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10. 나 홀로 여행(1)
이후 우리 네 사람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화정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더 심각해지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진지한 이야기가 끝난 화정은 특유의 친근하면서 부드러운 말투로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녹아들고 있었다.
”자, 한 잔 더 해요.“
”또요?“
”보니까 잘 드시는 거 같은데 뭐 어때요. 촬영도 끝났다면서.“
”음, 그렇긴 하죠. 그런데 언니 진짜 잘 드시네요.“
”액면가는 저보다 더 나이 있어 보이는데 언니라고 불리니까 이상하네요.“
”늙었다는 거 돌려 말하는 거예요?“
”성숙하다는 거죠.“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빵 터져 웃었다.
별 재밌는 이야기도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취해서 그런가.
아무튼 두 사람의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좁혀졌다.
특히 다슬은 처음에 으르렁대던 것이 무색하게 화정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이를 밝히자 깍듯하게 언니라 부르며 대하는 화정의 처세술 덕분일까, 아니면 전에 팬이라고 했던 팬심 때문일까.
아무튼 전과 같은 경계심은 없었다.
거기에 둘 다 애주가이니 꽤 마음이 맞는 구석도 있는 거 같고.
저렇게 잘 지낼 수 있으면서 날 세우기는.
”둘 다 엄청 잘 마신다.“
”그러게.“
인싸력이 넘치는 두 사람에 비해 나와 화연은 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얘나 나나 은근히 찐따 기질이 있으니까.
나야 원래 세계에서 그랬고, 화연도 예쁜 미모가 도리어 독이 되어 본래 소심했던 성격이 더 소심해진 케이스였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는 화연이 마음이 편하다.
”현수야.“
”응?“
”아까 밖에서 무슨 얘길 한 거야?“
”아, 별 이야기 안 했어. 괜히 오해 안 받도록 스캔들얘기 솔직하게 하자, 뭐 대충 그런 얘기?“
”그렇구나…….“
내 대답을 들은 화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말문이 없어진 채 멍하니 술잔을 응시하는 화연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아?“
”으, 응?“
”아니, 뭔가 생각이 많아 보여서.“
내 말에 화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그제서야 나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하긴, 오늘 하루만 해도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화연의 입장에서는 섹파였던 남자가 왠 연예인과 스캔들이 터지고, 추궁하러 갔더니 거기에 최다슬이라는 구멍동서(여기서는 구멍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거 같은데)가 성질을 부리고 있고.
그녀로서는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을 것이다.
”또 둘이서 속닥거리네.“
화연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옆에서 다슬이 끼어들었다.
살짝 붉어진 뺨과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누가 봐도 취한 기색이 역력했다.
쟤 설마 또 토하는 건 아니겠지.
”자꾸 나 빼먹고 그러기야?“
”빼먹긴 뭘 빼먹어? 바로 옆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오빠는 왜 맨날 나한테 틱틱거려.“
”이게 또 술 들어가니까 헛소리 하네. 내가 언제 틱틱거렸……“
”됐으니까 한잔 해.“
”어휴.“
문답무용으로 소주를 들이미는 다슬의 태도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저 상태에서 무시하면 더 날뛸 게 뻔하기에 어쩔 수 없이 술을 받았다.
”자, 자. 언니도 한 잔해.“
”아, 응.“
내가 받아들기 무섭게 화연에게도 술을 건네는 다슬.
쟤는 술만 마시면 텐션이 확 올라간다니까.
나는 어깨동무를 하며 술잔을 들어올리는 다슬과 옆에서 곤란한 표정으로 홀짝이는 화연을 잠시 바라보았다.
”쉽지 않겠네.“
옆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화정의 모습이 보였다.
”뭐가?“
”응? 아, 들었어?“
”아니, 일부러 들으라고 말한 거 아니냐? 그렇게 크게 말해놓고는.“
”아하하.“
”그래서 뭐가 쉽지 않다는 건데?“
”글쎄. 뭘까?“
알쏭달쏭한 말과 함께 화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갑자기 뭔 퀴즈쇼야.
”아무튼 오늘 고맙다.“
딱히 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우면 나중에 오빠가 술 한잔 사.“
”그래.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말이지.“
”하긴, 나도 한동안 바쁘니까.“
곧 ’너 혼자 산다‘가 나오게 되면 화연도 다음 음반 판매를 위해 한동안 각종 예능에 꾸준히 출연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그 때가 된다면 탑급 연예인인 화정과 만날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테지.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좀 아쉽네.
뭐, 그래도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이 정도로 만족하며 나는 오늘의 술자리를 즐기기로 했다.
”자, 마셔, 마셔!“
”저, 다슬아. 너 너무 많이 마시는 거 같은데…….“
”뭐 어때요. 이럴 때 마시는 거지. 오빠, 고기 더 시키자.“
”그래.“
”이번엔 오빠가 건배 해 봐요.“
”그럴까?“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세 사람을 보며 나는 함께 술잔을 들었다.
”건배!“
”건배애!“
***
폭풍 같던 그 날의 뒷풀이가 끝난 난 다음 날.
집 앞에서 사온 해장국을 우걱우걱 먹으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어젯밤, 나는 섹파 중 가까운 두 사람에게 내 행보에 대해서 한 번 더 제대로 설명했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고, 또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상당히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는 말임에도, 두 사람은 일단 내 태도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한동안은 어제와 같은 불상사가 벌어지지는 않을 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막 여자를 만나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앞으로는 내 처신에 주의해야 될 거 같다.
그게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까.
”그러면.“
이제 방송 촬영도 끝났겠다, 다시 원래 하던 패션몰 모델 일로 돌아가야겠지.
그리 생각한 나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수민입니…….“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패션몰 대표, 최수민이 내 목소리에 잠시 말문을 멈추었다.
아차, 너무 들떴나.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군요.“
다행히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지 대표의 목소리 톤도 살짝 오른 느낌이 들었다.
”촬영은 잘 끝나신 모양입니다.“
”네. 덕분에요.“
이대로 잡담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먼저 말해야 될 게 있다.
나는 곧바로 사무적인 어조로 바꾸어 말했다.
”그래서 저 이제 촬영도 다 끝났고, 본사에서 다시 피버샵 소속으로 바뀐 거 맞죠?“
”그렇습니다.“
”네. 그러면 다음 모델 일이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전화 드렸거든요.“
”아, 그건 좀 힘들 거 같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표의 말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설마 옷이 안 팔리나?
그래서 나도 딱히 더 할 일이 없어진 건가?
아니면 설마……. 잘린 건가?
”어, 저기……. 그 말은나오지 말라는 뜻인가요?“
”흠,본사에서 설명하지 않던가요?“
”네?“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한 대표가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기 너머로 장장 10분에 달하는 수민의 설명을 들었다.
대표의 말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랬다.
현재 나는 본사의 요청에 따라 패션몰 피버샵에서 파견을 가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상태고, 일주일 내로 방송이 될 예정이다.
촬영은 끝났어도 아직 방송을 타진 않았다는 거다.
참고로 대부분의 방송에는 방송이 출연하기 전까지 비밀보장의 의무가 있다.
쉽게 말하면 스포 방지.
촬영이 다 끝났다고 해서 아직 방송을 타지도 않은 내용을 어디 다른 방송사나 각종 매체에 노출시키면 안 된다는 거다.
……그러고보니 보니 어제 화정이가 여자들이랑 얘기했던 게 좀 걸리네.
아니면 촬영 얘기를 한 건 아니니까 괜찮은 건가?
뭐, 일단 그건 나중에 따로 얘기하는 걸로 하고.
”그럼 전 방송에 나올 때까지는 그냥 백수로 지내야 되는 겁니까?
설명을 들은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일도 못하고 그냥 있으라는 건가요?”
”본사에서 요청이 왔기에 저로써는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이상하잖아요. 어디 라디오에서 떠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패션몰 모델인데.”
“맞는 말씀입니다만 아마 본사 쪽에서 허락하지 않는 이유도 저로써는 이해가 갑니다.”
“네? 어째서요?”
“이번에 현수 씨가 꽤 큰 스캔들을 터뜨리지 않았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수민의 말에 나는 입을 작게 벌렸다.
아니, 설마 그걸로 태클을 걸 심산인 건가?
하, 그 할망구가 진짜…….
“쯧.”
머릿속으로 사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아마 이전 내가 비서와의 관계를 추궁한 걸로 악을 품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괜히 이렇게 나를 옭아맬 필요는 없으니까.
생긴 건 프로틴 한 박스는 먹을 것처럼 생겨가지고 치졸하게 구네.
”괜찮으십니까, 현수 씨?“
짜증스레 혀를 차는 내 목소리가 들린 것일까.
염려하는 듯한 대표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네. 괜찮으니 계속해주시죠.“
”네. 피버 에이전트는 그 스캔들을 아예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용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제가 터뜨리고 싶어서 터뜨린 게 아닌데요? 그렇게 마음대로…….“
”계약상 문제 삼기에는 충분한 사안입니다.”
확실히 조항에 그런 게 있긴 했었지.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긴 한데…….
“그래도 패션몰에서 일하는 걸 본사에서 따지는 건 좀.”
“본사에서 지원을 받는 입장이라……. 저도 어쩔 수가 없군요.”
“진짜 어떻게 안 되는 건가요?”
“정 그러면 법적으로 따지는 수밖에 없겠죠. 다만 방송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법적으로 길게 시간을 끌면 모두에게 손해입니다.”
“하아…….”
“정 불만이라면 저도 돕긴 하겠습니다만.”
“……아닙니다.”
곤란하다는 듯 말하는 대표의 목소리에 나는 추궁하듯이 말하던 것을 멈추었다.
수민의 처지가 난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 본사로의 파견은 바로 그녀가 추진한 일이었으니까.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제 상황에 대해서.“
”글쎄요.“
문득 대표의 생각이 궁금해 묻자 전화기 너머로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감히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현수 씨가 일주일 정도만 참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냥 제가 조용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이거군요.“
”맞습니다.“
”제가 불만족스러워도 말이죠.“
”……죄송합니다.“
일부러 목소리에 살짝 짜증을 섞자 대표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면목 없다는 듯 수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똑바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현수 씨께서 이런 피해를 입는군요.“
”아닙니다. 대표님이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저도 소개를 시킨 입장이니 전적으로 잘못이 없다고는 못 합니다.“
내게 사과를 전하는 대표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씁쓸함이 묻어나 있었다.
하긴, 대표가 자기 안위만 바라고 이럴 사람은 아니지.
처음에는 분명 호의로 나를 추천해줬던 거기도 하고.
애초에 누가 이런 상황이 올 거라 예상이나 했겠는가.
대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지금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 수민이 악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아무튼 사장이 내게 엿을 먹였다는 건 확실하니까.
”그, 가능하다면…….“
여전히 기분이 상한 상태라고 여긴 것일까.
이어지는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다소 다급했다.
“이후에 금일봉 정도라도 받을 수 있게 제가 최대한 추진해 보겠습니다.”
”금일봉이요?“
”계약직이라도 저희 회사 소속이지 않습니까. 안 될 것도 없겠죠.“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해 준다면 나야 나쁠 거 없지.
나는 이후로도 연신 사과를 하는 대표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기를 앞에 둔 채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어쩌지?“
앞으로 일주일이나 빈둥거리면서 지내야 하는 건가.
뭐, 사실 굳이 피버샵에서 모델이 아니라도 딴 일을 하면 되긴 한다.
전에 한 상하차 알바라던가.
허나 꿀 중의 꿀 알바인 모델 알바를 겪은 나로서는 영 기분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피곤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상하차 알바는 반복노동이 수 시간째 지속되는 지루함의 연속이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돈이 그리 궁한 상황도 아니고.
……나도 여러모로 배가 부르긴 했네.
”아니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 기회에 혼자 여행이나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