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6. 양손에 꽃(16)
다음날 아침.
우리는 호텔 앞에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담배를 피러 혜진이 잠시 떨어진 틈을 타 승화가 곁으로쪼르르 다가왔다.
“저기…….”
푹 잔 덕택인지 승화의 얼굴에서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어제 그렇게 뒹굴었는데 오히려 더 생기가 넘치는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승화가 더듬더듬말문을 열었다.
“혀, 현수야.”
“왜?”
“우리……. 또 볼 수 있는 거지?”
부끄러운지 그리 말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승화.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무슨 하룻밤 만에 날라리에서 요조숙녀가 됐네?
“연락처 줬잖아. 나중에 하고 싶으면 또 연락해.”
“으, 응.”
불안해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승화가 수줍은 듯 작게 웃었다.
그래, 그 승화가 수줍은 표정을 지은 거다!
화장실에서 남자랑 하는 걸 들키고도 태연했던 애가!
“그럼 난 먼저 가볼게.”
“쟤랑 같이 안 가고?”
“됐어. 나도 오늘 바빠서.”
내가 멀찍이 담배를 피고 있는 혜진을 가리키며 묻자 승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담배 피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러냐.
진짜 얘들 친구 맞나……?
“그럼 갈게.”
그리 말하며 홱 몸을 돌리는 승화.
“다음에 연락할게, 현수야!”
나를 향해 활짝 웃는 승화.
그러고는 활기차게 손을흔들며 떠나갔다.
이걸로 내 하렘 왕국에 또 한 명이 추가되는군.
그렇게 승화가 시야진 뒤에야 구석진 골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피어오르는 흰 연기와 함께 뻑뻑 담배를 피는 혜진의 모습이 보였다.
금연구역도 없어서 저렇게 구석에서 피는 걸 보고 있자니 좀 안쓰럽긴 하네.
“다 폈냐?”
다가가며 묻자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 혜진.
그러고는 주위를 슬 훑더니 내게 물었다.
“승화는?”
“바쁘다고 먼저 갔어.”
“하긴, 걔가 얌전히 기다릴 리가 없지.”
그리 말한 혜진이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얼마나 쌘 담배를 피는 건지 가까이 오기 무섭게 독한 담배 향이 확 올라왔다.
으, 나도 금연 중인데 미치겠네.
“뭔데?”
“하아…….”
뜬금없이 어깨동무를 하고는 한숨을 푹 쉬는 혜연.
의아해하는 사이 혜진이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순둥이 이렇게 헤어지면 또 언제 보냐 싶어서 그러지.”
사실 나로서는 그냥 원나잇으로 끝낼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 얘기는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네.
거기다 어젯밤에 했던 얘기도 있으니, 결국 오늘 하루만 보고 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혜진이 내 엉덩이에 손을 툭 올렸다.
그러고는 말도 없이 내 엉덩이를 주물주물.
……이게 미쳤나?
“오, 딴딴하네. 운동 좀 하나 봐?”
“밖에서는 이러지 말자, 좀…….”
“왜? 이제 와서 부끄러워졌어?
킬킬 웃으며 혜진이계속해서 내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무슨 중년 변태 아저씨 같네.
어젯밤의 정사 이후 내 눈치를 보게 된 승화와 달리, 혜진은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나를 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첫 만남 때 느낀 날카로운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더욱 적극적으로 변한 모습이다.
떡정이니 뭐니 하더니 나름 내가 마음에 들었나?
”그만 만져, 좀.“
나는 계속해서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혜진에게 핀잔을 주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어차피 구석진 곳이라 볼 사람도 없어. 그리고 보면 뭐 어때?”
“나 참.”
너무 당당한 태도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대놓고 이러니까 지적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느껴지네.
뭐, 솔직히 이렇게 거리낌 없이 대해주면 나야 나쁠 거 없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애초에 처음 클럽에서 계획을 짰을 때부터 이런 여자를 원하지 않았는가.
최다슬과 처음 계획을짤 때 원하던 적극적인 스타일의 여자.
그 바람에 딱 맞는 여자가 바로 눈앞의 여자, 고혜진이라 할 수 있었다.
“부끄러워?”
여전히 내 엉덩이를 희롱하며 내 어깨에 턱을 걸친 채 히죽 웃는 혜진.
처음에는 그렇게 차갑게 굴던 주제에.
“뭐, 딱히 부끄럽진 않은데.”
“……에휴.”
당황하지 않고 태연스레 대답하자 혜진이 흥이 식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기대한 반응이 안 나오니 실망한 모양이다.
“놀리는 맛이 없다니까.”
놀리다니, 나를?
내가 이 세계에서안은 여자가 몇 명인데.
이제 나는 예전의 아싸 김현수가 아니라고.
“그보다.”
다시 성희롱이 이어질까 싶어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넌 언제쯤 이름으로 부를래?”
“순딩이 말이야?”
“그래.”
“왜? 애칭 있으면 애인 같아서 좋잖아. 아니면 이참에 사귈까?”
“네 친구랑 쓰리썸까지 했는데 사귀자고?”
“난 관대해서 그런 거 신경 안 써.”
“됐어. 여친 생각은없으니까. 그냥 꼴릴 때 종종 불러.”
“하긴 섹파가 편하긴 하지.”
그렇게 혜진과 실없는 잡담을 하며 잠시 시간을 보낸 뒤.
“그럼 나도 간다.”
“그래.”
곧이어 혜진도 드디어 작별을 고할 때가 온 듯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보란 듯이 들고 있던 폰을 흔들었다.
“연락 기다릴게.”
“알았어.”
“아, 그리고 작은 아버지 연락처도 톡으로 보내 놨거든? 연락하기 전에 나한테도 얘기해. 혼자 가면 껄끄러울 테니까.”
“작은 아버지?”
“어제 밤에 말한 거 말이야. 검사 한 번 받을 거라면서?”
아, 그랬지. 비뇨기과 하신다고 하셨으니까.
검사를 받으며 내 정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수 있게 되려나?
혹시 소설 설정이랑 이상하게 섞여서 말도 안 되는 수치라도 나오는 건 아니겠지?
“왜? 불안해?”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건지 그리 묻는 혜진.
잠시 고민한 나는 솔직하게고개를 끄덕였다.
“흠……. 조금?”
“야, 정력 쌔면 좋은 거지 뭘 그래.”
“그래도 보통 나만큼하는 남자는 거의 없다면서.”
“보통이 아닌 거지 절륜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렇게 불안해하면 너랑 한 나는 뭐가 되냐?”
“왜? 성병이라도 있을까봐?”
“으, 끔찍한 소리하지 마라.”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질색하는 혜진의 모습에 내심 기가 막혔다.
그건 내가 걱정해야 될 문제인 거 같은데.
“아무튼 그건 나중에 검사 받는 걸로 하고,”
그리 말하며 핸드백을 뒤적이던 혜진이 흰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일단은 이거 받아.”
“이게 뭔데?”
“용돈이나 좀 줄까 하고.”
“뭐?”
아니, 설마…….
지금 하룻밤 같이잣다고 나한테 돈 주는 건가?
아무리 내가 걸레라고 해도 그렇지, 내가 진짜 몸이라도 파는 줄 아는 건가.
“야, 너는 진짜…….”
“잠깐만!”
내 표정에서 불쾌한 내 기색을 읽었는지 혜진이 서둘러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좋아서 주는 거야, 좋아서!”
“몸 파는 애들도 좋아서 하는 거긴 하지.”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어젯밤에 얘기할 때도 그렇고 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리고 나도 그냥 주는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제대로 설명해.”
꿀꺽.
딱딱한 내 표정을 마주한 혜진의 울대가 넘어가는 게 보였다.
목소리가 높아진 내 모습에 살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중에 또 볼 땐 옷이라도 좀 제대로 입고 오라고 주는 거야. 어디서 본 건지도 모를 싸구려 브랜드 입지 말고.”
“갑자기 뭔 옷 타령이야?”
“크흠. 나 이래봬도 나름 뼈대 있는 집안자식이거든?”
……갑자기 웬 집안 자랑?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혜진이 몇 번 더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뭐냐. 나름 집이 좋다 보니까 이런 저런 파티 같은 데 자주 불려간단 말이야. 그럴 때 너 파트너로 같이 데려가면 좋겠다 싶어서.”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건가.
나름 집이 잘 사는 만큼 상위 클래스들의 모임이 있고, 거기서 하는 사교 모임에 나를 데려가고 싶다 이런 얘긴가?
갑자기 너무 고차원적인 얘기라 머리가 안 따라가는 느낌이다.
누가 재벌집 자식 아니랄까봐.
멍해진 나를 보며 혜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부모님도 요즘 자꾸 결혼 얘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때 한 번 좀 도와주는 셈 치고 같이 놀아주라. 안 될까?”
“……어쩐지 장신구 취급 받는 느낌인데.”
“아, 뭔 소리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뭐, 안 될 건 없다만…….”
그래, 뭐 다 좋다 이거야.
재벌집 딸내미가 좋게 봐준다는 건데 나야 좋다고 받아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지금 혜진이 간과한 게 딱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이거 나 알바 하는 패션몰 옷인데.”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들은 ‘피버샵’에서 나온 옷들이라는 거지.
‘피버샵’은 여태껏 한 알바 중에서도 특히 애착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직장이다.
그런데 그걸 감히 싸구려 취급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나도 나름 신경 쓴다고 고르고 골라서 차려 입은 거란 말이다……!
“……아니, 스타일은 괜찮은데 재질이 좀 아쉬워서그래.”
답지 않게 띄워주는 소리를 하며 뒷목을 긁적이는 혜진.
내가 어지간히도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아니, 나는 진짜 괜찮게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아, 아무튼 받아.”
짧은 침묵을 깬 혜진이 봉투를 막무가내로 내밀었다.
무심코 봉투를 건네들자 혜진이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야.너도 좀 간지 나는 거 입고 와야 나도 기가 살잖아. 그, 지금 입은 게 별로라는 말이 아니고…….”
“…….”
“어, 그 뭐냐, 혹시 알아? 파티 가면 승화 말고도 또 내 친구들 만나게 될지? 그, 그 때는 좀 멋지게 차려입고 와야 내 기가 살 거 아냐!”
“위로해줘서 고맙긴 한데……. 너 지금 말 더듬고 있는 건 알지?”
“……쯧.”
내 지적에 민망한지 작게 혀를 차는 혜진.
하긴 얘 성격에 이렇게까지 말해주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그냥 내가 못 입는 걸로 하자…….
“그보다 섹파 관계에서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되냐?”
“그거야 모르는 거지.”
내 물음에 혜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뭐, 일단 받은 건 받은 거고.
이렇게 된 거얼마나 넣었는지 한 번 볼…….
“헉!”
슬쩍 봉투 속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빵빵한 봉투 속.
그곳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신사임당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큭큭.”
입을 떡 벌린 채 있는 내 모습을 즐기듯혜진이 회심의 미소를지었다.
허나 나는 그런 혜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아니…….”
나를 돈으로 사려는 거냐는 말 정도는 해 주려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이거 얼마야?”
“얼마냐고?
내 물음에 혜진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글쎄다. 대충 세 봐서 모르겠는데.”
“대충……?”
“뭐, 한 이백 정도 되지 않을까?”
“…….”
내가 한 달 일해서 벌 돈인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용돈이랍시고 주는 건가.
금수저 죽어…….
“자, 놀라는 건 거기까지 하고.”
입을 헤 벌린 채 있는 사이 혜진이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 정도면 옷 한 벌 정도는 사겠지?”
“한 벌이 아니라 수십 벌도 더 살 거 같은데……?”
“아, 그러니까 그런 싸구려 매장 말……! 아니, 아니다.”
순간 한 소리 하려던 혜진이 포기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정신머리가 나가버린 나로서는 그런 혜진의 모습을 관찰할 여유조차 없었지만.
“그냥 내가 다음에 매장 추천해 줄게. 내 이름 대면 알아서 맞춰줄 거야.”
이제는 아예 고급 매장을 추천해준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고혜진이라는 여자, 아니 그녀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의대를 나와서 백수로살면서 클럽에서 돈을 펑펑 쓰고, 심지어 작은 아버지는 나름대로 명망 있는 의사가 있는 집안이라.
아마 대한민국에서 이름 좀 날리는 대기업 집단이겠지.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나?”
내 물음에 혜진이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백수래도.”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혜진의 모습.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기 주인공, 내가 아니라 얘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