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7. fever time(5)
소진과 정사를 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모델 일에 들어가기 전, 사무실에서 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하겠다는 건 당연히 전에 말했던 본사로의 파견 건을 말한다.
내 대답에 패션몰 대표 최수민은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연주 씨와 본사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퇴근은 거기서 하면 됩니까?”
“네. 일단은 파견이긴 해도 사실상 본사 쪽에서만 일 보시면 되니 이쪽 사정은 크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미리 처리해둘 테니 거기서 바로 퇴근하시면 될 겁니다.”
덤덤하게 말하는 듯해도 대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더 무거웠다.
사실 단순히 내 느낌일 뿐이지만.
뭐, 사실 이것도 이연주에게 대표의 일을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설명하는 대표지만……. 아마 속은 타들어가겠지.
연주의 말에 따르면 본사의 정치 싸움에 질려 아이돌도 포기했다고 들었으니까.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이런 한직에서 패션몰 대표로 일하고 있으니,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돌 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수 년 간의 연습생 생활을 포기하고서 갑자기 패션몰 대표를 한다는 건 분명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분명 지금 대표의 자리로 오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그렇게 마음가짐을 다잡았다고 해도 아무나 패션몰 대표를 할 수 있는 건 또 아닐 터.
운영을 위해서는 당연히 그에 대한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 한 달간 알바를 하는 동안 수민은 계속해서 일감을 물어오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나는 물론이고 후배인 김진아, 동료이자 본사 연습생인 이연주 모두가 바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수민을 몰아낸 본사의 윗대가리들도 그녀의 능력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 거다.
적어도 머저리들은 아니란 거겠지.
하지만 고작 후배 직원 한 명을두고 막 사이트를 개설했을 뿐인 패션몰의 대표라니…….
말이 대표지, 사실상 빚 좋은 개살구 신세가 아닌가.
“흠…….”
대표 앞에서 고민하는 척 하면서 머릿속의 정보들을 정리했다.
지금의 나는 나름대로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바로 본사의 비리에 대한 소설 속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지만 무기를 쥐고 있다고 해서, 그걸 효율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다.
물론 소진의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사가 돌아가는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소설 속에서는 자회사인 피버샵에 관한 묘사가 거의 없었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이 곳이 현실과 합쳐진 세상이라는 것.
그런 만큼 반드시 소설 속 전개대로 흘러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직접 내 두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본사 쪽 인간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상황을 겪어 본다면, 이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굳이 연예계에 발을 담글 생각이 없음에도, 대표의 말을 받아들여 본사로 파견을 가기로 결정한 이유였다.
뭐, 애초에 비리가 있는 회사가 제대로 운영될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무슨 일을 하실지 많이 걱정되나 보군요.”
사실 내 걱정보다 그 쪽 생각을 더 했는데 말이지.
물론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괜찮습니다. 본사에서도 많은 걸 바라진 않을 테니까요.”
내 심정도 모른 채 입꼬리를 올린 대표가 말을 이었다.
“알바인 걸 알고 있으니 현수 씨도 그 정도로만 여기고 일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애초에 열심히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의 나는 본사의 사장이 지닌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니까.
물론 적당히 밥값은 해야겠지만 말이지.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글쎄요.”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사실 궁금한 게 있긴 했는데…….
이런 걸 물어봐도 되려나 모르겠네.
흠, 뭐든 물어봐도 된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저, 이것도 관련된 질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요. 궁금한 게 많으시겠죠.”
슬쩍 눈치를 살피며 바라보자 작게 미소를 짓는 대표.
오늘은 기분이라도 좋은 걸까.
평소와 달리 자주 웃는 거 같네.
“괜찮습니다. 물어보시죠.”
“아, 네.”
마침 대표의 기분도 좋아 보이고 타이밍도 딱 지금 말고는 없을 거 같네.
이렇게 된 거 한 번 물어나 보자.
“저, 대표님은 전에 본사에서 연습생 활동을 하셨다고.”
그 순간.
마치 몸이 굳은 것 마냥 수민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네?”
수 초 정도 정적이 흐른 뒤 단말마를 내뱉는 수민.
미소를 짓던 입가가 살짝 경련하며 순식간에 어색한 표정으로 변했다.
……역시 괜히 물어봤나?
“어? 아닌가요?”
“아, 아, 아니……!”
벌떡!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수민 대표.
어느새 잔뜩 새빨개진 얼굴로 변한 대표가 소리쳤다.
“혀, 현수 씨가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아, 연주 양이 저번에 얘기해 주던데요. 딱히 비밀도 아니라고 하던데.”
“읏! 그, 그거야 그렇긴 한데…….”
“혹시 말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털썩.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대표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어쩌다가 그런 소문이…….”
미간을 쥔 채 중얼거리는 그녀의 표정은 다소 복잡한 모습이었다.
으음, 설마 이런 식으로 대표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실수한 건 아니겠지?
“혹시 제가 말실수한 거라면 사과드리겠…….”
“아,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려는 나를 본 대표가 당황해서 손을 휘저었다.
오늘따라 감정표현이 풍부하시네.
“따, 딱히 현수 씨가 잘못한 건 아닙니다! 그저 제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질 뿐이라……. 정말 괜찮으니 앉아 주세요.”
“아, 네.”
“후우…….”
자리에 앉자 대표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약 1분 정도 침묵이 흘렀을까.
“저…….”
고개를 든 수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굴에는 아직도 옅게 홍조가 피어나 있었다.
“어차피 현수 씨도 알게 되셨으니 짧게나마 얘기를 하자면…….”
거기까지 말한 대표가 잠시 뜸을 들였다.
저렇게 조마조마하게 말하니까 괜히 나까지 두근거리네.
“여기는너무 깊게 몸담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네?”
“연예계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된 채 그리 말하는 대표.
그런대표의 모습에대충 무슨 의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 내 마음속 수민의 호감도가 표시된다면 이걸로 꽤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너무 착하잖아.
이 와중에도 별 관련 없는 나를 걱정하다니.
하지만 이미 가시밭길을 겪고, 여러모로 신경 것이 많은 사람에게 괜히 더 부담을 주고 싶진 않다.
그러니 여기서는 숨기지 말고 솔직히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정치싸움에 휘말리지 말라는 말씀이시죠?”
“……연주 양이 어디까지 얘기한 겁니까.”
“대표님이 자진해서 피버샵으로 나왔다는 것까지요.”
내 말에 대표가 또 다시 한숨을 쉬고픈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원래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대표가 말했다.
“거기까지 들었다면 제가 하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이해하시겠네요.”
“뭐, 대충은요. 이쪽 일에 너무 파고들지 말란 말씀이시죠?”
나는 그런 대표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진지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시원스레 대답하는 내 모습에 대표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아, 혹시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연예인으로 전향할 거라 여긴 건가.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연예인 할 생각은 없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가요? 그렇다면 본사 출근을 하라는 제 제안은 왜 받아들인 겁니까?”
“돈을 더 많이 버니까요.”
물론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니지만.
다행히 내 진짜 의도를 모르는 대표는 그런 내 대답에 곧바로 수긍한 듯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군요.”
“애초에 본사로 가라는 제안도 대표님이 하신 거잖습니까.”
“이쪽 바닥에 관심이 있으신 듯해 보여서 말입니다. 고민해 보겠다고 얘기하기도 하셨고요. 그래서 직접 제 제안을 승낙하셨을 때, 연예계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지 않았나 했습니다.”
“에이, 아니에요. 전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서.”
“네. 그렇다면 말씀하신 대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거기까지 말한 대표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이걸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나를 보며, 마침내 결정한 듯 대표가 입을 열었다.
“실은……. 본사 쪽에서 현수 씨를 보고 싶어 하더군요.”
“저를요?”
“네. 이번에 저희 패션몰 매출이 상당히 올랐지 않습니까.”
“설마 그게 저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요?”
“네. 본사는 현수 씨 덕분에 패션몰 매출이 올랐다고 보고 있습니다. 금일봉이라도 주려는 걸지도 모르죠.”
“음, 그건…….”
잘 됐다는 듯 미소 짓는 대표의 모습.
허나 나로서는 그 밝은 모습에 쉽사리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패션몰이 흥할 수 있었던 건 나 하나만의 힘이 아니지 않은가.
패션몰이 흥할 수 있었던 건, 나로서는 열심히 발로 뛰고 일한 수민 씨와 진아 씨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홍보한 의상들의 매상이 좋았다고 한들, 아르바이트인 피팅 모델은 결국 다른 사람으로라도 얼마든지 때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의류매장에서 계약을 따내고, 그 의상이 패션몰에 올라가고, 그로 인해 나와 연주, 그리고 진아 씨가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앞의 대표최수민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아무리 내가 홍보에 도움을 줬다고 해도, 수민 씨와 진아 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흥행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굴러들어온 돌이나 마찬가지인 나한테 금일봉?
그게 말이야 방구야?
노력한 만큼을 따진다면, 나보다는 이전부터 열심히 노력한 대표가 받는 게 도리이지 않은가?
“저는 납득이 안 가네요.”
“네?”
“저보다는 대표님이 더 애쓰셨지 않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대표의 모습에 내심 불편한 심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니, 스스로도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 거 아냐.
그런데 고작 알바인 나한테 금일봉을 준다는 얘기를 뭐 저렇게 해맑게 하냐고.
하, 사람이 너무 착해도 문제네.
“본사에서 정말로 보상을 주려는 거라면……. 우선순위가 따로 있는 거잖아요.”
“현수 씨.”
열이 뻗쳐서 굳이 안 해도 될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온다.
허나 살짝 흥분한 내 말투에도 불구하고 대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현수 씨.”
다독이는 듯한 말투로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부르는 대표.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녀의 표정은,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건……!”
“전 괜찮습니다.”
자신은 찬밥 신세일 거라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
그리고 그런 수민의 태도에 오히려 알바인 내가 분해하는 묘한 상황.
하,이게 대체 뭐냐고.
“본사 내부 상황에 대해 현수 씨가 굳이 파고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연예계에서 꾸준히 일할 생각이 아니라면 더욱이 말입니다.”
“……그게 대표님 생각이신가요?”
“네. 저는 이 자리에서 나름대로 가치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에 이제는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고요. 굳이 누군가에게 보상받지 않아도 저스스로 그리 여기니 별로 상관없습니다.”
“…….”
허나 이렇게까지 말하는 대표 앞에서 내가 어떻게 더 화를 내겠는가.
그저 대표의 말에 납득하는 척 할 뿐.
“그 본사 쪽 인간들……. 뭐하는 사람들인지 참 궁금해지네요.”
물론 이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본사 대표라는 이가 뭐 하는 작자인지 얼굴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거든.
이렇게 발로 뛰는 이가 있는데, 막상 떡고물은 알바한테 준다고?
심지어 밑바닥에서 시작한 패션몰의 수익을 창출해낸 사람에게 이딴 푸대접을 해?
그것도 자기 손으로 내친 주제에, 염치도 없이?
이렇게 된 거 최소한 얼굴 정도는 확인해야겠다.
그리고 기왕이면…….
그 얼굴에 제대로 먹칠을 해주고야 말겠다.
“거기 본사 대표, 여자 맞죠?”
“네? 그렇긴 한데……. 제가 그런 말도 했었나요?”
“아, 그냥 그런 거 같아서요.”
그리고 소설 속 전개를 참고한다면…….
정말 육노예로 만드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고.
“현수 씨, 말했다시피깊게 관여할 필요는…….”
의미심장한 내 표정에서 일말의 불안함을 느낀 것일까.
대표가 걱정 가득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 오늘따라 이 무덤덤한 대표의 다채로운 표정을 볼 수 있게 되는군.
그 부분에 있어서는 감사해야 될지도.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런 수민을 향해 씨익 웃었다.
내 진의가 어떤지 수민은 꿈에도 모르겠지.
“그냥 맛만 보고 오는 거니까.”
그래.
정말 다양하게 ‘맛’을 볼 필요가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