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10. 나 홀로 여행(5)
몇 시간 전 출발 직전의 비행기 입구.
들뜬 손님들이 차례차례 들어오는 사이, 입구 근처에서 밝은 미소로 맞이하는 스튜어디스가 있었다.
“환영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송은지.
나이 28살.
고등학교졸업하고 빠르게 군대를 가는 게 낫다는 생각에 곧바로 입대를 결정.
전역 후 미리 합격한 대학교에 들어가 휴학 한 번 없이 4년제 항공서비스학과를 졸업.
이후 빠르게 괜찮은 저가항공사에 취직을 성공해 2년 째 이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그야말로 정석에 가까운 코스를 걸어온 스튜어디스라 할 수 있었다.
‘……때려칠까?’
허나 활짝 웃으면서 손님들을 안내하는 것과는 달리, 그녀의 속마음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1년의 인턴 기간을 채우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퇴직률, 이러한 인력난으로 인해 늘어나는 살인적인 근무량, 이로 인해 반복되는 악순환.
이것만으로도 이미 숨쉬기 힘들 정도의 근무여건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간혹 튀어나오는 진상 손놈들, 빡센 업무 규정, 여기에 선임들의 갈굼 수준은 거의 군대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최전방에서 땅개로써 이리 뛰고 저리 뛴 은지마저도 상당히 가혹한 업무환경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하긴, 자신만 군대를 갔다 온 것도 아니다.
갈구는 것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
‘에이 씨,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월급이라도 적었다면 진작에 때려쳤을 것이다.
그래도 이걸로 이번 달 로스터는 끝.
그리 생각하니 조금은 기운이 나는 은지였다.
‘제주도 도착하면 좀 쉬면서 좀 고민해 보자.’
허나 이미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송은지의 머릿속에 남은 건 오로지 단 두 글자, 퇴직 뿐이었다.
고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거의 확정적인 상황으로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번 달 로스터(스케줄)도 끝난 상황.
아마 사직서를 낸다면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우울한 생각은 그만하고 지금은 일에 집중하자.
그렇게 다시 밝은 미소로 손님들을 접대하려던 그 순간.
“환영합…….”
훅 들어온 한 손님에 의해 그녀의 고민은 머릿속 한구석으로 사라져 있었다.
“…….”
인사를 해야 하는 것마저 잃은 채 은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그를 본 순간 든 생각은 단순히 ‘잘 생겼다’는 것.
허나 은지는 그 말만으로는 사내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매끈한 얼굴은 르네상스 시대의 다비드 조각상도 한 수 물러줘야 할 지경이다.
허나 단순히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었다.
남자의 떡 벌어진 어깨와 옷 너머로 얼핏 보이는 팔뚝의 근육은 웬만한 남성모델도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실제로 키와 비율마저도 완벽했다.
신이 ‘완벽’이란 단어를 설명하고자 그를 만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빛이 나는 사내였다.
“안녕하세요.”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타 여행객들이 짓는 가벼운 미소였다.
그런 사내의 미소를 본 순간 은지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철부지 소녀처럼.
“왜요?”
멍하니 있는 은지를 향해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은지가 겨우 인사를 건넸다.
“아, 아뇨, 그, 화, 환영합니다!”
“아, 네. 수고하세요.”
잠시 이상한 표정으로 은지를보던 그가 그대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와……. 진짜 잘생겼네.’
서비스직인 만큼 이런 저런 사람을 셀 수도 없이 봐왔다고 자부하던 그녀였다.
그 중에는 당연히 미남도 있고, 모델이나 연예인도 적지 않게 봐 왔다.
그리고 저 남자도 분명 모델 쪽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저 얼굴로 이미지 관련 업종이 아니라 생각하는 게 힘들다.
허나 수많은 미남을 본 송은지라 해도 저런 미모의 남자는 처음이었다.
“……뭐하냐?”
문득 옆에서 짜증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선배 승무원이 한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지. 방금처럼 또 어벙하게 굴면 알아서 해.”
“죄송합니다.”
“에휴, 여자들은 다 왜 그 모양이냐? 아주 남자가 잘생기면 사족을 못 쓰지. 진짜 한심해 죽겠다.”
대놓고 한숨을 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나 은지는 그러려니할 뿐이었다.
그저 속으로 한 번 까고 말 뿐.
이미 이 선배의 노총각 히스테리는 악명이 자자했으니까.
‘또 지랄이네, 진짜.’
이 남자 때문에 퇴직한 남자 승무원이 거의 두 자릿수에 가깝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하필이면 직급도 부사무장이라 이런 행패를 뭐라 할 사람도 드물었다.
뭐, 직급이 깡패인 이상 뒷담 이상으로 발전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하긴, 내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닌가.’
생각해보면 송은지 자신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로 자신도 퇴직을 생각하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그리고 내가 퇴직하면 아마 이새끼 지분이 60퍼센트는 되겠지.’
진짜 퇴직할 거면 한 대 치고 나갈까?
문득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
물론 그런 심정을 드러낼 정도의 용기는 송은지에게 없었다.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선배 승무원을 뒤로 한 채 은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탑승객이 계속해서 오고 있는 와중에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
“……환영합니다!”
***
이번 달까지만 참으면 된다.
어차피 제주도 도착만 하면 4일은 쉴 수 있잖아.
애써 불쾌한 기분을 털어내며 송은지는 묵묵히 일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허나 애써 일에만 집중한 것이 무색하게.
사건은 이륙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나고 말았다.
급작스런 난기류로 기내가 요동치면서 그녀가 밀고 있던 카트가 쏟아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촤르륵-
“헉!”
카트가 덜컹거리고 각종 스낵이 바닥이 세차게 떨어진다.
흔들리는 몸으로 겨우 카트 손잡이를 쥐었지만 그 뿐.
결국 균형을 잃은 은지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꺄악!”
그 때 맞은편의 누군가가 은지의 몸을 확 붙잡았다.
“조심하세요!”
다행히 은지가 바닥에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누군가가 한 손으로는 카트를, 한 손으로는 은지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세요?”
“아, 죄, 죄송합니다!”
정신을 차린 은지가 재빨리, 그러면서도 실례되지 않는 손동작으로 남자의 몸을 떼어냈다.
고개를 돌리니 복도 끝 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망했다…….’
저 인간이 히스테리를 부릴 걸 상상하니 절로 눈앞이 하얘지는 은지였다.
허나 그렇다고 멍하니 있을 순 없는 노릇.
소란스러워진상황 속에서 선배가 기내 방송을 하는 사이, 은지는 앞서 자신을 도와준 손님에게 감사 인사를 할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어……. 아까 그 미남 분이네.’
내심 당황했지만 입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승무원의 본분을 잃지 않은 은지가 차분하게 말했다.
“다, 다치진 않으셨나요, 손님?”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
“네?”
“다 쏟아버렸는데…….”
남자의 말에 은지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보니 가슴팍에 오렌지 주스가 다 쏟아져 있었다.
깜짝 놀라서 축축해져 있던 것조차 못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짜 망했다…….’
오늘만큼 일진이 더러웠던 적도 없었던 거 같은데.
은지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일단 이 상태로 계속 일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다행히 여벌이 있으므로 그걸로 갈아입고 남은 근무를 마치면 될 것이다.
재차 손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은지는 빠르게 복도를 정리했다.
“도와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그 와중에도 그 미남은 자신을 도와 함께 물건을 집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잘생긴 사람이 인성도 좋다더니, 진짠가?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오니 예상했던 상황이 반기고 있었다.
“뭐하냐, 너?”
그래, 그럼 그렇지.
이 인간이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죄송합니다.”
대기실에서 팔짱을 낀 채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선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짜증스러움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그가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후우……. 됐다. 나중에 내가 다 얘기할 테니까. 넌 보고할 때 가만히 있어. 알았지?”
“…….”
“대답 안 해?지금 내가 네 똥 치워주겠다고 하잖아.”
아니 이런 개새끼가?
은지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욕을 꾹 참았다.
‘누가 들었으면 내가 다 잘못한 줄 알겠네.’
솔직히 은지로써는 억울한 감이 있었다.
방금과 같은 난기류로 사고가 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물론 승무원의 부주의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도 있지만, 방금은 안전벨트를 차고 앉아있는 손님들마저도 몸이 격하게 흔들릴 정도의 급격한 난기류였다.
그런데 눈앞의 노총각 선배는 이걸 올곧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무마하는 척 하면서 빚이라고 지게 할 심산인 모양이고.
“……알겠습니다.”
그래, 시발.
이제 겨우 인턴 벗어난 신입이 뭐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송은지.”
그런데 이 인간은 용건이 아직도 안 끝났는지 계속날 보며 이죽대고 있었다.
옷 갈아입게 나가주면 안 싶은데 도저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 부 매니저님.”
“네가 은혜를 모르는 애는 아닐 꺼라 믿는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 참.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피식 웃은 그가 됐다는 듯 손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뭐, 그건 나중에 얘기하는 걸로 하고. 이번 로스터 끝나면 밥이나 한 끼 하자.”
“네?”
아니.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어안이 벙벙한 은지의 모습을 본 그가 미간을 좁혔다.
“너 태도가 좀 그렇다? 대답이 왜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좀 갑작스러워서요.”
“왜? 나랑 같이 밥 먹는 게 싫어?”
그럼 당연히 싫지.
내가 왜 황금 같은 휴식을 너랑 같이 해야 하는데?
‘토 나오네 진짜.’
어느새 능글맞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선배의 모습에 은지는 속이 니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은지의 심정도 모른 채 그가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야, 하늘같은 선배님이 밥 사준다는데 튕기냐? 어차피 같은 데서 쉬는 건데 밥 한 끼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냐. 이런 게 사회생활이지. 이럴 때는 좀 유도리 있게 행동하고 그러란 말이야. 다 내가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 모르겠냐?”
“아, 네…….”
“에휴, 하긴 네가 뭘 알겠니.”
“…….”
“또 말 없네. 너 자꾸 그렇게 굴면 괜히 선배들 앞에서 재수 없게 보일 수도 있는 거 알아 몰라? 비싼 척 굴지 말고 따라…….”
“선배님, 제가 선약이 있는데요.”
결국 참지 못하고 은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다른 건 참아도 이 인간이랑 쉬는 날에 밥을 먹는다고?
먹던 거 올라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미쳤다고 내가 휴일에 이 인간 얼굴을 보면서 지내야겠는가.
절대 그럴 순 없다.
“……선약?”
”네.“
”누구? 제주도에 아는 사람 없다고 안 했나?“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말에 곤란해진 건 은지였다.
사실 약속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누굴 만나든 네가 뭔 상관인데.
그리 쏘아주고픈 것을 꾹 참으며 은지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한 사람.
”저기 저 사람이요.“
”뭐?“
실제로 이 인간이라면 내 약속까지 하나하나 파고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눈앞에서 증거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리 생각하고 지른 게 바로 방금 전 자신과 부딪혔던 그 손님이었다.
‘어떻게 말을 맞추면 되겠……. 지?’
방금 전 일을 치렀으니까 감사의 인사로 음료수를 건네주고, 슬쩍 얘기를 던지는 거다.
공항에 나갈 때까지만 함께 해 달라는 식으로다가.
‘뭐, 사심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지금은 이 진상 노총각한테서 벗어나는 것부터 생각하자.
”그게 무슨 헛소……. 아니, 방금 부딪힌 손님이랑 약속이 잡혔다고?“
”잠깐 얼굴 좀 보기로 했어요. 일단 저 분이랑 얘기를 나눠야 되긴 하잖아요. 괜히 이번 일로 컴플레인 걸면 저희만곤란해지는 거고요.“
”아니, 그건…….“
”잘 생각해보세요, 부매니저님. 여기서 제가 성의를 보이면 그런 사태까진 안 갈지도 몰라요. 뭐, 보고는 피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피해는 최소화해야죠. 부매니저님도 사무장 자리 달려면 이런 건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잖아요. 일단 저 분 상황부터 처리하고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은지는 자신이 이렇게 말을 잘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술술 이야기가 튀어나왔으니까.
오로지 눈앞의 노총각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엄청난 달변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은지의 달변이 빛을 발한 것일까.
”음……. 하긴 그것도 그러네.“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선배의 말에 은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은지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아. 그렇게 선배를 생각하고 말하는 태도는 마음에 드는걸? 아주 좋은 의견이었어.“
”그러면?“
”네 말대로 하자. 일단 저 분 기분부터 풀어드리도록 해. 그건 은지 너한테 전적으로 맡길게.“
”넵!“
그냥 수고들이기 싫은 걸 나한테 떠넘기는 거겠지. 개새끼야.
그리 쏘아주고픈 것을 참으며 은지가 힘차게 대답했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리고 잘 되면 제주도에서 내가 맛있는 밥도 사줄 테니까. 잘 처리해보라고.“
”…….“
이런 씨발.
이번 이륙이 끝나고 나면 무조건 퇴직서를 쓰리라.
그리 다짐하는 송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