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0화 〉 11. 나 홀로 여행­2(8) (100/152)

〈 100화 〉 11. 나 홀로 여행­2(8)

* * *

숙소로 향하는 사이 나는 한솔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의외로 애가 도끼병이 있다는 거다.

“오빠.”

“응?”

“아, 아까 말한 거 있잖아요.”

“아까 말한 거?”

“제가 마음에 든다고 그랬잖아요. 그 왜, 저한테도 여자로서 매력이 있다고…….”

“어. 그랬지. 그게 왜?”

“그러면 오빠도……. 일단 제가 마음에 들긴 한다는 얘기죠? 아니, 생각해보면 마음에 안 들었으면 오늘 같은 일은 안 했을 테니까……. 그쵸?”

그쵸는 무슨.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한솔을 보며 고민했다.

사실대로 내 문란한 사생활을 까발려야 할지, 아니면 적당히 넘어갈 것인지.

사실 굳이 캐묻지 않은 부분까지 꺼내면서 내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걸 얘기하는 것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나을 테지.

허나 그것도 지금까지의 이야기.

이번 여행을 마지막으로 나는 괜히 여자를 더 만들지 않으리라 결심한 상황.

하물며 어젯밤에도 송은지라는 이름의 스튜어디스와 연락처 교환조차 하지 않고 깔끔하게 헤어지지 않았던가.

서울로 올라간 뒤 보게 된다 해도, 한솔과는 오늘 하룻밤의 불장난 정도로 끝낼 생각을 이미 굳힌 상태였다.

그리고 이는 한솔을 위한 일이기도 히다.

이 세계 남자들의 가치관과는 정반대의 남자인 나와 너무 어울리게 된다면, 이후 남자를 만나는 데 애로사항이 꽃필지도 몰랐다.

이제 막 스무 살인 애한테 여기 기준과 다른 정조관념을 가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막 섹스를 경험한 애한테 괜한 기대를 품게 할 필요는 없으리라.

“오빠는……. 사귀는 사람 있어요?”

대답이 없는 내 모습에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는 한솔.

거기서 그렇게 보면 내가 대답하기 미안해지는데.

“없는데.”

마음 속 한켠에 죄책감을 밀어낸 채 내가 애써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정말요?!”

내 대답에 한솔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사귀는 건 아니고 너처럼 섹파로 지내는 애들이 좀 있지.”

“……섹파요?”

이어지는 대답에 입을 헤 벌리는 한솔.

미안하다, 한솔아.

너라면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 거야.

“응. 오늘 너처럼 이렇게 하루 만나서 하거나 그 외에도 꾸준히 만나는 여자들이 있거든. 후자의 경우에는 사귀는 건 아니지만 친구보다는 깊은 느낌? 단순히 섹스만 하는 여자도 없진 않지만.”

“…….”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망스런 기색을 숨길 생각도 없이 한솔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뭐, 이 세계 기준으로 치면 대놓고 걸레 선언을 한 셈이니까.

정상적인 가치관을 지녔다면 실망스러울 만도 할 것이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한솔은 이성과 관련된 질문을 일체 꺼내지 않았다.

섹파 화제가 나온 이후는 정말 사소한 잡담만 이어질 뿐이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연애니 결혼이니 하면서 동정, 아니 처녀가 할법한 상상을 했을 그녀로서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으리라.

“그럼 또 보자.”

그녀가 머물고 있는 펜션 근처에 도착한 나는 작별인사를 했다.

사실 오늘 이후로 안 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아쉬운 기분이 들긴 한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근처 호텔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밤새 한솔과 뒹굴고 싶을 정도로.

허나 그럴 수가 없는 게, 오늘 한솔은 대학교 MT를 온 입장이니까.

아무리 여자와 자는 게 좋다고는 해도 그건 너무 염치없는 거다.

얘도 얘 입장이 있으니까.

……뭐,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내가 진짜로 부탁하면 여자 입장에서는 거절은 절대 안 하겠지.

하물며 오늘을 마지막으로 밤을 안 보낼 예정이니 더더욱.

후, 괜히 생각 길어져봐야 아쉽기만 하지.

그냥 빠르게 찢어지자.

"갈게."

“오, 오빠…….”

내 인사에 대답도 하지 않은 한솔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망설임이 역력한 기색으로.

"왜?"

"그, 그게."

“나 참.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저기, 그러니까…….”

내 재촉에도 불구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모습에 피식 웃었다.

얘는 몸을 섞어도 여전하구나.

“내일……. 꼭 연락 주세요.”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한솔이 겨우 입을 열었다.

"기다릴게요……."

“당연히 연락하지. 설마 그 말 하려고 그렇게 뜸 들인 거야?”

“그게 좀 망설여져서…….”

“뭐가?”

“어차피 오빠는 다른 여자도 많다고 했으니까……. 아쉽달까, 허무하달까……. 앞으로 연락하면서 지내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섹파가 많다는 말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내가 한 말을 곱씹었던 모양이다.

“으, 제가 말해도 정리가 안 되는 건 알겠는데…….”

스스로도 횡설수설하는 걸 알고 있는지 한솔이 스스로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한솔을 보며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진정해. 너무 어렵게 생각하니까 그런 거잖아.”

“하지만 저는 복잡하다고요…….”

“뭐, 정 그러면 내가 전화하는 것보다 네가 생각 정리하고 연락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네? 그, 그래도 괜찮아요?”

“당연하지. 안 될 게 뭐 있어.”

“하지만 다른 여자도 많다고……. 괜히 오빠만 곤란해지는 거 아닐까 해서.”

“너랑도 꼭 그런 관계로 만나라는 법은 없잖아.”

말했듯이 한솔과 이후에 만나게 되더라도 굳이 섹파로 지낼 생각은 없다.

이번 여행은 내 나름의 총각파티니까.

“아…….”

한솔이 내 말에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네요…….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요.”

“그렇겠지. 지금도 야한 거만 생각하는 얼굴인데.”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거기서 그걸 바로 긍정하면 안 되지.

“뭐…….”

얘도 아직 남자 마음을 사로잡기엔 갈 길이 먼 거 같다.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나는 입을 열었다.

“여자들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지.”

아마 원래 세계에서는 절대 할 일이 없었을 말을.

***

한솔과 헤어진 뒤.

나는 적당한 모텔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으쌰!”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성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숙소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근처에 숙박업을 하는 건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덕분이었다.

뭐, 가격은 전혀 착하지 않았지만.

침대에 누운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아직 6시 좀 넘었나.”

여행 온 거 치고는 좀 이르게 쉬는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참으로 충실한 하루였다.

바닷가에서 물장구도 좀 치고, 대충 남자한테 환장한 여자들 홀려서 저녁도 꽁으로 때워먹고, 심지어 파릇파릇한 새내기랑 떡도 쳤고.

이보다 충실한 여행도 없겠지.

거기다 오늘은 특히 일찍 와야 될 이유도 있었고.

“20분에 시작이라고 했나.”

오늘은 공중파에서 ‘너 혼자 산다’가 나오는 날이다.

내 첫 데뷔가 되는 날인 것이다.

뭐, 첫 데뷔라고 해도 동시에 마지막이 될 테지만.

“음?”

그렇게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이 문득 징징 울리는 폰.

액정을 확인하니 윤화정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흠, 방송 때문에 전화한 건가?

“여보세요.”

“여행은 잘 즐기고 있어?”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친구에게 말을 걸듯 편안한 어조로 묻는 화정.

그 허물없는 어조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당연하지. 나 혼자 즐겨서 미안할 정도야.”

“좋겠네 오빠.”

얘는 오빠라고 부르면서도 말 놓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니까.

나도 화정의 이런 점을 좋아하는 거지만.

“오빠 목소리가 엄청 밝긴 밝네. 꽤 살판났나 봐.”

“말하는 거 하고는. 그럼 여행 왔는데 안 즐겨?”

“흐응…….”

화정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뭐 없었어?”

“뭐냐니? 뭐가?”

“아니, 거기서 또 로맨스 영화 찍는 거 아닌가 해서.”

“그건 또 뭔 소리야.”

“왜, 이미 양다리 걸치신 분이잖아. 혼자서 여자들 끼고 다니는 거 아닐까 상상하고 있었거든.”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면 이번 기회에 날 잡아서 그러는 거 아냐? 왜, 남자들 결혼하기 전에 총각파티니 뭐니 하잖아. 오빠가 결혼한다는 얘긴 아니지만.”

“……뭔 소리야. 진짜 그런 거 아냐.”

“하긴 설마 정말 그렇게 문란하게 놀진 않겠지.”

“…….”

이거 무슨 몰카인가……?

무슨 놈의 촉이 이래.

이 정도면 촉이 아니라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정조가 변해도 여자들의 이런 촉은 여전한 건가?

“농담이야.”

내 섬뜩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쾌활하게 말하는 화정.

별 거 아니라는 듯 화정이 곧바로 화제를 변경했다.

“그보다 내 선물은 샀고?”

“톡에서도 그러더니 아직도 선물 타령이냐. 마침 내일 관광지 유명한 곳 들리니까 거기서 보고 살 거야. 원하는 거라도 있어?”

“무난하게 감귤 초콜릿으로. 아, 너무 싸구려는 괜히 입맛만 배리더라고. 그러니까 오빠가 잘 보고 괜찮은 걸로 사줘.”

“누가 들으면 뭐 맡겨놓은 줄 알겠다.”

“왜? 오빠가 원하는 거 물어봤잖아.”

“아니, 거야 그렇긴 한데…….”

당당하게 대꾸하는 화정의 말에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튼 얘도 보통은 아냐, 진짜.

내가 묻기야 했다만 선물 받는 입장이면서 이렇게 뻔뻔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제 스물두 살 먹었다는 애가 넉살은 아주 노인들 저리가라 할 정도라니까.

거기에 앙숙 같던 최다슬이나 주화연까지 구슬리는 걸 보면 속에 능구렁이도 몇 마리 키우고 있는 거 같고.

“그보다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계속 대화하다간 그녀에게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게 생겼다.

곧바로 본론을 꺼내자 화정의 목소리가 불만스럽게 변했다.

“왜? 진짜 그냥 안부만 물어볼 수도 있는 거지. 뭐 꼭 일 있어야 전화하나?”

“진짜로?”

“아니.”

“허 참.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뭔데? 방송 때문이지?”

“응.”

역시 그게 본론이었나.

“굳이 지금 얘기할 필요 있나?”

“조금 있다가 전화하면 아예 서울 오기 전까진 얘기도 못 나눌 거 같더라고. 그래서 미리 전화해서 얘기 좀 하려고 했지.”

“방송 끝나고 얘기하면 되잖아.”

“그 때는 오빠 폰이 날 안 받아줄 꺼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한동안은 불티나게 전화가 올 거란 얘기야. 경쟁자가 많으니까. 통화도 어려울 걸?”

“방송 때문에?”

“응.”

너무도 당연하게 답하는 화정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통화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려고.

“야,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내가 지인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방송 끝나자마자 그렇게 연락이 올 거 같지는 않은데.

연예인인 윤화정이면 몰라도.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그거야 지켜보면 알겠지. 아니, 전화통화만 안 되는 정도면 양반이지. 방송 나가고 나면 하루 종일 포털 사이트에 오빠 정체 묻는 걸로 검색어 도배될걸? 정말 잘 풀리면 각종 방송사에서도 연락 올 테고. 이건 진짜 잘 풀렸을 때 얘기지만.”

“과장이야. 그냥 일반인 출연하는 건데.”

“그래서 오히려 더 파장이 클 거란 얘기야. 오빠가 일반인 외모는 아니니까.”

“글쎄다.”

“어휴.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한숨을 푹 쉰 화정이 말을 이어갔다.

“안일하게 있지 말고 마음의 준비 좀 해. 방송 출연하고 나면 한동안은 완전히 생활 자체가 달라질 테니까. 이제 길 가면 싸인 요청도 들어올 걸?“

”에이.“

뭐, 아예 지금까지와 똑같을 거라고는 나도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싸인은 진짜 오버잖아.

”내 말 믿어 오빠. 무조건이니까.“

긴가민가한 내 태도에 화정의 어조가 살짝 진지해졌다.

”이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생길 거야.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알았어.“

”정말 아는 건지 몰라……. 그럼 끊는다. 슬슬 방송 시작하겠네.“

”그래. 보고 얘기하자.“

”……할 수 있다면 말이겠지만.“

화정의 마지막 어조에서는 반쯤 포기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렇게 통화를 끊은 나는 티비를 켜고 채널을 돌렸다.

마침 오른쪽 상단에 나올 프로인 ‘너 혼자 산다’ 문구와 함께 CF가 나오는 중이었다.

방송이 나오는 걸 기다리면서 나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 정도로 관심이 몰릴까?

연예인인 입장에서도 진심을 담은 선의의 충고이긴 할 테지만……. 솔직히 영 실감이 안 난단 말이지.

마음의 준비니 뭐니 해도 애초에 준비할 마음 자체가 안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침내 CF도 끝이 나고 본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그들만의 생활상, 지금 시작합니다!“

첫 시작과 함께 항상 시작하는 나레이션 멘트를 들으면서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여행지에서 방송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그래. 인정한다.

이 때는 물렀다.

이 때의 내가 얼마나 안일했는가.

방송 한 번.

이 방송으로 역전세계에서의 내 인생이 다시 한 번 얼마나 뒤바뀔 것인가는,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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