했기에 그렇게 대처했을 따름이다.
‘그래도 그 때와는 또 달라.’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눈앞의 사내를 바라볼 때면 여태껏 봐온 남자들과는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아무리 스스로의 감정에 둔한 수민이라 해도 이쯤 되면 알 수 있었다.
이건 분명 호감이겠지.
가족이나 동성 친구와는 또 다른 느낌의 호감 말이다.
하지만…….
‘조금 달라.’
현수라는 사내는, 일반적인 남자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잘생기고 몸이 좋아서,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만이 아니었다.
내숭을 떠는 남자들과는 다르게 털털하고, 직설적이다.
아마 그가 딱히 잘생기거나 몸이 좋지 않더라도 인간적인 호감 정도는 느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감정이 이성적인 끌림이 아니냐, 라고 한다면…….
‘……잘 모르겠어.’
한참을 고민하던 수민은 결국 결론을 내는 것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이런 고민보다 더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으음…….”
그런 수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마냥, 현수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 대표님……?”
“현수 씨? 정신이 드십니까?”
“지금 여기가…….”
“아직 역 앞입니다.”
“그런가요…….”
끙끙거리며 눈을 비비던 현수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아마 자신이 베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겠지.
“잠깐, 지금 수민 씨가…….”
“별 거 아닙니다.”
정말로 별 거 아니기에 그리 말하는 수민이었다.
허나 그조차도 실례라 여긴 것일까.
현수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무리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윽……!”
허나 비틀거리며 다시 벤치에 몸을 뉘이는 모습에 결국 수민은 강제로 그를 다시 눕혀야 했다.
“괜찮으니까 좀 더 쉬시죠.”
“으, 죄송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드셨길래.”
“으으, 정말 죄송합니다…….”
황당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수민의 모습에 현수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설마 저도 이 정도로 취할 줄은……. 대표님한테 크게 실례했네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이유 정도는 얘기해 주시죠.”
“네. 그러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나 마신 겁니까?”
“그게, 복분자 세 병인가……?”
“……혼자서요?”
“같이 먹긴 했는데 거의 다 제가…….”
같이 먹었다니.
도대체 누구와 같이 마신 걸까.
설마……. 여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자꾸 이런 쪽으로 생각이 흐르는 걸까.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런 쪽으로 생각이 가는 수민이었다.
복잡해진 기분 속에서 수민이 스스로도 모를 감정을 지우고자 애썼다.
그러는 사이 갑자기 누워있던 현수가 영문 모를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대표님 축하라도 해 드리려고 했는데…….”
“축하요?”
축하라니?
갑자기 무슨 축하?
“네. 그런데 이래서야 오늘은 안 되겠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진아 씨한테 들었습니다.”
“뭘 말입니까?”
“본사에서 가지고 있던 경영권 거의 다 가져오셨다면서요.”
생각지도 못한 현수의 말에 수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 무덤덤한 표정마저 잊을 만큼 깜짝 놀란 것이다.
수민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현수는 얼굴을 가리며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지분도 많이 챙기고 영향력이 커졌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진아가 그런 얘기까지 했나요……?”
“네. 어쩌면 제가 대표님보다 진아 씨랑 더 친할지도요.”
“…….”
“농담입니다, 농담. 설마 제가 말실수한 건 아니죠?”
“말실수는 제 후배가 한 거 같군요.”
“에이, 저희 정도면 나름 직장 동료지 않습니까. 기업 비밀도 아닌데 이 정도야 뭐 어떻습니까. 제가 이런 거 어디 가서 얘기할 사람으로 보이세요?”
“그런 뜻이 아니라…….”
“한 번 봐 주시죠. 안 그러면 저 진아 씨한테 한 소리 듣습니다.”
그리 말하고는 홀로 킬킬 웃는 현수.
그런 현수의 모습을 수민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취해서 그런가?’
평소의 조심스러운 모습과는 다르게 꽤 민감한 주제도 거리낌 없이 꺼낸다.
분위기도 일적인 얘기만 하던 전과는 다르게 많이 풀어진 느낌이고.
처음 보는 현수의 모습에 수민은 멍하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튼 이젠 진짜 거의 독립했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거 축하드리고 싶어서 억지로 밥 먹자고 한 거였습니다. 뭐, 지금 꼴이 이 모양이라 좀 그렇지만……. 하하.”
“현수 씨는 제 사업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사업보다는 사람에 관심이 많죠.”
“사람……. 이요?”
“네.”
거기까지 말한 현수가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웠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방금 전까지 분명 취했다고 여기었던 사내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또렷했다.
마치 지금까지의 행동이 연기라도 되는 것 마냥.
자신을 지긋이 올려다보는 현수의 눈빛에 수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고생이라.
정말 많이 고생했지.
하지만 그걸 누군가에게 티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고생이랄 것, 까지는…….”
지금 눈앞의 그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표정은 어떨지, 수민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쥐어짜낸 입을 열지만, 눈앞의 사내는 그저 작게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마치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 있던 것 마냥.
“충분히 고생하셨을 거 같은데요.”
현수의 말을 들으며 수민은 지금까지의 일들을 떠올렸다.
열심히 준비했던 아이돌 데뷔가 무산되었을 때.
데뷔를 포기하고 관리직으로 변경된 이후로도 주변의 견제에 이리저리 치였을 때.
좌천되는 형식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자회사인 ‘피버샵’의 바지사장으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
패션몰 설립 이후로는 회사 수익도 일정치 않게 되고, 그 와중에 본사 연습생들의 알바 급여를 준비한다고 발에 불나게 뛰었을 때.
그 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순간.
수민은 이전과 같은 차분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뭐……. 잘 됐으면 좋겠다 싶었죠. 대표님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가 뭐라고 말을 하지만 이미 수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사내는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나마 남은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품을 팔며 노력했는지 아는 걸까.
“당신이……!”
아니…….
당신은 모르잖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고작 몇 달을 겪은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거야?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안다는 겁니까!”
누워있는 현수를 향해 수민이 소리쳤다.
“뭘 안다고 말하시는 겁니까! 현수 씨가 제가 어떻게 살아온 줄 어떻게 알고! 모르잖아요! 고작 몇 달 같이 지냈을 뿐인데!”
수민의 외침에 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놀랄 만도 하지.
평소의 나라면 이렇게 소리 지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아마도 사회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을……!”
항상 옆에서 도움을 준 진아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자신의 솔직한 심정.
그것을 수민은 마음껏 터뜨리고 있었다.
물론 눈앞의 사내 덕분에 잘 된 것은 맞다.
그건 누구보다도 수민 자신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마움과는 별개로 자신의 노력을 이렇게 쉽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좋은 사람인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술에 취한 김에 이렇게 마음대로 선을 침범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살아온 시간이 다르니까.
그리 생각하며 수민이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의 눈빛은 더욱 또렷해져 있었다.
“아마 제가 누구보다 더 잘 알 겁니다.”
처음으로 보는 진지한 현수의 표정.
그런 현수의 모습에 수민의 기분은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눈앞의 이 사내는 자신의 뭘 알고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걸까.
“말했다시피.”
혼란스러운 수민을 뒤로 한 채 현수가 말을 이었다.
“저는 사업보다는 사람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뜻…….”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수민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수민과 생각이 통한 것 마냥, 그는 눈을 맞춘 채 말없이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설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수민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가 그래봤자 며칠을 봤다고.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예감에 확신을 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수민을 향해 현수가 재차 말했다.
“좋아합니다. 수민 씨를.”
“그, 그게 무슨…….”
지금 이 남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좋아한다고? 나를?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는 이유가…….
“……우욱.”
허나 그런 수민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상반신을 벌떡 일으킨 현수가 입을 틀어막기 시작한 것이다.
“혀, 현수 씨?”
불길한 예감에 수민의 안색이 파래졌다.
“자, 서, 설마!”
“죄송한데 저 못 참겠습니다……. 토해도 되나요?”
“아니, 여기선 안 됩니다! 잠깐만요!”
혼란스러운 사태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수민이 현수를 서둘러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토하면 정말 대참사도 이런 대참사가 없다.
이, 일단은 어디 쉴 곳부터 찾아야…….
“으읍…….”
“조금만 참으세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가 된 상황 속.
연신 토를 참으며 꿈틀거리는 현수를 힘겹게 부축하며 수민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으음…….”
어지러운 기운 속에서 겨우 눈을 떴다.
“어윽……. 죽겠다…….”
눈을 뜨기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뇌가 부서질 듯한 끔찍할 숙취.
빠개질 것 같은 머리통을 부여잡은 채 겨우 겨우 지금까지의 상황을 유추했다.
방송 때문에 술을 마시고 그 상태에서 대표와 약속을 한다고 역까지 온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는 전혀 기억나는 게 없었다.
하, 술 좀 적당히 마실 걸.
……그 와중에 약속 취소할 생각도 안 한 거 실화냐?
미안해서 수민 씨 얼굴은 또 어떻게 보냐.
병신도 이런 병신이 없네.
아무튼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부터 파악하자.
‘여긴 또 어디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우선 주변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시설을 보아하니 모텔인 거 같기는 한데…….
보아하니 꽐라가 된 나를 누군가가 여기까지 옮겨준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나를 옮겨줬어야 할 사람이 안 보이는 게 불안하단 말이지.
‘설마 대표님이 버리고 간 건 아니겠지?’
그 순간 머릿속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질릴만한 상황이긴 한 게, 약속을 잡아 놓고 술에 꼴아서는 왠 양아치 누님한테 해롱거리고 있었지 않은가.
거기다 그 와중에 술에 취해서는 ‘이러면 여자들이 더 좋아하겠지?’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짜 병신이 따로 없구나.
아니, 잠깐만.
나 그러면 지금 아까 그 양아치 누님한테 잡혀온 건가……?
설마 했던 정조의 위기?
아니 뭐, 이제 와서 정조랄 것도 없긴 하지만…….
쏴아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걸 들은 순간 절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진짜 따먹히는 거 아냐……?
뚝.
내 불안한 기색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마침 멈추는 물소리.
끼익.
찰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열렸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나오는 실루엣을 나는 긴장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그, 그래도 모르는 사람한테 바로 따먹히는 좀 그런데…….
“후우……. 어?!”
그렇게 문이 열리며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표님……?”
“현수 씨?!”
허나 안도한 나와는 다르게, 대표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몸을 홱 가렸다.
나는 그런 대표의 반응을 바로 이해했다.
“아, 아니, 이건……! 자, 자고 있는 줄 알고……!”
하긴, 나체로 있으면 당황할 만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