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8. 연예계의 사정(6)
화정의 매니저가 헐레벌떡 들어온 뒤로 상황은 착착 정리되었다.
“한동안은 만나지 않는 걸로 하지.”
우선 방송에 출연하기 전까지 나와 화정의 만남은 일시적으로 중지.
물론 같은 회사 건물에서 일하는 만큼 아예 안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회사 밖에서 사적인 만남 같은 게 중지된다는 거다.
“자네로서도 그 편이 나을 테고.”
“그렇게 하죠.”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어차피 이런 조치도 며칠 뒤 촬영하게 될 방송 이후까지일 뿐이고.
다음으로 논의가 된 건 몰려들 각종 매스컴에 관한 처리 건이었다.
허나 내 예상과 달리 이 건에 대해서 대표와 비서장의 반응은 다소 싱거웠다.
“방송 출연으로 얘기를 나눈 거라고 하면 금방 넘어갈 테지.”
곧 예능에 동반 출연하게 된다면 대중들의 관심도 금방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방송 출연 때 큰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다.
두 사람은 그리 설명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거면 아까 매니저한테 깽판은 왜 부렸데?
이해가 안 되네.
모든 논의가 끝나자 대표가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너는 앞으로 화정이 관리 잘 해. 내가 특별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는 거니까. 알았어?”
“네, 네!”
“나가 봐.”
방금 전 코앞에서 해고라고 외쳤던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뻔뻔함도 저 정도면 예술의 경지다.
뭐, 아무튼 중요한 논의는 이걸로 끝이다.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럼 저도 이만.”
“잠깐.”
자리를 떠나려는 나를 붙잡은 건 비서장 이우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할 말이 있습니다.”
“저는 할 말 없는데요.”
“…….”
어우, 자꾸 그렇게 째려보다가 얼굴에 구멍 나겠어.
“그럼 가보겠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대표가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 건지 모르겠군.”
“까불다뇨?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한 것뿐인데.”
“흥. 입만 살았군, 계약해지 안 한 걸 다행으로 알아.”
“그쪽에서 해지하면 계약금 5배로 물려주는 거 아닌가요? 저야 손해 볼 거 없는데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네놈……. 앞으로 지켜보겠어.”
“네. 그러세요.”
“건방진 새끼…….”
어우, 저 무시무시한 얼굴 봐라.
여기 더 있다가는 저 근육에 뼈도 못 추리고 나가떨어지겠다.
정말로 한 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재빨리 회의실을 나왔다.
“아.”
회의실을 나오기 무섭게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여성이 몸을 홱 일으켰다.
“아, 저, 그게…….”
우물쭈물 거리던 것도 잠시.
추레한 몰골의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화정의 매니저, 김지수가 날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살짝 빨개지고 부어오른 눈가와 부스스한 머릿결, 제대로 닦지 않아 흐릿한 안경알.
참으로 처량한 모습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됐어요.”
곧이어 고개를 들며 쭈볏쭈볏 눈치를 살피는 지수 씨의 모습에 피식 웃고야 말았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역시 현수 씨가 도와주신 거죠? 제가 다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음, 그거야 뭐.”
참고로 비서장과 사장의 관계를 알고 있는 건 지금으로써는 나 하나뿐.
사실 그 전에 화정 씨가 옆에서 내 폭탄발언을 듣긴 했지만,아마 뭔 소린지 이해도 못하고 있을 확률이 컸다.
워낙에 정신이 없어 보이는 상태였기도 했고.
뭐, 나도 아무한테나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후우, 아까 끝이란 소릴 들을 땐 진짜 좀……. 그렇더라고요.”
안도의 한숨을 쉰 지수 씨가 말을 이었다.
“언니랑 같이 일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눈앞이 새까매져서…….”
“잘린다는 말 듣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특히 언니 옆에서는 기왕이면 오랫동안 일하고 싶거든요.”
언니라면 윤화정을 말하는 거겠지.
서로 언니 동생 할 사이라면 상당히 각별한 사이일 듯싶다.
역시 안 잘리도록 내가 나선 게 정답이었네.
“그런데 화정 씨는요?”
내 물음에 흐릿했던 그녀의 눈빛도 차츰 원래대로 돌아왔다.
슥슥 안경알을 닦으며 그녀가 말했다.
“아, 방금 식당에서 밥 먹고 지금은 휴게실에서 쉬는 중이에요.”
“아직도 회사에 있어요?”
“가기 전에 현수 씨 얼굴 좀 보고 간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나중에 봐도 될 걸…….”
굳이 나 하나 때문에 여태껏 회사에 있었던 건가.
몸 상태도 상당히 안 좋아 보이던데.
“앞으로는 밖에서 얼굴 마주치기 쉽지 않을 테니까요.”
이미 회의실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지수 씨가 대충 전달했나 보다.
앞으로의 대처를 결정할 때 화정은 자리에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인사 정도는 하고 싶데요. 제가 그만하고 가자고 해도 말을안 들어요.”
“고집이 세네요.”
“저희 언니가 좀 그래요.”
지수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큰일 났어요, 지금.”
“큰일이요?”
“실은 아까 밖에 나갔을 때도 이미 장난 아니더라고요.”
“뭐가요?”
“벌싸 기자들이 진 치고 입구에 쫙 서 있던데요.”
그건…….
꽤 골치 아픈데.
“돌아갈 수는 있으려나 모르겠네.”
“현수 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리자 지수 씨가 괜한 걱정이라는 듯 말했다.
“아무리 기자라도 일반인한테 카메라를 들이댈 수는 없잖아요. 방송에서 현수 씨 얼굴이 제대로 공개된 것도 아닌데. 스캔들 주인공이라고 직접 말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저쪽도 별 신경 안 쓸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렇다 해도 화정 씨가 많이 피곤하겠네요.”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봐야죠!”
그리 말한 지수 씨가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이럴 때 매니저가 나서는 거 아니겠어요?”
방금 전까지 시무룩해져 있었음에도 그리 말하는 지수 씨.
금방 기운을 차리는 걸 보아하니 씩씩한 성격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미 눈물자국 선명하게 있는 걸 본 입장이라서 말이지.
“제가 좀 더 잘 처신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에 지수 씨의눈이 동그래졌다.
뭐, 지금 씩씩하게 구는 저 모습은 분명 허세겠지.
쾌활한 척 해도 아마 마음고생이 심할 것이다.
매니저인 그녀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여러모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괘, 괜찮죠, 당연히!”
자신을 신경써줄 거라곤 생각 못한 건지 매니저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다 방송 때문에 가진 만남이었잖아요.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따지고 보면 언니가 자기관리 못한 잘못이기도 하고.”
그래도 계속 이렇게 말하는데 또 계속 신경 쓰는 것도 예의가 아니려나.
일은 벌어졌고, 매니저의 본분은 담당 연예인을 케어하는 거니까.
“음……. 알겠습니다.”
매니저도 매니저지만 지금은 나와 화정의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 일단은 내 일부터 똑바로 하자.
생각을 정리한 내가 말했다.
“나중에 일 정리되면 화정 씨랑 같이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아, 그리고 화정 씨 너무 혼내지는 말고요.”
“서, 설마요. 아무튼 현수 씨는 언니랑 이야기하고 오세요! 저흰 어차피 언니는 반나절 정도는 있어야 해서!”
“지수 씨는요?”
“전 안에서 적당히 시간 때우면 되니까요! 그럼 이만!”
“잠까…….”
그리 말하며 쪼르르 사라지는 매니저.
마치 도망치는 것 마냥 쏜살같이 사라지는 지수 씨의 뒷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렇게 뛰어다니는 거 보면 나름 기운은 있어 보이네.
보아하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다.
그럼 다음은 화정씨 차례인가.
나는 화정이 있다고 한 휴게실로 향했다.
“화정 씨?”
“아…….”
휴게실 구석에 앉아있던 화정이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현수 씨…….”
누가 봐도 수척한얼굴의 윤화정.
그래도 밥을 먹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사무실에서의 핼쑥했던 얼굴보다는 한층 나아진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아까 안색이 너무 안 좋던데.”
“네. 밥 먹고 약 좀 먹으면서 쉬니까 괜찮아졌어요.”
“다행이네요.”
“네에…….”
“…….”
주변에는 나와 화정 뿐.
허나 그럼에도 우리는 괜히 주변 눈치를 살피며 서로의 언동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뭐, 하필 그런 상황이 터져버렸으니까.
일단 여기는 정조역전세계다.
거기에 더불어 화정은 주위 눈을 신경 써야 하는 연예인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남자한테 술을 먹였고 그게 기사가 났다?
누구라도 입을 열기 쉽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하물며 거의 가해자 취급 받을 터인 화정이라면 더더욱.
역시 여기서는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겠지.
“저기…….”
“지수한테 대층 얘기는 들었어요.”
허나 그런 내 예상과 달리.
죄스러운 표정과는 별개로, 화정은 똑바로 날 바라보며 먼저 말문을 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날 보던 화정이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현수 씨가 없었다면 저는 아끼던 동생도 놓치고……. 아무 대꾸도 못한 채로 회의실을 나와야 했을 거예요.”
화정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사실 오늘 화정이 보여준 태도는 나도 느끼는 바가 컸다.
따지고 보면 이번 사태의 주범은 나와 화정, 서로 반반이라고 해야 될 상황이었다.
아무렴 스타인데 파파라치가 없겠는가.
나나 화정이나 그걸 알고 있었고, 그냥 서로가 조심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화정의 탓으로만 치부하고 있었다.
그것도 오로지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당사자도 그런 부조리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제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결국 이 세계는 ’역전‘세계라는 것을.
이 세계는 여자가 불합리함을 겪는 세계라는 것을.
“하지만 현수 씨가 나서준 덕분에 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어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화정이 말을 이어갔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오늘 일은 절대 안 잊을게요.”
“아니, 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화정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처음에는 최고의 세상이라 여겼는데, 막상 나만 득을 보고 있는 상황이 되니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느낌만 들 뿐.
이 세계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여성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지금의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거저 받은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살아가는 나로서는 더더욱.
“부탁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 때는 제가 힘이 되어드릴 테니.”
평소라면 저런 말을 듣고 일부러 성적인 농담이나 툭 던졌을 터.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런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도망치듯이 나는 화제를 돌렸다.
“어, 그보다……. 저희 내일부터는 못 보게 됐네요.”
“그렇네요.”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화정이 아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방송 출연 마치고 나면 또 술 마실 수 있는 날이 오겠죠?”
“네. 아마도…….”
“그래도 좀 아쉽다. 재밌었는데.”
“그러게요.”
일부러 넉살 좋게 말하는 나와 달리 화정은 짧게 대답할 뿐.
평소와 다르게 한층 더 차분한 모습에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따.
“…….”
“…….”
다시금 이어지는 침묵 속.
휴게실에 다소곳이 않은 채로 그녀가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뭐야, 이 분위기.
겁나 어색하네.
“저기, 그럼 전 이만…….”
평소라면 야한 농담이나 하면서 사이를 틀 터인데 어째 느낌이 영 아니다.
화정 씨도 평소와 다르게 많이 처진 느낌이고.
묘한 표정의 화정을 향해 손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현수 씨.”
휴게실을 나가기 전 화정이 나긋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 네.”
“나중에요. 이번 일 다 끝나고 나면…….”
시선은 나를 향한 채로, 양손을 모은 채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화정.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음에도 술 같이 마시면서 얘기……. 할 수 있을까요?”
“네. 방송 끝나면 그러기로 했잖아요.”
“네? 아, 아아! 마, 맞다. 아하하, 그랬죠.”
그리 말한 화정이 부끄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하지만 이번에는 일 때문에 만난 거였잖아요.”
“그렇긴 하죠.”
“제 말은 이후로도 개인적으로, 심심하면 가끔 연락하고, 술도 마시고, 뭐, 그런 거 말하는 거죠…….”
“저야 나쁠 거 없죠.”
“……정말요?”
“당연하죠. 연예인 친구라니, 제가 다 영광인걸요.”
“친구…….”
내 말에 화정의 표정이 화악 밝아졌다.
”친구, 친구…….“
친구라는 단어를 몇 번씩이나 중얼거리는 화정.
그러더니 쑥스러운 듯 작게 웃었다.
원래 세계의 의미대로 ’여성스럽다‘는 건 여기서는 칭찬이 아닐 테지.
하지만.
“후후, 좋네요.”
화정은 말 그대로 여성스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 일단 기운은 차린 거 같고.
너무 오래 붙어 있어봤자 좋을 건 없으니 지금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그럼 정말 가볼게요.”
“아, 네!”
그제서야 후련한 표정으로 화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리고요. 이런 상황이 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톡하는 건 상관없겠죠?”
“뭐……. 저희끼리 조심한다면 그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요?”
“네! 그럼 연락할게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화정이 손을 흔들었다.
이제와 이런 말 하는 게 새삼스럽긴 한데…….
언제 봐도 웃는 게 참 예쁜 사람이구나.
아무튼 급한 불은 껐으니 돌아가 볼까.
그렇게 화정과 인사를 끝낸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흠흠~♬”
이때까지는 나름대로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뭐, 실제로 잘 풀린 게 맞긴 했다.
하지만 진짜 재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이때의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