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2화 〉 11.5. 그가 없는 사이(1) (102/152)

〈 102화 〉 11.5. 그가 없는 사이(1)

* * *

‘너 혼자 산다’의 방영 문제로 김현수가 잠시 여행을 떠난 사이의 일이다.

주화연.

최다슬.

그리고 윤화정.

세 사람은 현수를 뒤로 한 채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

그가 있었을 때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마저 정리하기 위해서.

딸랑.

한적한 카페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주화연이었다.

아직 약속한 이들이 도착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화연이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문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화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번 모임의 목적이 어떨지는 뻔하다.

현수와 함께 했던 자리에서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간의 입장을 정하자는 거겠지.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생각하고 있자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지는 화연이었다.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사실 화연으로서는 아직 다른 섹파들에 대한 입장이 완벽하게 정리가 된 건 아니었다.

물론 현수를 좋아하고 그의 입장도 이해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허나 그걸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눈앞에서 다른 파트너들과 하하호호 웃으면서 얘기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애초에 같은 남자를 공유하는 여자들끼리 모여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다슬 한 명만으로도 그렇게 부딪히지 않았는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화연은 절로 눈앞이 깜깜해짐을 느꼈다.

“휴우…….”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가게 될까.

적어도 서로 머리끄덩이 잡으면서 싸울 일은 없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화연이 초조하게 커피만 홀짝일 무렵.

딸랑.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인물이 등장했다.

고개를 돌린 화연의 시선에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빨리 왔네요.”

귀여운 인상과는 달리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최다슬.

그런 최다슬을 보며 화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뚱한 표정으로 화연을 내려다보는 다슬.

그런 다슬을 보며 화연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주문하고 올게요.”

“아, 네.”

시크하게 몸을 홱 돌리는 다슬.

그런 다슬을 보면서 화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나보다 어린 애 앞에서 긴장한 꼴이라니.’

한심하다고 생각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겪을 여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는 사이 다슬이 주문한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맞은편에 앉은 다슬이 말도 없이 커피를 쪼르륵 마시기 시작했다.

“…….”

“…….”

마치 1초가 10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두 사람은 말없이 창밖을 보며 커피만 홀짝거릴 뿐이었다.

“늦네요.”

결국 참지 못한 다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입을 연 다슬의 모습에 화연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윤화정 씨 말이에요. 먼저 만나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아…….”

먼저 말문을 트는 다슬의 목소리에 화연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런 화연의 모습을 보면서 다슬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참 순진한 사람이란 말이지.’

저번에 대화를 할 때도 느꼈지만 저 나이 먹고 이렇게 내숭 없는 인간은 다슬도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온 새내기 후배들도 눈앞의 여자보다는 더 교활하리라.

“저기……. 다슬 씨.”

이번에는 화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소 소심해 보이는 화연의 모습을 보며 다슬이 피식 웃었다.

“자꾸 다슬 씨라고 하지 말고 그냥 반말해요. 언니잖아요.”

“음, 그래도…….”

“처음 볼 땐 반말 잘 해놓고는.”

“그, 그건……!”

첫 만남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빨개지는 화연.

같은 여자가 봐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

‘거짓말은 절대 못할 성격이네.’

갑자기 확 가벼워진 분위기에 다슬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빠는……. 이런 모습에 홀려서 이 여자를 만난 걸까?’

정말 좋아하는 오빠가 여자가 눈앞의 여자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다시금 표정이 굳어버리고 마는 다슬이었다.

복잡한 기분을 들키지 않고자 다슬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됐으니까 그냥 편하게 말해요.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닐 거 같고.”

“음……. 알았어. 그럼 다슬이 너도 편하게 불러.”

“전 이게 편해요.”

“아, 응…….”

“그래서요?”

“응?”

“뭐 얘기하려고 하던 거 아니에요? 말해 봐요.”

“아, 그게…….”

목이 타는지 다시 빨대를 물고는 커피를 쪼르륵 마시는 화연.

힐끔거리며 다슬을 보던 화연이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윤화정 씨 말인데……. 아, 미리 말해두는데 뒷담하려는 건 아니다?”

“누가 뭐래요?”

“아, 응. 아무튼 그 분 말이야. 생각해보니 그 사람은 현수랑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뭐……. 시기상으로 보면 그런 거 같죠?”

“응.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도 했을까?”

“풉!”

직설적인 어조에 다슬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작게 내뿜었다.

“뭔 소릴 하는 거예요, 갑자기!”

이 여자 사실 소심한 척 하는 거 아닐까?

어떻게 저런 소릴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있는 다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화연은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리 이런 얘기 하려고 만난 거잖아. 너도 처음에 나 보고 그런 말 했으면서.”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래서 다슬이 네가 보기엔 어때?”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역시 너도 모르는구나…….”

“뭐, 당사자가 오면 알게 되겠죠. 언니 말대로 어차피 그런 얘기 하려고 모인 거니까.”

“으응.”

“뭐, 저쪽이 순순히 그걸 실토할진 모르겠지만요.”

“그럴까…….”

“뭐, 애초에 말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여전히 불편한 기색의 다슬을 보면서 화연은 다음 할 말을 궁리했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무겁게 있기보다는 뭐라도 말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아, 그러고 보니 다슬이 너 화정 씨 팬이라면서.”

“……그 부분은 아직 저도 복잡하니까 너무 묻지 마요.”

“뭐가?”

“생각해 봐요. 언니 같으면 어떻겠어요? 동경하는 연예인이 내 남자라고 생각했던 인간이랑 짝짜꿍하고 있는 꼴인데.”

“아……. 그것도 그런가?”

“하아…….”

순진하게 되묻는 화연의 모습에 다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니는 얘길 해도 왜 그런 걸 얘기해요?”

“그, 그래도 확실한 건 아니잖아. 아직 제대로 얘기를 나눈 게 아니니까…….”

“됐으니까 그 얘긴 그만하죠.”

“으……. 미안.”

결국 화연의 노력도 무색하게 대화는 그걸로 끝.

화제를 잘못 꺼냈다는 생각에 화연은 안절부절 못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화연의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다슬은 그저 다리를 덜덜 떨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바깥만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어색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딸랑.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을 발견한 그녀, 윤화정이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연예인답게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 화정이 자리로 다가왔다.

“두 분 다 일찍 오셨네요.”

다소 거북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화정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화연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화정 씨.”

“네. 화연 씨도 잘 지내셨어요? 그래봤자 며칠 안 되긴 했지만.”

“아하하……. 그렇네요.”

작게나마 웃는 화연의 모습을 보면서 화정이 속으로 작게 웃었다,

‘이쪽은 어려울 거 없겠고.’

첫 만남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순한 사람이다.

아마 말만 잘 한다면 구슬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겠지.

“다슬 씨도 잘 지내셨죠?”

화연과 인사를 나눈 화정이 다슬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저희가 그렇게 안부 묻고 지낼 사인 아닌 거 같은데.”

까칠하게 대꾸하는 다슬.

무례하기 그지 없는 태도에도 밝은 미소를 유지한 화정이 능청스레 대꾸했다.

“에이, 너무 까칠하시다. 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 마요. 서로 잘 지내보자고 만든 자리인데.”

“쯧…….”

대놓고 혀까지 차는 다슬의 모습에 화정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옆의 순둥이랑 달리……. 이쪽은 쉽지 않아 보이네.’

뭐, 애초에 이리 될 걸 예상하고 온 거긴 하지만.

“그럼 저도 주문 좀 하고 올게요.”

잠시 자리를 뜬 화정이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화정이 화연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두 분 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자리에 앉은 화정이 재차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정의 말에 이번에도 화연이 먼저 대답했다.

“아니에요. 화정 씨보다 바쁘려고요. 그래도 연예인이신데.”

“아하하. 그래도 최근엔 조금 널널해요. 그리고 스케줄이 없어도 만들어야죠. 이런 자리는.”

“아……. 그, 그렇네요.”

화연과 화정이 그나마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던 것도 잠시.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를 끊은 다슬이 매서운 눈빛으로 화정을 째려보았다.

“이렇게 부른 이유가 뭐예요?”

“뭐겠어요? 당연히 현수 오빠 이야기지.”

“그걸 누가 몰라요?”

짜증스런 표정으로 다슬이 단발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정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런 다슬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후……. 일단 이거 하나부터 확실히 하고 넘어가죠.”

“네. 뭐든 물어보세요.”

“그쪽은 뭐 때문에 저희한테 계속 연락하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현수 오빠 때문이라고.”

“그러면 그 쪽……. 아니, 화정 씨도 오빠한테 마음이 있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글쎄요.”

“확실하게 대답해요.”

“으음…….”

자신을 노려보는 다슬을 보며 화정이 잠시 고민했다.

여기선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으려나.

‘역시 그냥 친구 사이라고 대답하는 게 베스트겠지?’

솔직히 그리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현수 오빠와 자신의 관계는 그 이상은 전혀 나아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하지만.

저 적대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성격 좋은 화정이라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일까.

화정은 아닌 척 하기보다는 아예 대놓고 도발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솔직히 없다고는 못 하겠네요.”

직설적인 화정의 선언에 다슬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언제는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라더니.”

“그건 정말이에요. 저는 누구 사귈 생각은 없어요.”

“뭐라고요?”

“전 연예인이잖아요. 제가 연예인으로 계약을 맺을 때 조항 중 하나가 연애금지에요. 당연히 오빠랑 사귈 생각은 없어요. 애초에 사귈 수도 없고. 적어도 지금은 그래요.”

“지금은?”

“네. 지금은.”

“하…….”

다슬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가 지금 사람 가지고 노는 건가.

그리고 말이 지금이지, 이미 그 짓을 했을지 안 했을지는 쏙 빼고 대답하는 꼴 아닌가.

까놓고 말해서, 이 윤화정이란 사람은 오빠를 그저 잠자리하기 좋은 남자로만 여기고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적어도 화연 언니나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만나고 있는 건데……!’

그리 생각하니 절로 속에서 열불이 뻗치는 다슬이었다.

이쯤 된 이상 화정을 향한 다슬의 팬심은 완전히 날아간 지 오래.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다슬이 화정을 노려보았다.

“지금 우리 놀리려고 모이자고 한 거예요?”

“놀리다니요. 저로서는 진지하게 하는 말이에요.”

“지금 당장 오빠랑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 이후에 각을 본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랑 화연 언니가 무슨 마음으로 오빠 만나고 있는 건지는 알아요?”

“으음……. 이상하네. 왜 이렇게 흥분하셨을까.”

“지금 흥분을 안 하게 생겼……!”

“생각해 봐요.”

잔뜩 흥분한 다슬의 말문을 끊으며 화정이 말을 이어갔다.

“일단 다슬 씨가 저보다 현수 오빠를 더 오래 만났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태도로 지금껏 교제한 거였어요? 다슬 씨도 현수 오빠가 어떤 스타일인지 잘 알 거 아니에요.”

“그건……!”

“그 오빠, 절대 한 여자한테만 정 주는 스타일 아니에요. 이건 저보다 다슬 씨가 더 잘 알 테고요. 그런데 다슬 씨는 알면서 저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저는 오히려 지금 그런 말을 하는 다슬 씨가 더 이해가 안 가네요. 뭐가 어떤 마음이라는 거죠?”

“…….”

이 말에는 다슬도 과연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현수라는 사내가 문란하다는 걸 알고도 떠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다슬의 모습을 본 화정이 옆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뭐, 옆에 계신 화연 씨도 마찬가지겠지만요.”

“…….”

그 말에 화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화정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일단 현수 오빠가 어떻게 여자관계를 맺는지는 둘째 치고. 지금은 제 역할만 말씀드릴게요. 지금 저는 두 분을 중재하는 역할이에요. 오빠가 저한테 그런 역할을 바라는 눈치였으니까요. 말했다시피 지금은 두 사람과 부딪힐 생각은 없어요.”

“지금? ‘지금은’ 이라고요? 그 말은 나중엔 부딪혀도 상관없다 이거에요?”

“그렇게 공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요. 전 일단 두 분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것뿐인…….”

“사이좋게는 개뿔!”

쾅!

그 순간 요란하게 테이블을 두들기는 소리.

결국 참지 못한 다슬이 탁자를 내리친 것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다행히 손님이 거의 없었기에 그런 다슬의 행동에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카운터에 있던 바리스타가 무슨 일인가 슬쩍 바라볼 뿐.

“언니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다슬이 답답하다는 듯 시선을 옆의 화연에게로 던졌다.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에 화연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 나?”

“언니는 화도 안 나요? 지금 저런 소릴 듣고도 왜 가만히 있는 건데요!”

다슬로서는 태연하게 저런 말을 하는 화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주화연 저 언니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상황인데 그 상황을 알고도 끼어들겠다고?

그것도 단순히 오빠의 몸만 즐기고 내팽개칠지도 모르는 판국에?

“다슬아…….”

허나 그런 다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화연은 그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나도 다슬이 네 말대로 당연히 기분이 좋지는 않아.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서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였어.”

“그러면!”

“그래도 이건 현수가 결정할 문제잖아.”

흥분한 다슬의 모습을 보면서 화연은 조금씩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애써 덤덤한 어조를 유지하면서 화연이 차분하게 답했다.

“나는 현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도 만나기로 결정한 거야. 그렇다면 현수가 화정 씨를 비롯한 다른 여자한테 마음이 있어도 거기 간섭할 생각은 없어. 물론 처음에는 너처럼 질투도 했었지. 아니, 지금도 그런 현수의 태도가 조금 밉게 느껴지긴 해.”

자신만을 바라봐줬으면 한다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수가 여전히 날 좋아해준다면 그걸로 만족하려고 해. 저번에도 말했듯 말이야.”

그렇다면.

이제는 타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제는 현수가 날 더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야. 현수가 누굴 만나든 간에.”

“진심이에요? 지금 이 꼴을 보고도요?”

“응. 지금도 그 때랑 변함없이 똑같은 생각이야.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허."

깔끔하게 대답하는 화연의 말에 다슬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언니는 변함이 없네요.”

전에도 화연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이미 확인한 바가 있다.

하지만 눈앞에서 이런 상황이 오고도 이렇게 깔끔하게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질투라는 게 그리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감정이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다슬 자신은 그랬으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화정을 보던 다슬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언니라도 이런 상황이 오면 조금 다르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음, 그건…….”

잠시 머뭇거리던 화연이 슬쩍 화정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 화정 씨가 이렇게 말해도 별 걱정이 안 들어.”

“네?”

“그야 현수가 마음이 없으면 소용없는 얘기잖아.”

화연의 말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화정의 안색이 확 변했다.

“화정 씨 말씀을 들어보니 화정 씨는 현수랑 아직 그 정도로 가깝진 않은 거 같고.”

“…….”

“친구 사이일 뿐이라는 건 진짜인 거 같아. ‘지금’이라는 걸 강조하는 걸 보니 말이야.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더 안심이 되는걸.”

그리 말한 화연이 화정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화연의 모습에 화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걸……. 그대로 믿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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