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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화 〉 12. 방송이 나간 뒤(1) (104/152)

〈 104화 〉 12. 방송이 나간 뒤(1)

* * *

현수가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그의 집안에는 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단순한 무단침입자라기엔 너무도 어린 나이의 교복을 입은 여고생.

바로 현수의 여동생 김지수였다.

“귀찮게…….”

거실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가족인 만큼 주소나 집 비밀번호 정도는 이미 꿰고 있다.

정확히는 부모님에게 일종의 ‘특명’을 받았기에 알고 있는 거지만.

사실 김지수나 김현수나 서로가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는 수준의 관계인지라 굳이 서로 간에 평소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21세기에 걸맞는 참으로 따뜻한 남매관계라 할 수 있었다.

“황금 같은 주말에 여기서 뭘 하는 거람…….”

구시렁대는 와중에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지수.

현재 지수가 보고 있는 것은 연애 기사였다.

그녀의 액정 화면에는 현재 ‘너 혼자 산다’에 출연한 자신의 오빠 김현수, 아니 둔탱이가 떡하니 뉴스 페이지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빠인 김현수가 국민예능인 ‘너 혼자 산다’에 출연하게 되면서 현수의 가족들은 때 아닌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김지수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자신의 오빠를 알고 있는 친구 중 한 명이 ‘너 혼자 산다’ 출연 소식을 널리 퍼뜨리면서 지수도 학급의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현재 지수의 학교생활은 오로지 그의 오빠에 대한 이야기로만 도배된 상태.

애초에 오빠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거의 얼굴도 보지 않고 지내온 만큼, 지수는 지금의 상태가 귀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귀찮긴 해도 지금 그 둔탱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이상 적어도 용돈 정도는 타내고 말리라.

끼이익.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후다닥 현관문으로 향했다.

‘갑자기 나오면 엄청나게 당황하겠지.’

오랜만에 보는 오빠의 당황한 얼굴을 상상하면서 지수가 떡하니 등장했다.

“왔어?”

“엥?”

깜짝 등장한 지수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 여전히 바보 같아 보이는 인상의 오빠가 보인다.

거기까지는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뭐 하다가 이렇게 늦게 온……. 응?”

“뭐야, 네가 왜 여기 있냐?”

“누구?”

“어?”

곧이어 현수를 따라 들어오는 두 여성.

그 두 사람을 보며 지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야, 그 사람들?”

***

여동생을 보자마자 상황 판단을 빠르게 마쳤다.

당황한 여동생을 뒤로 한 채 나는 일단 세 사람을 한 자리에 앉히고 마실 것이라도 내오겠다는 명분을 삼아 자리를 잠시 피했다.

부엌에서 물을 끓이면서 나는 슬쩍 거실 상황을 살폈다.

거실에 세 사람이 말 한 마디 없이 어색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후,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오다니.

오늘 동생이 온다는 사실은 이미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 딱 타이밍 나쁘게, 그것도 심지어 집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혹여나 한 명이 내 섹파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날 내 호적이 파이는 날이 되겠지.

주화린과 주화연은 소설 속 인물이지만 가족은 원래 세계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정조관념이 정반대가 되었다고 해도 아버지는 평소와 다를 게 없고, 어머니도 말수가 좀 더 줄었다 뿐이지 원래 세계의 어머니와 똑같았다.

여동생도 여전히 싸가지 없는 모습이고.

참고로 가족들은 내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줄은 모르고 있다.

나도 그런 걸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 세계는 정조가 바뀌었을 뿐, 몸을 굴린다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세간의 인식은 원래 세계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혹여나 가족들이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

역전세계 이후로 일생일대의 위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이라도 좀 맞춰둘 걸.

일단 여기서는 어떻게든 임기응변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두 사람 다 나름 눈치는 있으니까 적당히 내가 둘러대면 알아서 따라올 정도는 될 거다.

“자, 마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숨긴 채 거실로 향했다.

티백으로 끓인 홍차 네 잔과 간단한 과자를 테이블에 올리며 자리에 앉자 세 사람이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한 명은 불안한 눈빛으로, 한 명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리고 또 한 명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일단 여기서는 내가 먼저 말문을 여는 수밖에 없겠지.

“……그, 일단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동생에게 시선을 던졌다.

“지수 너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왜? 뭐 켕기는 일이라도 있어?”

“뭔 소리야. 그냥 뜬금없이 오니까 물어본 거지.”

“오빠 어떻게 사나 보러 온 거 뿐이야.”

내가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보는 지수의 눈초리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혼자 집 나가서는 연락 몇 번 하고 말 뿐이고, 그러다가 갑자기 방송에 나오질 않나. 그래놓고 얼굴 한 번 안 비추고. 오빠 같으면 안 궁금하겠어?”

“그거야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아무튼 그 덕분에 지금 가족들 다 난리 났어. 심지어 제사 때 친척들 모여서도 오빠 얘기만 했어. 왜 안 왔냐고 나한테까지 닦달을 하더라.”

“음…….”

“뭐, 그거야 나중에 하나씩 물어보면 되는 거고. 그 전에.”

거기까지 말한 지수가 눈길을 돌렸다.

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수의 눈길에 어색하게 웃는 화연과 어찌할 줄 모르는 화린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지금 상황부터 설명 좀 해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누구야, 이 사람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는 지수의 모습에 나는 재빠르게 짱구를 굴렸다.

“어…….”

여기서 너무 망설이다가는 도리어 더 의심을 살 게 뻔하다.

나는 곧바로 생각해둔 변명거리를 꺼냈다.

“이번에 게임 하면서 정모를 했거든.”

“……정모?”

“어. 너도 내가 게임 좋아하는 거 알잖아. 거기 커뮤니티에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중 한 명이 얘야.”

거기까지 말한 내가 화린을 바라보았다.

내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화린이 그런 나를 마주보았다.

후, 속 타네.

“거기서 게임 좀 하다 보니까 서로 만나자는 얘기도 하고 그랬거든. 그러다가 친해졌어.”

친근하게 등을 두드리는 척 하면서 옆에 앉은 화린에게 얼굴을 더 가까이 댔다.

“그치, 화린아?”

“앗.”

지척까지 다가온 내 움직임에 당황했는지 화린이 눈을 굴렸다.

원래 세계라면 절대로 못 할 행동이지만 여기는 정조역전세계.

다 큰 남자가 여고생한테 손대는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화린을 향해 간절한 표정을 그녀에게 향했다.

제발 눈치채줘 화린아.

“아…….”

진정으로 진심을 다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 했던가.

내 간절한 표정에 화린도 대충 어떤 의도인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화린이 의연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인 화린이 말을 이었다.

“주화린이라고 해요. 오빠 말대로 오빠랑은 정모에서 만난 사이고요.”

“고등학생인 거 같은데, 몇 살이세요?”

“18살이요.”

“저랑 동갑이네요. XX고 맞죠?”

“아, 네. 알고 계시네요?”

“친구 한 명이 거기 다니거든요. 교복 보니까 알겠네요. 주말에도 교복 입고 다녀요?”

“아, 조금 있다가 학교에 자습하러 갈 거라서 그래요. 어차피 근처니까 오빠 얼굴도 볼 겸.”

“흐음.”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않는 지수.

그럴수록 내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보다 지금 오빠가 한 말 다 사실이에요?”

“네. 맞아요.”

“흐음…….”

모든 정보를 확인한 동생이 나와 화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우릴 훑어보는 지수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얘는 왜 안 하던 시어머니 짓을 하고 그래?

제발 평소대로 하라고 평소대로.

“뭐,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후, 살았다…….

의외로 시원스레 넘어가는 동생의 태도에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었다.

다행히 동생은 이 이상 화린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긴 가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소에 크게 서로 신경을 안 쓰면서 지내오긴 했지만.

고맙다 화린아.

오빠가 나중에 맛있는 거 한 턱 쏠게.

“그럼 저 분은?”

1차 고비를 넘기기 무섭게 곧바로 당도하는 여진(??).

“아, 저기, 저는…….”

곧바로 자신에게 시선이 돌아가자 바짝 굳어버리는 화연.

대충 이야기 흐름에서 화연도 내가 진짜 관계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챘을 것이다.

사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당연한 거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섹파의 가족에게 ‘나 섹파요’하고 말한단 말인가.

“화린이 언니야.”

저 거짓말 못하는 애한테 연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화연을 대신해 재빨리 대답하자 지수가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언니?”

“어. 주화연이라고. 화린이랑 자매 사이야. 나랑 나이도 같고 같은 게임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까 서로 친구처럼 된 거고. 오늘도 화린이 놀러 온 김에 같이 왔나 보네.”

주말에 정모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놀러온 고등학생과 함께 친해져서 놀러온 언니.

말만 들어보면 개연성으로는 문제될 것 없는 전개다.

재빠르게 대처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감탄이 나오는 대처였다.

이 세계로 와서 진짜 거짓말만 느는 거 같네.

“맞지?”

“아, 응. 그, 그치.”

멍하니 있는 화연에게 동의를 구하듯 묻자 화연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쟤한테 연기 시킬 일은 없어서 참 다행이다.

“그러니까…….”

내 말을 모두 들은 지수가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정리하기라도 하듯이.

“정모에서 친해진 여고생한테 언니가 있었고, 그 언니도 같은 게임을 좋아해서 서로 만났는데 동갑이기도 하고 친해져서 이렇게 보게 된 거다 이 말이네?”

“그렇지.”

“……오빠.”

그 순간 동생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돌연 심각해진 얼굴로 지수가 내 옷 소매를 잡아끌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왜?”

“엄마한테 이르기 전에 오는 게 좋을 걸.”

뭐야, 불안하게…….

딱히 문제될 이야기는 없었던 거 같은데.

협박에 가까운 동생의 태도에 못 이겨 나는 동생과 함께 집 앞으로 나왔다.

탕.

현관문을 닫기 무섭게 지수가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째려보았다.

“오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뭐가?”

“뭐냐니? 오빠는 지금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오빠 진짜 미쳤어?!”

“뭔 소리야,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묻자 자신의 이마를 짚는 지수.

“하…….”

골이 아프다는 듯 한동안 그러고 있던 것도 잠시.

고개를 든 지수가 답답한 표정으로 빽 소리쳤다.

“그러니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왜 여자를 데리고 오냔 말이야! 하물며 둘이나!”

아, 설마 그 뜻이었나.

순간 생각지도 못한 동생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이 세계가 정조역전세계라는 것을.

“후, 진짜 남자가 왜 이렇게 위기감이 없는 건지.”

깨달은 내 모습에 그제서야 속이 풀린 듯 동생이 한숨을 푹 쉬었다.

설마 지금 나 걱정하는 건가?

그 천하의 싸가지가?

어안이 벙벙한 날 향해 지수가 정신 차리라는 듯 내 양 팔을 붙들었다.

“아무튼 진짜 정신 차려 오빠. 오빠도 이제 성인이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가족 입장에서 말하는 거니까 잘 새겨들어.”

“…….”

내가 고등학생 친동생한테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되는 건가.

살다 살다 별일이 다 있네.

잔뜩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하는 지수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두 사람 다 친하니까.”

“친하면 뭐? 어차피 정모에서 만난 관계라면서?”

“……그거야 그렇긴 한데.”

사실 그냥 게임만 하는 관계보다 훨씬 더한데.

변명으로 그렇게 말해둔 터라 저리 말해도 할 말이 없네.

내가 멋쩍게 뒷목을 긁적이자 지수가 말을 이었다.

“나도 오빠가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까지는 간섭하기 싫어. 그런데……. 이건 좀 아닌 거 같거든? 혼자 살면서 집에 이성 함부로 데려오는 거 아냐. 특히 여자들은 오해한다고. 오빠는 워낙 둔탱이라 잘 모르겠지만.”

아니, 내가 그걸 왜 모르겠니.

이 세계 남자 중에서 나보다 그 심리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걸.

“뭐, 그래도 사람 꼴은 하고 사나 보네.”

거기까지 말한 지수가 잡고 있던 내 양팔을 놓았다.

잔뜩 찌푸려졌던 미간도 어느덧 한층 펴져 있었다.

잔소리는 여기까지다 이건가.

“뭐, 나도 오빠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어차피 잘 살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돌아갈 생각이기도 했고.”

“그 말은……?”

“어차피 엄마 닦달 때문에 못 이겨서 온 거니까 그냥 넘어가 줄게.”

선심 썼다는 듯 그리 말하는 지수.

이걸 내가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건가?

“에휴.”

가만히 날 보던 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좀 가끔씩 집에도 오고 그래.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부모님으로 화두를 돌리지만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고향집에서 여기까지는 그래도 거의 한 시간, 왕복으로도 두 시간 이상은 걸리는 거리다.

즉, 동생도 정말 싫었으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거란 얘기다.

아무리 서로 소 닭 보듯 한다 해도 가족은 가족이란 거겠지.

“그래. 그럴게.”

아닌 척 하면서도 챙겨주는 동생의 태도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제사 때는 무조건 간다고 얘기해줘.”

“알았어. 아, 그리고 부모님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아마 여기까지 올 일은 없을 거야. 바쁘기도 하고.”

“그래주면 고맙고.”

“대신 온 김에 용돈이나 좀 줘.”

흐뭇한 내 미소가 쓴웃음으로 바뀌는 대에는 말 몇 마디로 충분했다.

그래, 네 입에서 그 말이 언제쯤 나오나 했다.

이게 내 동생이지.

뭐, 말 안 해도 줄 생각이긴 했다만.

“얼마나?”

“음…….”

내 말에 지수가 씨익 웃었다.

내가 본 것 중 제일 간사한 미소로.

“오빠 여유 되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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