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14. 미필적 고의(1)
* * *
지민과 헤어진 나는 그대로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올라타기 무섭게 백미러로 은근슬쩍 쳐다보는 여자 기사의 시선.
귀찮아서 그냥 모른 척 했다.
“XX역 3번 출구로 가 주세요.”
“네, 네.”
목적지를 말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보는 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여전히 그 얇디얇은, 젖꼭지가 보이는 티셔츠를 입은 채.
이런 세상에서 여자 젖꼭지 보이는 정도는 별 것도 아니란 거겠지.
“하…….”
저 멀리 손을 흔드는 지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저 탐스러운 핑크색 젖꼭지를 그냥 두고 가다니.
모른 척 슬쩍 만져보기라도 할 걸 그랬나?
사실 눈치를 봐서는 한지민도 내게 마음이 있는 것 같긴 했다.
방송 도중에도 내 몸을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했고, 술 취한 척 하면서 육탄공세를 할 때는 참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방송이 끝나고 대놓고 그녀를 유혹했다면 이후 잠자리를 가지는 것 정도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입으로 말한 게 있으니까.
굳이 욕망을 억누르고 지민을 덮치지 않은 이유, 그것은 바로 얼마 전의 4자회담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이 여자 저 여자 다 따먹고 다니면서 몸을 굴리지 않기로 약속한 상황이었으니까.
뭐, 세 사람 몰래 할 수도 있긴 하겠다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화연이나 다슬, 그 외 섹파들이 마음고생을 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어차피 이 이상 늘면 아무리 나라도 힘들기도 하고.
“…….”
하, 그래도 진짜 아까워 죽겠네.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 해 봐도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 봉긋한 유두 한 번 만져보기라도 했다면…….
“아오, 씨.”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상념을 애써 떨쳐냈다.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런지 어째 아까부터 아래쪽에 자꾸 피가 쏠리는 거 같네.
많이 안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몸 상태를 보아하니 꽤 취기가 올라온 모양이다.
어지러운 것도 영 가실 기색이 안 보이고.
이 꼴로 만나도 괜찮으려나…….
나는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안색을 살폈다.
흠, 일단 겉으로 봐서 티는 안 나네.
원래도 어지간히 마시지 않는 이상 티가 안 나는 체질이기도 했고.
그래도 역시 직접 보면 대표도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 정도는 금세 알아차릴 거다.
겉으로 티가 안 날 뿐 술 냄새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뭐, 딱히 공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크게 문제는 안 될 거 같긴 하다만……. 그래도 이대로 보자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으려나?’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싫어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 싶다.
아니,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술에 취한 미녀가 늦은 밤에 부른다라…….
생각해보면 이거 완전 땡큐 아닌가?
아니, 그리고 그렇잖아.
약속시간 다 돼서 못 보겠다고 하는 게 오히려 실례지.
“오히려 기회일지도…….”
확인한 바로는 호감도 수치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대표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된 거, 아예 대담하게 가는 방법도 나쁘지 않겠는데?
“저기……. 손님.”
“네?”
“다 왔는데요.”
뭐야, 언제 도착했대.
“아, 죄송합니다. 딴 생각 좀 한다고.”
“아, 아닙니다.”
“여기요.”
묘하게 저자세인 기사에게 계산을 마치고 택시에서 내렸다.
“윽…….”
땅에 발을 내디딘 순간 머리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취한 모양인데.
으어, 땅이 흔들린다…….
“의자, 의자…….”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근처 벤치를 찾아내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아.”
숨을 크게 쉰 나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음.
어쩐지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걸.
그냥 지금이라도 약속 취소해야 되나?
“저기요.”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부르나 싶었다.
“저기요, 안 들려요?”
허나 재차 부르는 목소리에 나를 부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어지러워 죽겠는데 뭐냐.
“저요?”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고개를 홱 젖혀 거꾸로 등 뒤를 바라보았다.
“케헥!”
그러자 눈앞에 펼쳐지는 풍만한 가슴골.
눈앞에 떡하니 드러난 가슴에 놀라 사례가 들려 버렸다.
기침을 하는 나를 향해 가슴골의 주인이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머, 괜찮아요?”
“콜록! 괘, 괜찮습니다.”
갑자기 이게 웬 떡……. 이 아니라.
이게 뭔 상황이야?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가슴인데 막상 눈앞에 펼쳐지니 외려 당황스럽네.
그렇게 사례에 들려 연거푸 기침을 하고 난 뒤.
정신을 차린 나는 자세를 고치고 등 뒤의 여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씨익 웃으며 바라보는 여성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반신이 거의 다 보이는 브이넥 오프 숄더에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핫팬츠라.
거기에 떡대도 장난이 아니다.
으음, 어째 실실 웃는 게 느낌이 안 좋네.
“실은 아까부터 저기서 지켜봤거든요.”
“저를요?”
“네. 그런데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에이,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그대로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힘이 빠진 내 내 허리를 스윽 붙잡는 게 아닌가.
아니, 뜬금없이 왜 외간남자 몸에 손을 대?
“저기요.”
뭐, 평소의 나라면 이런 적극적인 태도도 좋다고 받아들였을 테지만……,
4자회담까지 마친 이상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는 살짝 불편한 기색을 섞어 여성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뭐 하긴요.”
허나 그런 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내 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심지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아닌가.
“피곤해 보이니까 쉴 곳 찾아주려고 그러지.”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힘 빠진 초식동물을 노리는 사바나의 맹수 같다고 해야 할까.
“힘들어 보이는데 저한테 맡겨요. 근처에서 좀 쉴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이게 무슨…….”
“자, 여기 꽉 잡으시고.”
내 옆에 바짝 앉은 그녀가 아예 내 팔뚝을 자기 허리에 감기 시작했다.
설마 이렇게 대로변에서 대놓고 수작을 걸 줄이야.
그 정도로 내가 인사불성으로 보였던 건가?
……문제는 하필 그게 사실이라는 거지만.
하필 술기운이 최고조로 올라온 상태에서 이런 대쉬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이성적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내 아랫도리가 말을 안 듣는다.
“어머?”
그리고 눈앞의 여성도 그런 내 상태를 금세 눈치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발딱 섰네?”
하긴 이렇게 가까이서 앵기는데 모를 수가 없지.
실제로 내 거시기는 바지를 뚫을 기세로 벌떡 선 상태였으니까.
“아니, 이건 취해서…….”
이미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그녀를 향해 서둘러 변멍거리를 쏟아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납치당해서 따먹히게 생겼으니까.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세계의 남자들은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듯했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여자가 적극적으로 애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거기가 서지도 않을 정도였으니까.
반면 이 세계 여자들은 원래 세계 남자마냥 성욕이 넘쳐나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그런 상황에서 대로변에 아랫도리를 잔뜩 발기한 남자가 술에 취해 헤롱거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건 뭐, 따먹혀도 할 말 없을 수준 아닌가……?
“저 약속도 있으니까 다른 분 찾아……. 어으.”
“술도 그렇게 취했는데 무슨 약속?”
“아니, 이건…….”
“후후, 재밌는 오빠네.”
술에 취해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내 모습에 그녀가 음흉하게 웃었다.
“비아그라 섞인 술이라도 마시기라도 했어? 변명이 너무 궁색하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래? 괜찮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
이거 내가 뭐라고 말해도 안 들을 거 같은데.
거기다 잘 보니 이 여자, 얼굴도 발그레한 게 나처럼 거하게 취한 거 같고.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놓고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지.
아무리 역전세계라고 해도 이런 여자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으니까.
”후후.“
흔들리는 시야로 그녀가 입술을 삭 핥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는 나만 믿고 따라와.”
오빠는 무슨.
딱 봐도 네가 더 나이 들어 보이는데.
아니, 그보다 나 이러다 진짜 따먹히는 거 아냐……?
“아, 됐다니까…….”
약속도 있는데 여기서 괜히 여자한테 붙들릴 수는 없는 노릇.
어지러운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내 품에 안긴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현수 씨?”
그 순간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대표 최수민이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어, 그게…….”
“혀가 꼬이시는군요. 혹시 술 드셨습니까?”
와, 보자마자 바로 알아채네.
“…….”
대답이 없는 날 대표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랑 다를 거 없는 표정인데도 어쩐지 무섭네.
괜히 나 혼자 찔려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뭡니까?”
합죽이가 된 날 대신하기라도 하듯 말문을 연 것은 내 옆의 여성이었다.
내 몸에서 손을 뗀 그녀가 거친 발걸음으로 수민에게 다가갔다.
지척까지 도달한 그녀가 수민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쪽은 누구신데?”
“……일단 무슨 상황인지는 대충 알 거 같군요.”
“뭐?”
“현수 씨는 거기서 쉬고 계시죠.”
“하!”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여성이 보란 듯이 헛숨을 내쉬었다.
와, 근데 마주선 거 보니까 진짜 떡대 장난 아니네.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남자인 내가 봐도 솔직히 좀 무서운데.
저런 사람 앞에 두고 대표님 표정 하나도 안 바뀌는 거 실화인가?
“지금 나 무시하는 거?”
“실례했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무심한 표정으로 수민이 말했다.
“저희 일행이 폐를 끼친 거 같군요.”
“일행은 무슨. 신경 쓰지 말고 그 쪽 볼 일 보시죠?”
“그 볼일이 바로 옆에 계신 남성 분 때문입니다만.”
“어이, 아줌마.”
지금껏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대표가 처음으로 움찔거렸다.
“하! 쫄기는.”
그것을 보고 겁을 먹었다고 여긴 것일까.
사나운 표정으로 대표를 보던 여성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볼 땐 그냥 ‘아줌마’라는 단어에 반응한 거 같은데…….
“좋게 말할 때 그냥 꺼지지 그래. 남의 사업 방해하지 말고.”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요.”
“말로 안 되면 뭐 어쩌시게?”
“어쩌긴요.”
서, 설마 싸우기라도 할 셈인가?
깜짝 놀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허나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수민은 침착하게 핸드폰을 꺼내들고 있었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뭐?”
“술에 취한 남자를 일면식도 없는 여자가 데리고 간다라……. 경찰이 좋아하겠군요.”
“이런 씨……,”
수민의 말에 여성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래도 달려들지 않는 걸 보아하니 생각만큼 막무가내는 아닌 모양이다.
결국 먼저 항복의사를 드러낸 건 떡대 쪽이었다.
“하, 됐다.”
짜증난다는 듯 대표를 노려보던 여성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오늘 제대로 잡나 했더니 재수 옴 붙었네. 간다, 가.”
자리를 뜨는 여성을 보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짜 뭔 일 나는 줄 알았네.
그런데 어째 안심했더니 술기운이 더 올라오는 거 같은데…….
으, 졸려…….
“현수 씨?”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 미룰 걸 그랬는데에…….”
“현수 씨.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안 자요…….”
“눈 감으면서 그런 말을 하셔도 설득력이 없습니다만.”
“으음…….”
“현수 씨. 정신 차리세요.”
점차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겨우 실눈을 뜨며 대표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으으, 이 이상 폐 끼치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흐려지는 의식과 함께 나는 해야 할 말을 겨우 내뱉었다.
그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