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2. 방송이 나간 뒤(4)
* * *
화린과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준비를 마치고 곧장 피버샵으로 향했다.
도착한 피버샵 근처에서는 낯이 익은 택배원 아저씨가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그 옆에는 택배원과 함께 분주히 움직이는 피버샵 정직원 김진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 분주한 공기가 그리웠어.
“안녕하세요!”
큰 목소리로 인사하자 진아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어머, 현수 씨!”
환한 표정을 지은 진아가 쪼르르 달려왔다.
격의 없이 내 양손을 붙잡은 진아가 정말 반갑다는 듯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현수 씨는 휴가 갔다 온다고 신수가 훤해지셨네요.”
“패션몰은 어때요? 별 일 없었죠?”
“에이, 정말 몰라서 물어보시는 건 아니죠?”
장난스레 날 째려보던 진아가 씨익 웃었다.
“말도 마세요. 현수 씨 방송 나가고 저희 패션몰이 얼마나 흥했는데요. 현수 씨가 입은 옷들은 거의 다 매진될 정도에요.”
“그 정도에요?”
내가 알기로 피버샵은 중소 치고는 꽤나 많은 옷을 매입해두는 걸로 알고 있다.
아예 방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옷들이 많은데 내가 광고한 건 그 중에서도 한 5분의 1정도는 될 거다.
즉 재고의 20퍼센트를 팔았다는 얘기다.
“자세한 건 대표님한테 물어보세요. 아, 그리고 모델 일은 내일부터 재개할 거예요. 아마 오늘은 바쁘실 테니.”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이거 선물입니다.”
“어머!”
내가 미리 준비한 선물 상자를 흔들자 진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뭐예요?”
“별 거 아니에요. 감귤 초콜릿 몇 개 샀어요.”
“맛있겠다. 아, 그런데 살찌는데…….”
“살 찔 게 뭐가 있다고요. 아무튼 작업실에 둘 테니까 나중에 하나 들고 가세요.”
“현수 씨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다니까. 아무튼 잘 먹을게요.”
그렇게 진아와 인사를 한 뒤 패션몰이 위치한 3층으로 올라갔다.
패션몰 입구에서 잠시 심호흡을 한 나는 활기차게 문을 열어 재꼈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최수민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자유롭게 다녀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정장 차림을 고수하는 모습.
거기에 저 무덤덤한 표정까지.
저 사람은 참 여전하구나.
“현수 씨.”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난 수민이 날 향해 다가왔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휴가는 잘 보내셨습니까?”
“대표님 덕분에요. 아 참, 여기 선물이요.”
“뭘 이런 걸 다.”
선물 상자를 받은 수민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지는 게 보였다.
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미묘하긴 했지만.
”감사합니다.”
“그래서 요즘 어때요?”
“현수 씨 덕분에 잘 풀리고 있습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시죠.”
빈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는 수민의 안내에 따라 마주보며 앉았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한 번 살핀 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연주 씨가 안 보이네요.”
사실 여기 오는 동안 그 까칠이 놀릴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안 보이니까 또 섭섭하네.
“연주 씨는 이제 안 올 겁니다. 곧 데뷔한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걔도 결국 데뷔하는 건가.
그 성질로 제대로 연예인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중에 연락이나 한 번 해 봐야지.
그렇게 나는 한동안 수민과 약간의 잡담을 나누었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수민이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수 씨 덕분에 저희 패션몰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얼마나요?”
“가장 큰 건 저희 브랜드 평판이 많이 올랐다는 겁니다. 덕분에 일거리도 많아졌고요. 사람도 몇 명 더 고용했습니다.”
“잘 됐네요.”
“지금은 본사에서 아예 모델 일만 하겠다고 찾아오는 연습생들도 꽤 늘었습니다.”
“연습생 생활까지 때려치고요?”
“연습생은 기약이 없지만 저희는 일단 정직원으로 채용하니까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한숨 놓는 셈이죠.”
그러고 보니 전에도 연습생들이 종종 용돈벌이 하는 식으로 찾아온다고 했었지.
그래도 아예 연습생 생활까지 때려치고 올 정도인가?
흐음……. 확실히 단순히 옷만 잘 팔리는 정도로 끝난 건 아닌가 보네.
“정말 현수 씨에게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방송 한 번 탄 것뿐인데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렇지도 않습니다. 실은 현수 씨가 오기 전까지 자금난이 심각했으니까요.”
갑자기 나온 충격적인 발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어? 그랬나요?”
이건 작가가 보여준 파일에서도 본 적이 없는 설정인데.
생각해보니 소설 본편에서도 본사 얘기만 나왔지 자회사인 피버샵 얘기는 없긴 했다.
“네. 하지만 지금은 그게 한 번에 해결된 상황입니다.”
“그랬군요.”
“현수 씨는 제가 제의를 드렸을 때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심지어 연예계 활동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셨으면서도.”
“음…….”
“현수 씨 덕분에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수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깊이 고개를 숙인 수민을 보면서 나는 그녀의 처지를 떠올렸다.
본사 중견들과의 갈등.
이후 아이돌의 꿈을 버리고 자회사 형태의 패션몰을 설립.
모두가 외면한 상태로 후배와 단 둘이서 아무것도 없는 패션몰을 꾸역꾸역 운영.
거기에 자금난까지.
지금 그녀가 내게 고개를 숙인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내가 모델 일을 하게 됨으로서 매출이 올랐고, 방송까지 타게 되면서 패션몰 자체홍보까지 가능하게 되었으니까.
뭐, 나로서는 그냥 내 이익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내 움직임이 패션몰 흥행에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아마 이 정도로까지 도움을 줬다면…….
분명 나에 대한 호감도도 꽤나 오르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한 번 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설 설정 중 하나인 주인공의 능력이 떠올랐다,
바로 나에 대한 상대방의 호감 수치가 어떤가 하는 것.
고개를 숙인 수민을 보며 나는 빠르게 양쪽 눈을 가렸다 떴다를 반복했다.
순간적으로 숫자가 떠오른 숫자들을 머릿속으로 새겼다.
‘음란도는 그대로고……. 호감도는 꽤 올랐네.’
수민과 첫 만남 당시 수민이 내게 가진 호감도는 19.
그냥 일반적인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최고 수치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내게 보내는 호감도 수치는 두 배인 38을 기록하고 있었다.
참고로 41부터는 사실상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수치.
이 정도면 썸 타는 거 정도는 문제없을 수준이다.
이미 여자관계를 만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혀 모르는 경우에 한해서다.
최수민 대표처럼 미리 점 찍어놓은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세 사람에게 말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좀 쓰레기긴 하네.
양심에 조금 찔리는 것도 사실이긴 한다만…….
그래도 수민은 내가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이기에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
그러니까.
“고개 드세요 대표님.”
호감도도 확인했으니 굳이 더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로 끝낸다.
고개를 드는 수민을 향해 내가 말했다.
“그렇게 저한테 고마우시면 식사나 한 번 쏘시죠.”
“흠. 식사라.”
잠시 고민하던 수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군요. 그럼 언제 날짜를 한 번 잡아서…….”
“미룰 필요 있습니까? 일 끝나고 오늘 한 번 사 주시죠.”
“오늘……. 요?”
“네. 아, 그리고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단 둘이서만 봐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하시려고……?”
“그건 이후에 말씀드릴게요.”
괜히 진아 씨까지 끼어서 회식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게 둘 순 없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흠.”
나는 고민에 빠진 수민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뭐……. 알겠습니다.”
예쓰!
고개를 끄덕이는 수민의 모습에 탁자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기까지 진행했다면 이제 남은 건 제대로 떠먹는 일만 남았다.
“맛있는 걸로 기대하겠습니다.”
의아한 기색의 수민을 보며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
간단한 잡담이 끝난 뒤로는 한동안 일 얘기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제 앞으로 현수 씨 행보에 대해서 말인데…….”
“말했다시피 저는 연예계 활동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내 말에 수민이 슬쩍 꼬드기듯이 말했다.
"일단 여기 발을 들이면 힘들어도 수익적인 측면은 확실히 보장됩니다. 무엇보다 현수 씨 같은 경우에는 연예인이 된다고 할 시에는 거의 로또급 데뷔라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너 혼자 산다'에서 종종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물론 출연료는 더 늘 테고."
"아뇨. 그래도 주목 받는 직업은 피곤해서요. 말했다시피 전 연예인은 안 합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다시 한 번 내 뜻을 전하자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러면 제가 생각한 대로 했어도 괜찮았겠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현수 씨가 전에 연예계 활동은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저로서는 일단 현수 씨 얘기를 한 번 더 들어볼 생각으로 빠르게 오라고 말씀을 드렸었지만……. 여전히 뜻이 확고하시군요. 그러면 다음부터는 굳이 본사에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다시 모델 일만 하면 되는 건가요?”
“네. 다른 자잘한 일들은 제가 처리해두도록 하죠.”
이후로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민이 알아서 내게 닦달을 하는 방송계 사람들에게 일언지하에 거절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괜히 얼굴 보고 거절하면 미련이 남아서 더 귀찮게 군다나 뭐라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굳이 빠르게 오라고 말했었는데, 그 부분은 송구스럽게 되었군요.”
“아니에요.”
뭐, 어차피 아버지 때문에 오긴 와야 했으니까.
그러니 딱히 대표에게 기분 나쁜 감정은 없다.
대표야말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대한 선택할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던 것이겠지.
오히려 나로서는 그런 수민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렇게 일 얘기도 모두 마치고.
“그럼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나중에 봐요 현수 씨!”
배웅까지 하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패션몰을 나섰다.
약속을 잡은 수민과는 6시 이후에나 보게 될 거 같고.
오후까지는 대충 시간을 때울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 뭘 하면서 시간을 때울까?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 패션몰 건물을 떠나는 사이.
“자, 드디어 지금 건물에서 한 명 나오네요!”
뜬금없이 핸드폰 거치대를 들고 뛰쳐나오는 아담한 여성.
기운차게 내 앞에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뭐야, 갑자기?
“과연 오늘 저는 여기서 연예인, 아니면 연습생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와, 얼굴 보니 딱 봐도 연습생인 모양인데요? 구라 안치고 존나 잘생겼습니다! 아, 여러분. 잠깐만요. 일단 허락은 받고 얼굴 공개를 해야죠. 저 분 초상권 여러분들이 책임져줄 겁니까?”
갑자기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체감 상으로는 초 단위로 문장을 말하는 거 같은 수준이다.
저 작은 몸에서 도대체 어떻게 저런 기운이 나오는 거지?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들이대셔 놀라셨죠?”
재잘재잘 떠들던 그녀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 손에는 셀카봉에 끼운 핸드폰을 든 채로.
보아하니 인방인 거 같은데……?
“네. 조금 놀랐네요.”
“오우!”
송구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말하자 소녀가 다시 한 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지금 딱 말만 들어도 알겠어! 딱 봐도 말빨 좀 될 거 같은 사람이야! 그리고 방금 목소리 들으셨죠? 원래 목소리만 들으면 얼굴이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거 레알입니다!”
“…….”
“아, 자꾸 말 돌려서 죄송합니다. 인터넷 방송 아시죠? 지금 제가 그걸 하고 있는데…….”
“안 봐도 알겠습니다 그건.”
“와, 님들 들었죠? 딱 봐도 기 쌥니다! 쌔요! 그리고 님들 봐요, 님들은 모니터나 액정 너머로 보고 있죠? 근데 전 진짜……. 실물이 걍 빛이 나는 거 같음. 구라 안치고 제가 본 남성분들 중에서는 최고로 잘생겼습니다! 몸매? 아니, 뭘 그런 걸 물어봐요 미친놈들아. 아, 근데……. 기럭지 미쳤긴 함. 뭐라고? 성희롱으로 고소한다고? 아니, 잘생겼다고 하는 것도 죄야? 아, 참. 너무 놀라서 자꾸 중요한 걸 얘기를 못 하네. 실례가 안 된다면 방송에 얼굴 좀 비춰도 될까요?”
“……네. 그러시죠.”
이 사람 숨 쉬면서 말 하긴 하는 건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 쿨하기까지 합니다! 아, 알았다니까요. 지금 그럼 존잘러 얼굴 공개합니다!”
드디어 그녀가 내게로 핸드폰 앵글을 돌렸다.
“보십쇼, 여러분!!!”
마침내 내 얼굴이 방송에 공개됐다.
핸드폰으로 시선을 던지자 순간 채팅창이 엄청나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내가 인방을 그리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일단 올라가는 속도를 보니 흥하긴 한 모양이다.
“와!!!! 메이링님 10만 원 후원을! 아이고, 감사합니다!!! 뽑뽀~!!”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그녀가 양볼에 손을 올리고 귀여운 척을 했다.
밖에서 저런 쪽팔린 짓을 하고도 태연한 모습이다.
역시 인방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역시 피버 에이전트! 연예인 키우는 회사는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아쉽게도 연예인은 못 봤지만 연예인 급인 얼굴은 보고 가네요!”
끊임없이 말하는 걸 듣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피버 에이전트라고?
여기 본사가 아니라 패션몰인데?
“크, 역시 그 피버 에이전트는 연습생마저도 급이 다른…….”
“여기 피버 에이전트 아닌데요.”
“네?”
“여기 본사가 아니라 산하 패션몰이에요. 잘못 오신 거 같은데.”
“어……. 진짜요?”
“네. 그리고 저 연습생 아니에요.”
“……헐.”
내 말에 순간 그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말없이 핸드폰을 보는 사이에도 채팅창이 미친 듯이 올라가는 게 보였다.
“님들아.”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핸드폰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번 컨텐츠 좆망한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