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2화 〉9. 비글, 골든 리트리버, 그리고……. 똥개?(7) (82/152)



〈 82화 〉9. 비글, 골든 리트리버, 그리고……. 똥개?(7)

미리 약속한 공원에 도착하자 멀리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기 전에 슬쩍 살펴보니 꽤 오순도순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 예상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걸지도……?

“여자야?”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어? 어어, 그렇긴 한데.”
“현수 너 진짜…….”

평소답지 않게 답답해 보이는 화연의 어투.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불안하게 왜 이래……?

그 순한화연마저  모양인데 그렇다면 다슬은 어떨까.

“…….”

말할 것도 없다 이건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노려보기만 하는 다슬.
마주보고만 있어도 불알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에 애써 고개를 돌렸다.

이건……. 망했네.

그렇다고 여기서 입을  다물고 있자니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은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다.

싸늘한 두 사람을 향해 나는 애써 떨리는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꼭  필요가 있는 애라서 그래. 어, 그리고……. 특히 다슬이 넌 기대해도 될 거야. 내가 누구 불렀는지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거-.”
“오빠.”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끊는 다슬의 모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얘한테 이렇게 위압감을 느끼는 건 처음이네.

“먼저 우리 셋이서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그런데 지금 여기서 제3자를 부른다는 건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니, 잠깐만!”

이대로 가다가는 대책 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게 생겼다.
당황한 내가 손을 휘저었다.

“뭔가 오해한 거 같은데 나도 생각 없이 아무나 부른 게 아니야!”
“그러면요?”
“너희 둘 다  스캔들 때문에 이렇게  거잖아. 지금 부를 사람도 그거 때문에 오는 거야. 완전히 무관계한 건 아니라고.”
“윤화정 말이군요.”

음울한 목소리만큼이나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리는 다슬.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람 온다는  맞죠?”
“어, 어어. 다슬이 너 팬이라고 했잖아.”
“……그랬죠.”
“이번 기회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지 그래……?”
“네.”

거기까지 말한 다슬이서늘하게 웃었다.

“마침 저도 궁금한 게 생겼거든요.”

그것은 적지 않게 다슬을  나조차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뭐랄까, 눈빛으로 사람을죽일 수 있다면 세계 최고의 살인마가 될  있지 않을까 싶은 눈빛이랄까?

……와, 지금 팔에 소름 돋았어.

도움을 요청하고자 슬쩍 화연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눈이 마주치자 화연은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흥.”

아.
그냥 집에 가고 싶다…….


***

맴-. 맴-.

슬슬 매미가 울기 시작하는 5월 하순의 저녁.
오후 6시가 넘었음에도 해가 길어진 탓에 아직도 주위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내 마음도 그런주위처럼 타들어가는 중이고.

미리 말해둔 고기집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제발 이 분위기 좀 누가 어떻게 해 줘.
숨 막혀 죽겠네.

그런  마음 속 간절한 기도를 들은 것일까.

“저기, 현수야.”

거북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화연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거 말이야.”
“어, 응.”
“저기……. 뭐 때문인지는 알고 있는 거지?”

아, 맞다. 스캔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것부터 해결을 못하고 있었네.

기왕이면 당사자가 있을 때 얘기해야 두  말하는 수고를 덜 수 있겠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빠르게 오해를 해결하는 게 나을 듯싶다.
내가 애써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그냥 루머일 뿐이니까.”
“정말……?”
“당연하지. 화정이랑은 단순히 친구 사이일 뿐이야.”
“……화정이라고 부르는구나.”
“어? 어어. 동생이기도 하고.”
“흐음.”

뭐야, 저 미적지근한 표정은.
어째 내가 원했던 반응이 아닌데.

“……칫.”

당황한 내가 시선을 돌리자 다슬이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아니, 이번엔 또 뭔데?
나 또 실수한 거야?

“그 화정 ‘씨’랑 꽤 친한가 보네요.”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말하는 다슬.
묘하게 ‘씨’라는 호칭을 강조하는데 절로 손에 땀이 맺혔다.

“아, 그치. 뭐, 한동안 같이 촬영도 했고. 술자리도 가지고 하다 보니까 친해지게 되더라고. 서로 통하는 것도 있고 해서.”
“술자리도 가졌다?”
“뭐……. 그렇지?”
“설마 둘이서만 본 건 아니겠죠?”
“당연하지. 애초에 촬영 때문에 안면  건데. 매니저가 계속 옆에 있었어.”
“후우.”

 말에 다슬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걸지도.
하긴 정말로 싫었다면 처음 화연을 봤을 때처럼 패악질을 부리며 떠났을 테지.

다슬의 주름졌던 미간이 살짝 풀어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말했다.

“설마 스캔들 그거 진짜라고 생각한 거 아니지?”
“글쎄요.”
“다시 한 번 말하는데 그거 다 악성 루머야. 걔랑은 그냥 친구일 뿐이고.”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고 하던데.”

그제서야 슬쩍 나를 돌아보는 다슬.
하지만 눈초리에는 여전히 의심의 기색이 가득했다.

그런 다슬을 향해 내가 서둘러 덧붙였다.

“뭔 소리야. 진짜 아니라니까.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야. 당사자 오면 자세하게 얘기해줄게.”
“친구치고는 너무 다정하게 부르는  같은데.”
“아니, 고작 이름 부른  가지고…….”
“됐어요. 어차피 대화 나눠보면 알게되겠죠.”
“……그래.”

결국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대화는 단절.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두 사람의 기분이 이해가  가는  아니다.
아무리 정조역전 세계고 심지어 내 멋대로  거라는 선언까지 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애초에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고 다니는데  안 먹는 게 이상하지.

거기에 화연과 다슬은 내가 이 세계로 오고 초창기에 만난 이성 관계.
다른 썸녀들에 비하면 훨씬 잦은 빈도로 몸을맞대고 있는 사이라  수 있다.

내가 둘을 특별하게 여기는 만큼, 화연과 다슬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터.

 행동 하나하나에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을지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눈앞의  사람이 화가 난  알아도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로서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줘야 고민하는 사이.

“다 왔네요. 여기 맞죠?”

고민하는 사이에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돌아보며 말하는 다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들어가자.”
“한 명 더 온다면서요?”
“안에서 기다리지 뭐.”

그렇게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이 가게로 들어섰다.

적당히 자리를 찾아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시키는 사이에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 몰라.
일단 고기나 굽자.

치이익-

불판에 올리자 고기 익는 소리와 함께 주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물론 우리 자리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 답답해서 못 참겠네!

“둘이서 얘기는 잘 나눴어?”

두 사람도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일까.

“응…….”
“……그야 뭐.”

애써 밝게 묻는  모습에 화연과 다슬  사람도 슬슬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답은 해 주네.

“그래서? 둘이서 무슨 얘기 했어? 이렇게 오랫동안.”

참고로 두 사람이 기다린시간만 해도 거의 두 시간 가량이다.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터.

“어, 그게…….”
“별 거 아니에요.”

화연이 망설이는 사이 다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쩐지 밝히기 싫은 눈치인데?

“그냥 언니랑 잡담 하고 그랬어요. 그쵸, 언니?”
“아, 응.”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보며 내심 안도할  있었다.
흠, 그래도 언니 동생 할 정도로는 친해진 건가?

“오빠 얘기좀 하다 보니까 시간 흐르는 줄도 모르겠더라고요.”
“무슨 얘기 했는데?”
“그렇게 중요한 얘기는 아니고요. 말 그대로 잡담이요. 그리고……. 어차피 중요한 얘기는 당사자 없으면 별 의미가 없잖아요.”
“음…….”

입술을 잘게 깨무는 다슬과  옆에서 그늘진 표정을 짓고 있는 화연.

어째 대화가 자꾸 지지부진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된 거 나부터 그냥  터놓고 얘기해야겠는데.
어차피 여기가지 온 이상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화났어?”

여러 의미가 포함된 물음.
그 물음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날 바라보았다.

“그야 뭐…….”
“당연하죠. 화가 안 나는  이상한 거 아니에요?”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는 화연과 팍 인상을 찌푸리는 다슬.

“그렇겠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입을 다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상황을 자초한 것은 바로 나였으니까.

즉, 먼저 얘기를 해야 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던 거다.

오히려 두 사람이 말없이 있는 것도 나를 위한 배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스스로 해명할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을 테니까.

“나도 할 말이 많지만…….”

하지만 그 부분은 일단 뒤로 밀어두는 수밖에.
앞서 다슬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당사자가 다 모인 게 아니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모인 뒤에 하는  더 낫겠지.

그렇다면.

“그 전에 너희도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을 거야.”

일단은 두 사람이 가진 불만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가는 게 낫겠지.

조금이라도 불만을 잠재운다면, 이후 화정이 도착했을 때 조금  원만하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 판단한 나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한  터놓고 얘기해 보자. 궁금한  있으면 오늘  말해. 오늘만큼은 나도 될 수 있는 한 솔직하게 대답할게.”
“그, 그러면.”

 말에 지금껏 잠자코 있던 화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혀, 현수 너……. 며, 몇 명이나 만나고 있어?”
“질문이 좀 모호한데.”
“이, 이성 관계 말이야. 썸 타는 사람 다 포함해서!”

화연 치고는 상당히 저돌적이고 직설적인 질문.

 말에 나는 턱을 짚으며 생각에 빠진 제스처를 취했다.

“글쎄다.”

너무 길게 고민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대답해서도 안 되는 질문.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눈앞의 주화연과최다슬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까지 온 이상 윤화정의 경우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
거기에 현재  뒤를 봐주며 종종 만나는 변호사 박소진과 앞으로 내  상태와 관련해  마주칠 예정이 있는 부잣집 따님 고혜진이 지금의 질문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거다.
 외에는 뭐, 먼저 연락하지 않는 한 그다지 만날 생각이 없고.

거기까지 고민하며 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5초 이내.

모든 고민을 마친 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너희 둘을 빼면 한……. 세 명?”
“그, 그렇게나?”
“세 명……. 생각보다 많진 않네.”

 대답에 반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내 대답에 아연실색하는 화연과 달리 다슬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충 두 사람의 성향을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화연이 핼쑥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그 사람들 다 어디까지 진도를……!”
“그건  위해서도 얘기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들어야겠다면 얘기하겠지만. 괜찮겠어?”
“…….”

입을 벌리며 날 바라보던 것도 잠시.
순간적으로 실이 풀린 인형 마냥 화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그냥 안 들을래…….”
“그래.”

안 물어봐줘서 내가  고맙네.
여기서 그런 얘기를 했다면 아무리 나라도 고개를 들기 힘들었을테니까.

“이번엔  차례네요.”

힘이 빠진 화연보다는 비교적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다슬이 말했다.

“오빠, 처음에 저 만나서 했던 말 기억해요?”
“처음에 했던 말?”
“누구 한 명 딱 정해서 사귈 생각 없다고 그랬었잖아요. 이 언니한테도 그렇게 말했을 테고. 다른 썸녀들도 그럴 테죠?”
“맞아.”
“그러면 오빠는…….”

지금껏 애써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던 다슬의 얼굴이 처음으로비틀어졌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망설이던 다슬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희를……. 그저 단순히 엔조이 대상으로만 보는 건가요?”
“엔조이?”
“그냥 몸만 좋아서 만나는 거냔 말이에요. 그게, 저희랑 달리 오빠는 저희를 몸만 섞는 거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않는 건가……. 해서요.”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네.

“그럴 리가 없잖아.”

불안해하는 다슬에게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널 대하지 않았다는 거 너도 잘 알 텐데.”

솔직히 다슬이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지금껏 몇십 번을 만난 다슬이라면 충분히 알아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니면 이것도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했던 건가?

확실히 헤프게 살아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만남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닌데.

“저도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다슬이 짓이기듯 작게 소리쳤다.

“저도 이건 안 물어볼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직접  입으로 확언을 듣고 싶었다는 걸까.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 씩씩한 녀석이라 솔직히 별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내심은 많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다른 여자는 제   아니에요.”

거기까지 말한 다슬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오빠 입으로 저에 대한 걸 확실하게 듣고 싶어요.”

거침없이, 올곧이 나를 바라보는 다슬의 눈빛.
허나 그와 별개로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다.

“오빠는, 오빠는 저를 정말로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

나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아해.”
“그러면 다른 여자들은 왜……!”
“하지만.”

반색해 일어나려는 다슬을 향해 나는 손을 내밀었다.

“난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다른 여자들도 좋아해.”

다슬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옆에 있던 화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지금껏 생각해둔 바를 천천히 내 생각을 전달했다.

“나 헤픈 것도, 가벼운 것도 맞아. 그건 인정할게. 하지만 내가 여자친구를 만들지 않는 건 너희나 다른 관계를 맺은……. 아니, 관계를 맺은 애들 외에도 세상 모든 여자들을 단순히 몸만 섞는 걸로 만족하는대상으로만 여겨서 그런  아니야. 귀찮아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세계로 오면서 바뀌게 된 것.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태도들.

그 모든 것을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나는 한 사람만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사랑 따위는 안 믿어.”

그것이 불안해하는 눈앞의 두 사람을 향한  최소한의 도리라 생각했으니까.

“어릴 때나 그런 믿었을 따름이지. 아니, 지금도 사람에 따라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고, 또 그런  원하지도 않아.”

원래 세계에서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여성이 있었다.
2년을 대학교에서 끙끙 앓다가 결국 용기를 내고 고백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대학교 안에서 나는 놀림감이 되어 있었다.

결국 그렇게 군대도 도망가다시피  버렸고.

그 날 이후로 나는 한 사람을 필요 이상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다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그런 경험은, 앞으로도 절대 할 생각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나는 한 사람이 여럿을, 혹은 여럿이 여럿을 동시에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물론 똑같이 사랑하는  힘들 테고, 우선순위가 있을지도 몰라. 오히려 동등하게 사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예수 같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은 말이야. 하지만 덜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고 봐.”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마찬가지.
굳이 딱 한 사람만 정하고 그 사람만을 사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뭐, 그 탓에 원래 세계에서도 동정으로 살아온 거겠지.

하지만…….
여긴 다르니까.

“확실한 건 내가 여자를 단순히 몸만 보고 안으려고 하는 인간은 아니야. 그거 하나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마무리하며, 나는 두 사람의 눈빛을 각각 마주쳤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한 사람만 정해서 좋아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자주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중요할 때에는 심지가 곧은 주화연.
그와는 반대로, 지금껏 숨겨온 불안함을 이때다 싶어 발산하는 최다슬.

  각자의 매력이 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매력을 각자 다르게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너희가 나처럼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난 비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건 나한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눈앞의 두 사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다.

“내 입장에서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되는 거고.”

물론 속으로는 썩 기분이 좋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내로남불 식으로 나가고 싶진 않다.

만약 나보다 더 좋은 남자가 생겼다고 한다면 그러려니 해야겠지.
아니면 그냥 보내주던가.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화연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나는! 다른 사람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드는 걸!”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운걸.”

내 미소에 화연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으읏……!”

어찌할 줄 모를 표정으로 날 보던 것도 잠시.
결국 화연이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반면 다슬의 경우에는 골치 아프다는  이마를 부여잡고 있었다.

“하아, 진짜 오빠…….”

황당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던 다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엄청 밥맛인 거 알아요?“
”그래도 마냥 싫은 건 아니지?“
”……그런 태도가 밥맛이라는 거예요.“
”어쩌겠어. 이게 모습인걸.“

내 말에 다슬의 얼굴이 한층  일그러졌다.
허나 이 자리를 떠나는 일은 없었다.

그걸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아무튼 나한테는  다 특별한 존재야.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내 대답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현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게.”
“쳇……. 마음에  들어.”

100퍼센트 긍정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런 나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 말하는 두 사람의 태도에 나는 그제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양다리든 몇 다리든 걸치고 다니겠다는  뻔뻔하게 말한 건데.
오히려 납득해주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고맙고 또 미안했다.

일단은 둘  진이  빠졌을 텐데 배라도 든든하게 채워줘야겠지.

“둘 다 질문은 이제 끝이야? 그럼 고기나 먹…….”

불판으로 시선을 돌리던 내가 말문을 멈추었다.
일장연설로 인해 제대로 불판에 올려둔 고기들이 새까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 다 탔네.”
“자, 잠깐만.”

허나 아직 부족한 게 남은 모양이다.
화연이 끝이 아니라는 듯 다급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현수야……. 나 하나만 더 물을게.”
“응.”
“그, 아까 전에 네가 그랬잖아.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어도 다 사랑이라고. 더 사랑하거나덜 사랑할 수도 있다고.”
“그랬지.”
“그, 그러면.”

 보던 화연이 돌연 눈을 꾹 감았다.

하기 싫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듯.
마치 싫어하는 음식을 마주한 어린이 마냥.

“나는  번째야?”
“……어?”
“오, 그건 저도 궁금한데.”

 말에 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옆에 있는 다슬도 이건 꽤나 궁금했는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런 시련이라니.

이거…….
어떡하지?

“나 왔어요~.”

그 순간.
새롭게 등장한 구세주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얘기는 잘 됐……. 뭐야? 다들 왜 그리 굳어 있어요?”
“잘 와줬다 화정아.”
“네?”

당황한 채  있는 화정을 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연 손목을 꽉 붙잡자 화정이 깜짝 놀라 날 바라보았다.

그런 화정을 향해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정말 잘 와줬어.”

 어느때보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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