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10. 나 홀로 여행(3)
제주도에 도착하는 데에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빠르게 모든 수속을 마치고 짐까지 찾은 나는 캐리어를 든 채 공항 근처를 서성였다.
“흠…….”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시간은 4시 58분.
그리 늦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딜 돌아다니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급작스러운 여행인지라 항공편이 오후밖에 없었던 거 애석할 따름이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자.
첫 날은 어차피 숙소를 잡고 렌트카만 챙기는 걸로도 시간이 훅 지나갈 테고.
억지로 계획을 짜면서 헐레벌떡 움직일 바에는 이게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3박 4일에나 홀로 다닐 예정이니 시간은 차고도 넘칠 테고.
“…….”
눈을 찌를 듯한 햇빛에 나는 무심코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 보이는 수십 그루의 야자수가 마치 불에 타듯이 주홍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국적이면서도 강렬한 풍경에 나는 홀린 사람마냥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
처음 최수민 대표가 내게 여행을 제안했을 때 내가 그 말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나도 단순히 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을온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세계에서생활하는 것 자체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
지금의 내게 쉰다는 개념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그렇다고 본사의 보복성 방침에 굴복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지금은 변호사 고혜진과 함께 본사 대표인 김옥희의약점을 찾아내고 있는 형국.
굳이 이 이상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생각해서 얌전히 있을 뿐이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이렇게 여행을 하게 된 이유는, 혼자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화연과 다슬 두 사람의 갈등을 본 직후.
나는 아직 이 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말로는 마음대로 산다고 떠벌리고 다녔지만 여전히 나는 물렀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내 태도는 단순히 나 자신만이 아닌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윤화정의 도움으로 어떻게 잘 풀리긴 했지만, 앞으로도 이 모양이면 분명 내 주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좀 더 확실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그러니 다시 한 번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이 세계에서의 나는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이러한 고민은 단순히 나만이 아닌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뭐,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내 태도 자체는 그대로다.
적당히 내 안의 선을 지키면서도 역전세계에서의 삶을 즐기자는 생각은 달라진 게 없다.
다시 한 번 생각을 한다기보다는 각오를 다진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뭣보다 지금까지 만난 섹파들 중에 한 명을 선택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게 내가 고민을 하는 사이.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게이트 너머로 스튜어디스 복장의 여성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점차 다가오는 익숙한 형상의 그녀를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후우…….”
마침내 내 눈앞에 당도한 그녀가 다행이라는 듯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르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땋아 올린 새까만 머리 아래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 옅은 화장 너머로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 작고 앙증맞은 입술과 대조되게 아래로 풍만한 가슴이눈에 띄었다.
여전히입고 있는 제복의 가슴팍에는 ‘송은지’라는 명찰이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은 역전세계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모양이다.
아니면 눈앞의 송은지라는 여자가 그냥 미인이거나.
“많이 기다리셨죠?”
마침내 숨을 모두 고른 그녀, 송은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빨리 온다고 왔는데 조금 늦었네요.”
“아뇨, 뭐. 그래 봤자 얼마 기다린다고요. 굳이 뛰어올 필요는 없었는데.”
“제가 보자고 했는데 기다리게 하면 죄송하잖아요.”
작게 미소를 짓는 그녀.
비행기 위에서 보던 영업용 미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수줍은 듯 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김현수입니다.”
잠시 내 손을 보던 그녀도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내고는 내 손을 잡았다.
힘차게 손을 흔든 그녀가 생긋 웃었다.
“송은지예요.”
***
사실 송은지와의 만남은 내가 예상한 바는 아니었다.
허나 이번 여행에서 어떻게든 여자를 만날 생각이긴 했다.
나로서는 이번 여행을 일종의 총각 파티 비슷한 느낌으로 여기고 진행할 생각이었으니까.
뭐, 애초에 섹파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에서 맞는 표현인가 싶긴 하다만……. 아무튼.
제주에 도착하면하룻밤 같이 지낼 여자를 어떻게 꼬셔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던 내게, 비행기 내에서의 사건은 그야말로 희소식이라 할 수 있었다.
굳이 시간을 써가면서 여자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별 문제는 없었단 거군요.”
“네. 기내방송 하던 선배가 다 지켜보고 있다가 변호를 해줬거든요.”
간단한 소개를 마친 뒤 가장 먼저 나눈 뒤로 화제는 당연히 기내에서 음료수를 쏟았던 건으로 넘어갔다.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묻자 송은지는 대기실에서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덕분에 제 잘못이 아니라고 결론이 난 거죠. 그냥 앞으로 주의하라고 꾸지람 듣는 정도로 끝났어요. 사실 그 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저야말로 조마조마했습니다. 승무원한테 음료수를 쏟았으니 어디 블랙리스트 같은 데 오르는 거 아닐까 걱정했어요.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고의도 아니고. 오히려 절 도와주다 그렇게 된 건데.“
”다행이네요.“
다행히 내가 음료를 쏟은 것에 대해서 항공사 측이 문제를 삼지는 않는 듯했다.
송은지의 상사도 그녀의 실수가 아닌 불가항력임을 감안해 융통성을 발휘한 모양이다.
“그럼은지 씨도 여기 근처에 머무시는 건가요?”
“네. 현수 씨는요?”
“저도 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로 예약을 해 놨습니다.”
그렇게 앞의 사소한 사태에 대한 서로간의 상황설명도 끝난 뒤, 나와 송은지의 대화 주제는자연스럽게 이후의 일들로 초점이 맞춰져가고 있었다.
서로 슬슬 간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좋네요.”
숙소가 근처라는 말에 잘 됐다는 듯 미소를 짓는 송은지.
나는 화사하게웃는 미소 너머로 그 눈빛이 일순간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 하루 정도는 같이 움직일 수도 있겠네요? 아, 물론 현수 씨가 괜찮다면야.”
사실 첫 날은 그냥 쉴 생각이긴 했다만…….
몸 상태가 워낙 좋다보니 딱히 피곤하지도 않고.
이렇게 된 거 그냥 같이 놀아도 되려나.
“당연히 괜찮습니다.”
“정말요?”
내 대답에 송은지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행기 타고 와서 피곤하실 텐데.”
“아뇨. 아직 팔팔합니다.”
“음, 그러면 저야 좋긴 한데.”
“은지 씨는 어디서 머무시나요?”
“저요? 아, 저도 현수 씨 근처 호텔이긴 한데…….”
“그럼 공항 근처에 차 렌트했으니 같이 가실래요?”
원래 세계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은 만큼, 이 세계에서는 반대로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적극적이기 위해서는 일단 두드려봐야 하는 법.
이 세계의 여자 입장에서는 섬세한 남자들에게 이런저런 작업을 거는 절차가 필요했다.
원래 세계의 남자가 대놓고 여자들에게 ‘나랑 빠구리 뜨자 썅년아’라고 하지 않듯이.
물론 나에게는 전혀 해당이 안 되는 얘기다.
원래 세계에서 넘어온 나에게 그런 간만 보는 절차는 귀찮기만 하니까.
“어……. 저, 저야 괜찮긴 한데.”
내 단도직입적인 말에 송은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꾹참아야 했다.
이럴 때마다 여자들 저러는 건 몇 번을 봐도 안 질린단 말이지.
“휴우…….”
뜻 모를 한숨을 쉰 송은지가 말했다.
“그렇게 먼저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실은 조금 걱정했거든요.”
“걱정이요?”
“네. 혹시 제가 보답이랍시고 다가가면 괜히 현수 씨가 부담 느끼는 건 아닐까 했거든요.”
“부담이라뇨. 전혀요!”
여전히 간을 보는 말투에 나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어째 막 나가려고 하니까 오히려 여자 쪽이 꽤 점잖은 편이네.
연락처를 묻길래 꽤 적극적인 사람인 거 같았는데 의외로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듯했다.
나로서는 그냥 바로 한 판 뜨자고 말해도 좋다고 받아들일 텐데 말이지.
아, 참고로 아까 비행기 안에서 그녀의 음란도와 호감도를 내 능력으로 확인한 참이다.
최소한 이성으로서 보고 있는 호감도 수치를 확인했기에, 나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수가있었던 것이고.
“그럼 같이 가시죠. 태워드릴게요.”
물론 아무리 뻔뻔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문명인.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본 사람한테 ‘닥치고 오늘 나랑 한 판 뜨자.’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런 미친 짓은 주화연 한 명으로 족하다.
그나마 주화연도 소설 속 설정으로 성격을 알 수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거고.
……생각해보니 그 때 진짜 미친놈이긴 했구나, 나.
아무튼.
지금은 그냥 이렇게 툭툭 던지면서 미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정말 괜찮을까요?”
“어차피 근처잖아요. 아까 얘기한 숙소 보니까 저랑 그다지 멀지도 않던데.”
“뭐, 그렇긴 하지만…….”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는 송은지.
계속해서 간을 보는 그녀의 모습에 슬슬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혼자서 여행 온 외간남자가 여자한테 같이 가자고 하면 뭐겠냐고.
이걸 계속 잴 필요가 있어?
그냥 좀 굴러들어온 복은 좋다구나 하고 받아들이지 진짜…….
후, 이렇게 된 거 그냥 대놓고 말해야겠네.
“그냥태워준다고 할 때 타는 게 좋을 걸요?”
“……네?”
“나중에 버스 지나고손 흔들지 말란 얘기에요.”
이 정도면 진짜로 대놓고 말하는 거다.
이거도 못 받아먹으면 진짜 호구라고, 호구.
참지 못하고 거의 노골적으로 말을 꺼내자 송은지가 눈에 띄게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
어느새 자리에 멈춘 나는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참고로 여기까지 해도 안 넘어온다면 나도 끝낼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말하는데 안 넘어오면 고자……. 아니, 성불구자? 여기서는 뭐라고 하지? 아무튼 뭔진 몰라도 그거다.
이 이상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면 나도 더 이상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다른 여자 물색하는 게 맘 편하기도 하고.
다행히 그런 내 걱정은 기우로 끝난 듯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는 송은지의 모습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크흠, 입꼬리 단속 잘 해야지.
“그럼 가 볼까요!”
“아하하…….”
신이 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렌터카센터로 향했다.
그런 내 뒤로 송은지의 곤란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으면서 아닌 척 하는 거 다 보인다, 이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