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9. 비글, 골든 리트리버, 그리고……. 똥개?(3)
공원에서의 촬영은 약 두 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오케이! 거기까지!”
마무리를 알리는 피디의 외침과 함께 카메라맨들이 하나둘씩 카메라를 내렸다.
그런 스태프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의 작가가 다가왔다.
“야외 촬영은 여기까지예요. 수고하셨어요. 현수 씨.”
“아, 네.”
“화정 씨도 수고하셨어요.”
“네에.”
흠, 솔직히 수고했느니 뭐니 하긴 해도…….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냥 화정과 데이트를 하는 거 같은 기분이다.
솔직히 카메라도 없으면 촬영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으니까.
정말 이렇게 해서 돈 벌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저기.”
그보다 일단은 신경 쓰이던 부분부터 물어봐야겠지.
나는 작가를 향해 말했다.
“작가님.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이번에 스캔들 얘기도 나왔잖아요. 그것도 방송에 나가는 겁니까?”
“아, 네. 나가죠. 그거 하나면 시청률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인 걸요.”
역시 나가는 건가.
하긴방송사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화제긴 하겠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진지해진 내 표정에서 근심을 읽어낸 것일까.
작가가 괜찮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편집자한테 잘 얘기해서 신경 쓸 수 있도록 할게요. 현수 씨나 화정 씨한테 피해가 가진 않는 방향으로 할 테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네요.”
“물론 저희도 어느 정도는 뽕을 뽑아야 되겠지만요.”
“그건 좀 적당히 부탁드립니다.”
“하하. 네.”
나는 그런 작가의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정말 악의적 편집 같은 걸 하진 않겠지.
하긴 애초에 안다고 해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촬영은 끝났으니 방송일이 다가오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것도, 잠시나마 인기를 끌고자 한 것도 다 내가 원해서 만든 일이다.
크든 작든 결과는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스캔들 사태까지 예상한 건 아니긴 하지만.
“끝났어요?”
“우왓.”
생각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누군가 등 뒤로 나를 와락 안았다.
어느새 내 어깨에 턱을 걸친 다슬이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좀 걸렸네요.”
“그래? 이 정도면 빨리 끝난 거 같은데.”
“흐음…….”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표정이 시원찮네.”
“……아뇨, 별로.”
뭐지? 내가 촬영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내게 딱 달라붙어 있던 다슬이 맞은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하하…….”
맞은편에 있던 또 다른 여성.
윤화정이 그런 그녀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두 분이 무척 친하신가 봐요.”
“친하죠. 화정 씨보다 훨씬 더.”
“네? 아, 네에…….”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날이 선 다슬의 말투에 깜짝 놀란 내가 속삭였다.
”야, 너 왜 그래?“
”뭐가요?“
”뭐긴 뭐야. 왜 그렇게 뿔이 나 있냐고.“
”저는 스킨십 하면 안 돼요?“
”뭐?“
갑자기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이게.
황당해하는 날 향해 다슬이 뚱한 표정으로 쏘아 붙였다.
”저 분이랑은 잘 하던데. 저랑 할 때는 뭔가 불편해 보이네요.“
”대체 무슨 소리야, 너?“
”왜요? 제가 이러면 귀찮아요?“
”허 참.“
뚱한 채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내 등 뒤로 자신의 가슴을 압박하는 다슬.
그런 다슬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설마 질투하냐?“
확실히 이번 촬영의 컨셉이 집 앞에서 하는 운동 느낌이라 서로 몸이 많이 부딪힌 감이 있다.
하지만 그거야 성적인 접촉도 아니고 방송일 뿐인데.
”질투는 무슨……. 아무튼 이제 집으로 갈 거죠?“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리는 다슬의 모습에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여기서 웃으면 진짜로 삐지겠지.
“가긴 가야지. 그런데 너 구경은 다 했어?”
“볼 건 다 봤어요. 그냥 빨리 가요.”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끙…….”
내 말에 다슬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심지어 신음소리까지 내면서.
내가 계속 여기 있는 게 그 정도로 불안한 걸까?
꿈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알았어요. 어쩔 수 없지.”
아까까진 연예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방방 날뛰던 애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니 불안할 지경이다.
솔직히 방송용 재미를 위해서 좀 오버한 면도 있었는데.
다슬로서는 거기까진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그럼 빨리 인사하고 와요. 기다릴 테니까.”
“먼저 가도 되는데.”
“정 없는 소리 하지 마요, 진짜.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거 참.”
“아까 거기서 기다릴게요. 빨리 와요.”
뭐, 그건 나중에 설명하면 되겠지.
이런 모습 보는 게 좀 재밌기도 하고.
나는 툴툴거리며 멀어지는 다슬을 뒤로 한 채 다시 화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고했어, 오빠.”
그런 날 보며 화정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미 촬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된지는 오래.
순간적으로 이런 모습 때문에 다슬이 질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 촬영이라 오빠도 많이 긴장했을 텐데. 그런 것 치고는 잘 하더라.”
“이제 오빠 소리는 입에 붙었구나.”
“싫은 건 아니지?”
“싫을 리가 있나. 아무튼 화정이 너도 수고했어. 넌 더 촬영하는 거지?”
“응. 오늘 하루가 그냥 ‘너 혼자 산다’ 촬영이라서.”
“힘들겠다.”
“아니야. 그냥 평소대로 생활하는 걸 찍는 것뿐이니까. 조금만 신경 쓰면 그다지 불편할 것도 없어. 집에서는 카메라맨 하나 없이 촬영해서 오히려 촬영인지도 까먹을까봐 걱정될 정도인걸.”
“그렇구나. 그럼 나머지는 집에서 찍는 거야?”
“응.”
“그래.”
“…….”
“…….”
화정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듯싶다가도 이런 식으로 불현듯 말이 뚝 끊기곤 한다.
왜 이런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 입을 닫은 채 한동안 가만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저기.”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화정이었다.
슬쩍 날 곁눈질하며 화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촬영 끝나고 나면 우리 또 볼 수 있는 거지?”
“당연하지. 전에도 그렇다고 말했잖아.”
“응…….”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화정이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런 화정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기, 그러면…….”
“오, 아직 안 갔네.”
다시 한 번 화정이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작스레 등장한 3자의 출현에 그녀의 말은 다음 기회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어때요, 현수 씨? 촬영은 좀 할 만 했고?”
“아, 네. 피디님 덕분에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껄껄 웃으며 피디가 내 어깨를 작게 두드렸다.
호탕한 웃음을 지은 피디가 돌연 날 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말인데, 혹시 이 방송 좀 더 출연할 생각없어? 2회분으로 말이야.”
“네? 저는 야외촬영만 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뭐, 그렇긴 한데 현수 씨가 워낙 적응을 잘 해서 말이야. 둘이 티키타카도 아주 잘 맞고. 집에 가서 같이 친구끼리 노는 형식으로 찍으면 좋을 것 같더라고.”
이건 전에 들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인데.
그보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진행해도 되는 건가.
“그건 회사하고 상의를 해 봐야 될 거 같은데요.”
“뭐 어때. 지금 현장에서 당사자랑 얘기하는 거잖아. 대표한테는 내가잘 얘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지만.”
“출연료는 2.5회분으로 줄 거야. 생각 있어?”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이건 무조건 해야지.
참고로 2.5회분이면 이미 천만 원이 넘어간다.
물론 지분은 내 소속회사인 ‘피버샵’도포함이 되기에 내가 가져가는 건 400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상당한 금액임은 틀림없다.
심지어 연예계에서 활동이 전무한 나에게 이 정도 조건은 분명히 파격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분야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루만에 400을 벌 수 있다니.
진짜 원래 세계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수준이다.
“좋아. 대답이 시원시원하네. 계약서는 가면서 작성하자고. 작가가 나중에 전달해줄 거야.”
“아, 예.”
“그럼 화정 씨 집에서 보자고.”
본론을 전하기 무섭게 할 일을 하러 돌아가는 피디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맞은편에 있는 화정을 향해 물었다.
“저기, 화정아.”
“아, 응.”
“방송 일이란 게 원래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진행되는 거야?”
“그렇진 않은데……. 그냥 저 피디분이 좀 즉흥적인 분이셔서 그렇지 않을까.”
“지금 상황이 일반적이진 않다는 거지?”
“으, 응.”
나름대로 연예계에서 일하고 있는 화정도 지금 같은 경우는 잘 보지 못한 모양이다.
화정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정도로 내 예능감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외모 때문인 걸까.
뭐……. 당연히 후자겠지.
“그, 그럼 난 먼저 준비해야 돼서.”
“아, 그래. 빨리 출발해.”
“응. 조금 있다 봐, 오빠.”
익숙한 매니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나는 화정과 헤어졌다.
뭐, 그래봤자 금방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장소는 작가님이 톡으로 알려주실 테고.
"그럼 나도 빨리 움직일까."
나는 서둘러 일행인 다슬을 향해 움직였다.
저 멀리 보이는 다슬의 실루엣에 내가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야, 최다스…….”
허나 그것도 잠시.
나는 다슬과 대치한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에 말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설마…….
쟤도 여기 온 건가?
“똑바로 말해.”
내가 빠르게 다가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이 큰 목소리로 싸우는 게 들렸다.
“너 현수랑 무슨 관계야?”
“그러니까 그걸 그쪽한테 왜 말해줘야 되는데요?”
“그쪽? 야, 딱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존댓말 안 해?”
“별……. 꼰대 새끼 다 보겠네.”
“뭐? 꼰대 새끼? 너 말 다 했어?”
“그래. 말 다 했다 이 꼰대 년아. 왜? 꼽냐?”
“이 기지배가 진짜……!”
“늙다리 주제에 오빠한테 꼬리치지 말고 좀 꺼져. 갑자기 튀어나와서 웬 지랄이야, 지랄이.”
“야, 이……!”
”오케이.“
번쩍 손을 든 그녀의 오른손을 가까스로 잡았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둘 다 거기까지.”
“오, 오빠?”
“혀, 현수야.”
“하아.”
지끈지끈 아파오는 골을 느끼면서.
나는 또 다른 내 파트너, 주화연을 바라보았다.
“넌 또 왜 여기 있냐.”
“그, 그게…….”
당황한 화연, 그리고 그 곁에는 잔뜩 뿔이 난 다슬의 모습.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벌써부터 아수라장의 예감이 드는군.
한 손으로는 치켜든 화연의 손을 잡은 채 나는 남은 한 손으로 핸드폰의 시간을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다음 촬영까지는 시간이 좀 남은 상황.
즉, 적어도 수습할 시간 정도는 있다는 거다.
근처의 벤치를 가리키며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저기서 얘기 좀 하자.”
쉬운 하루일 거라고만 생각했건만…….
안타깝게도 그렇진 않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