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7. fever time(10) (69/152)



〈 69화 〉7. fever time(10)

연주의 동료들을 만난 첫날은 그 뒤로  일 없이 지나갔다.

잠깐 안무연습을 하는걸 보긴 했지만 뭐…….
열심히 하는  알겠는데 솔직히 계속 보고 있어봤자 똑같은 안무의 반복일 뿐이고.

그렇게 그 날은 곧바로 퇴근.

그리고 다음날.

“출연하겠습니다.”

회사로 도착하기 무섭게 나는 곧장 비서를 찾아 말했다.

집으로 돌아간 뒤 침대에 뒹굴거리며 몇 시간을 고민했다.
과연 내가 예능에 출연해도 괜찮은 것인지를.

결과적으로 내가 손을 든 쪽은 출연 쪽.

왜냐고?
재밌을 것 같으니까.

그 생각 하나만으로 모든 우려는 반쯤 뒤로 밀어놓게 되어 버렸다.

물론 출연 시의 패널티도 충분히 감안하고 있다.
혹여나 너무 인기를 끌게 된다면 귀찮게 되어버릴 터이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세계에서 즐길  있는 내 섹스 라이프는물 건너가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겨우 예능 한 번 출연하는 것뿐인데 유명해져 봤자 얼마나 유명해지겠는가?

안일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솔직히 예능 한  출연에 연예인 급으로 유명해지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출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고.

“좋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비서장이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빠르게 결정하셨네요.”
“뭐, 경험도 쌓을 겸 한 번 정도는해볼 만하다 싶어서요. 그리고…….”
“출연료 말이죠?”

눈치 빠르게 내 의도를 알아챈 비서장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출연료도 어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사실 출연 목적은 이게 가장 크다.
돈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지.

“그럼 여기에 싸인을.”
“아, 네.”

빠르게 서로의 생각을 확인한 뒤로는 절차를 밟는 일만 남았다.

나는 비서장에게 설명을 들으면서 그가 내민 각종 출연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거기에는  이 주에 달하는 출연 계획과 불이행 시 위반사항, 기타 항목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중에서도 내가 가장 눈여겨본 부분은 바로 출연료.

방영 기준으로 2회 출연하는 것만으로 상하차 아르바이트  치에 달하는 금액을 일시불로 받을 수 있었다.
금액으로 따지면 400만 원 이상.

이런 건 원래 세계나 여기나 다를 바 없구나 싶다.

“여기 받으시죠.”

싸인을 마친 계약서를 건네주자 비서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출연도 결정했으니 바로 준비를 하면 되겠네요.”
“뭐부터 하면 될까요?”
“일 해야죠, 일.”

확실히 어제는 아무것도 안 하고 회사 구경만 했지.
그러고도 근로계약서를 쓰고 하루 일당을 받은 참이고.

솔직히 이건 아무리 나라도 양심에 찔렸던 참이었거든.

“여기 출입증입니다.”

나는 비서장이 건넨 카드를 받았다.
회사명이 큼지막하게 적힌 카드의 앞면에는 내 이름과 함께 ‘파견직’이라는 상태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말도 없이 물끄러미 출입증만 바라보는 날 보며 비서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나요? 출입증에 문제라도?”
“아뇨, 그런  아니고. 월급은 여기 본사에서 받는 건가요?”
“네. 그렇죠.”
“왜요?”
“네?”
“파견직이면 저는 본사가 아니라 ‘피버샵’ 소속이라는 얘기 아닌가요? 그런데 왜 본사에서돈을 주는 거죠?”

내 지적에 비서장이 말문을 멈추었다.

“…….”

찰나에 지나지 않은 시간.
나는  순간 비서장이 돌연 싸늘한 눈빛을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경우도 있는 겁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곧이어 예의 미소 짓는 표정으로 돌아온 비서장이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회사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죠.”
“그런가요?”
“네. 신경 쓰지 말고 일만 열심히  주시면 됩니다. 보수는 정상적으로 지급될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흠, 조금 수상한데.

아마 이 사람도 이런 저런 비리에 얽혀있을 것이다.
반응도 반응이고, 무엇보다 회사의 오른팔 정도는 되는 인물이니 모를 리가 없다.

뭐, 일단은 돈만 제대로 준다면  상관은 없지만.

“그보다 일적인 얘기로 돌아가서…….”

냉담한 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는 비서장.

능청스레 화제를 돌리는 비서장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나는 이 회사에 온 본 목적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하지만 뭐…….
벌써부터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부분은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네. 그리고 오늘은 우선…….”

나는 비서장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들을 계획했다.

일단은 추이를 지켜보고.
그러면서 겸사겸사 즐겨볼까.


***


그래서 지금부터 하게 되는 일이 뭐냐?

뭐, 사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야, 끝이다!”
“다들 고생했어요!”

총괄 PD의 선언과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쁨을 표출했다.
웃거나, 박수를 치거나, 크게 기지개를 켜는 식으로.

“수고하셨습니다.”

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스태프  동료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현재 내가 참여한 일은 지방방송에 나가는 간단한 고깃집 CF 촬영.
피버 에이전트 쪽의 인원들이 상당수 파견되었으나 딱히 연예인이라 불릴 법한 사람은 없는, 그냥 무난한 촬영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 등장하는 수많은 단역 중  명.
수십에 달하는 인원에 묻히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다행히 내 외모는 그다지 눈에띄지는 않는 듯했다.

“현수 씨.”

대충 인사를 마치고 현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무대 뒤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가 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생하셨어요.”
“네. 조감독님도요.”
“에이, 감독님이라 부르지 말라니까요.”

내 말에 사내가 민망한 듯 손사래를 쳤다.

“그냥 직급으로 불러줘요. 팀장님이랑 헷갈리니까.”
“그럼 허 대리님이라고 부를게요.”
“네. 그게 저도 편하고 좋네요.”

내가  대리라 부른 사내, 허선우가 그제야 안심한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좀 더 이른 시간에 나오셔야되는 거 알고 계시죠?”
“넵.”
“좋아요.”

 빠릿빠릿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리님의 표정이 한층 풀어졌다.

참고로 오늘 회사에서 빈둥거리지 않고 나올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눈앞에 있는 동글동글한인상의 대리님 덕분이었다.
비서실장의 말만 듣고 다른 지망생들과 함께 멍하니 대기실에 있던 나를 눈여겨보고 뽑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일도 오늘 끝난 CF촬영을 이어가는 건가요? 하루 만에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렇게 됐네요.”

내 질문에 마치 한숨을 쉬듯 대리님이 말을 이어갔다.

“외주면 돈값 아낀다고 그러긴 하는데…….위에서 월급쟁이인 저희를 가만 둘 생각이 없는 거 같아요. 최대한 꼼꼼하게이것저것  만들어 보고 직접 본 뒤에 결정한다는군요.”

이런작은 지방 방송 CF마저 일일이 확인하는 건가.
비리를 저지르는 회사인 주제에 이런 데는 꼼꼼하게 파악하나 보네.

“참 대단한 분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대리님이 슬쩍 주변 눈치를 살폈다.

“현수 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누구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희 회사 비서장님 말이에요. 딱 봐도 젊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나이에 수행비서를 할 정도면 분명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데.”
“그런가요. 저야본사도 어제 온 상황이라 잘 모르겠네요.”
“엄청 대단한 거예요. 심지어 나이도 젊고. 서른은 넘었으려나? 아니, 아니다. 그래도 대표님 옆에서 수행비서  정도면 서른은 넘었겠죠?”
“그, 글쎄요.”
“아니, 얼굴만 보면 역시 이십대 후반 정도인데…….”

어느새 가십거리를 줄줄 읊는 대리님.
이미 내 대답은 반쯤 추임새에 가까웠다.

“현수 씨는 어떤 거 같아요?”

호기심 가득한 대리님의 눈빛에 직감했다.

젠장.  시작이네.
내가 이래서  세계 남자들과는 대화를 잘 하지 않으려는 건데.

“뭐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내 태도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찰나.
기어코 신이 난 대리님이 마음껏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비서장님 나이 말이에요. 얼굴만 보면  쳐도 이십 대 후반일 거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여친은 있으려나? 혹시  들은  없어요?”
“모르죠, 저야…….”
“연예인도 아닌데 그렇게  생긴 거 봐요. 분명 여자  만나고 다녔을 걸요?”

이 세계에 와서 느낀 위화감 중 하나.

그건 바로 이 세계의 남자들은 연예 및 각종가십거리를 너무나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물론 원래 세계의 남자들도 가십거리 정도는 종종 얘기한다.
허나 그걸 감안해도 여기 세계의 남자들은 좀 지나치게 까놓고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까놓고 말이죠. 남자가 여자 너무 만나고 다니면 너무 싸 보이잖아요.”
“아니, 그건…….”

이 세계에서 딱히 남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유도 이런 부분에 있었다.
특히 동성끼리 대화할 때는 왜 이렇게 입이 가벼워지는 건지.

“확실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계속 이런 소릴 듣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직설적으로 뱉었다.

“그리고 당사자도 없는데 그런 얘기를 가볍게 꺼내는 건 좀…….”
“에이, 당연히 가정이죠, 가정.”

공감하지 않는  모습에 대리님이 움찔 몸을 떨더니 시치미를 뗐다.

“설마 진짜로 그렇게 만나고 다니진 않겠죠. 그리고 이런 얘기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현수 씨도 내숭은.”

방금 전까지 좋았던 허 대리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허 대리를 비롯해 사람이 좋은 듯한 남성들마저도 꼭 이런 식으로 스스로 점수를 까먹는 짓을 스스로 해내고야 만다.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면 나았겠다,

“죄송합니다. 약속이 있어서.”

나는 정신이 팔린 허 대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딱히 도움도 안 되는 이런 정보를 계속 듣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내일 늦으시면  되는 거 아시죠? 어쩌면 현수 씨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중요한 역할이요?“
”자세한  내일 말씀드릴게요. 아직 정해진  아니라서요.“
”알겠습니다.“

내일 말해준다니까 내일 들으면 되겠지.

인사를 마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촬영장을 나섰다.

사실 이런 가십거리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지금의 나는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이런 사생활 부분까지 파고들어봤자 법적으로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 싶단 말이지…….

”후…….“

겨우 혼자가  시점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피곤하네…….“

어째 본사에서 일을 시작한 뒤로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일이야 당연히 어려울 게 없다.
시키는 것만 하면 그만이니까.

허나 하필이면 컨셉이 섹스어필이니 머니 해서 남자만 바글바글했다는  문제다.
덕분에 오늘 하루 동안 본의 아니게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어야 했으니까.

어째 일하는 것보다 이런 게 더 피곤한 거 같기도 하다.

특히 남자들과 부대낄 일이 많은 사회생활은 더더욱.

군대에서도 이렇게까지 선임 뒷담을 까거나 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여기 남자들은 왜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를 좋아하는 걸까?

뚜루루.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품에서 울리는 핸드폰.
누군지 짐작이 가기에 액정을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에요?“

그러자 툭 튀어나오는 특유의 까칠한 말투.

평소라면 한 마디 했을 터이건만 지금은 어째선지 말투조차도 반갑게 느껴진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어디긴요, 아직 회사 앞이지.”
”뭐 한다고 아직 거기예요? 빨리 와요. 촬영장 여기서 별로 안 멀다면서요.”
”아, 예에. 가니까 그만 보채요.”
”제가 언제 보챘다고……!“

뚝.

이후의 말은 듣지도 않고 중간에 통화를 끊었다.
 참, 성격 드럽게 급하네.

나는 곧바로 피버 에이전트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곧이어 회사 입구에 도착하자 씩씩거리며  있는 익숙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아, 왜 말하는데 끊어요!“
"아, 네.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를 향해 발을 동동 구르며 분통을 터뜨리는 이연주.
역시 놀리는 맛이 있는여자라니까.

“어우, 진짜!”

내 능청맞은 대꾸에 연주 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웃긴 뭘 웃어요!”
“거 참, 이래봬도 최대한 빨리  거예요. 자꾸 꼽 주지 마요.”
“꼽이라뇨!”

여느 때와 같이 만나자마자 평소처럼 투닥이는 나와 연주.
그보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저기, 연주야. 그런 말투는 좀…….“

투닥거리는우리를 어쩔 줄 몰라하며 바라보는 여성.
그 모습을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잠깐. 이 분은…….
설마 같이 온다는 게 이 사람이었어?

“됐고, 인사나 해요.”

쯧, 하고 고개를 차며 연주 씨가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군지는 알죠?”
“모를 수가 없지…….”

얼핏 봐도 단정한 스타일의여성.
하지만 외모와 분위기에서 이미 단정함을 넘어선 우아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나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니,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안녕하세요. 현수 씨 맞으시죠?”
”아, 네에…….“

꾸벅 고개를숙이는 그녀를 향해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김현수입니다. 그, 윤화정 씨……. 맞죠?“
”네. 저 아시네요?“
”모를 수가 없죠……!“
”아하하.“

싱긋 웃으며  생머리를 살살 넘기는 그녀.
가벼운 몸짓 하나조차도 마치 그림처럼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발라드 가수.
그런 그녀가 내 눈 앞에서 싱긋웃고 있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놀고 있네.“

갑작스런 거물의 등장에 멍하니 바라보는 날 보며, 연주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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