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6. 양손에 꽃(2)
다슬과 정사를 즐긴 뒤로 일주일.
나는 그 일주일간 이전과 비슷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주화연, 주화린 자매와 만나 밥을 먹는다든가, 피팅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를 좀 더 쌓는다든가, 소진과는 여전히 썸 같은 관계로 밀당을 한다든가, 정 할 게 없을 때는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한다든가 등등.
물론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다슬과 했던 약속으로 꽉 차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약속 당일.
거리 한가운데에 선 채, 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홀로 신기해하고 있었다.
‘살면서 클럽을 가는 날이 다 오다니.’
사실 원래 세계에서의 나는 진퉁 아웃사이더다.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은 물론이고 얼굴도, 키도 뭐 하나 잘난 게 없는 인생이었다.
하필이면 또 끼리끼리 논다고 같이 노는 친구들도 고만고만했다.
당연히 클럽에는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조역전세계로 오면서 다소 원래 세계의 여성 마냥 되어버린 친구들 덕분에 제대로 된 동성 친구마저 없다.
……동성 친구만으로 따지면 사실 이전보다 더 아싸가 된 걸지도.
하지만!
오늘부로 그런 과거의 나도 이제 완전히 빠이빠이라고!
흠, 처음 겪을 클럽 생각에 괜히 흥분되네.
“후우우…….”
뛰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슬 서늘한 밤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5시경.
해가 지고 오렌지 빛깔로 물들인 도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거리를 채워나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20, 30대의 젊은이들.
지금의 나도 분명 나쁠 게 없다는 건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삐까번쩍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청년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후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충 이렇게 입으면 되겠지……?’
다슬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괜히 입고 나온 옷차림을 다시 한 번 만지작거렸다.
후줄근하게 입는 평소와는 달리 이번에는 패션몰까지 뒤져가며 세련된 티셔츠와 반바지, 신발까지 구입했다.
구매처는 당연히 내 일터인 패션몰 ‘피버샵’.
패션몰 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만큼, 직장 상사나 다름없는 김진아와 동료 알바 이연주의 도움을 받았다.
‘이 기회에 대표랑 친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수민과의 관계를 떠올리자 괜히 아쉬운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사실 꼭클럽 때문만이 아니라도 ‘피버샵’에서 구매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걸 미끼로 현재 내 목표인 수민과 대화를 할 건덕지라도 건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워낙 바쁜 사람인지라 수민과는 얘기를 할 시간조차 거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나는 현재 내 직속 선임이라 할 수 있는 진아에게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야기를 들은 연주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고.
“하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델 알바 일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수민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어째 별 생각도 없는 여자들 호감도만 올라 버리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
심지어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김진아의 호감도는 벌서 40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고로 40이면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 즉 ‘사랑’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정도의 수치라 할 수 있었다.
일단 쪽지의 설정 상에는 그렇게 표시되어 있었으니까.
‘괜한 여자만 홀리게 하는 거 같아서 찝찝하단 말이지…….’
내가 딱히 말솜씨가 좋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걸까.
역시 정조역전세계라 해도 외모지상주의는 그대로다 이건가?
‘이런 부분은 세상이 바뀌어도 여전히 뭐 같네.’
하긴 나도 여자 얼굴 따지는 건 똑같으니 뭐라 할 순 없으려나.
애초에 외모적으로 역변한 내가 이런 말하기도 그렇고.
배부른 생각을 떨치며 나는 오늘 입은 옷을 근처 쇼윈도에 비춰 보았다.
하얀색 베이스의 티셔츠에 황금색 역삼각형 무늬가 새겨진 티셔츠, 세트로 함께 산 살짝 붙는 검은색트레이닝복 반바지, 빨간색과 파랑색 무늬가 들어간 스니커즈 운동화.
단촐한 듯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물씬 풍겨오는 패션이다.
늘씬하면서도 적당히 근육이 붙은 내 모습은, 어디 모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 빠진 모습이었다.
‘캬, 고놈 참 잘생겼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외모!
잡티 하나 없는 아기 피부를 보라!
이러쿵저러쿵 해도 역시 패션의 완성은?
바로 얼굴이지.
‘그보다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패션 점검을 마친 나는 폰을 꺼내 톡을 확인했다.
그런 내 행동을 어디서 보기라도 하듯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다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가고 있어요! 좀만 기다려요!”
“빨리 와. 지겨워 죽겠다.”
“알았어요!”
약속개념 느슨한 건 참 안 바뀐단 말이지.
이게 최다슬의 얼마 안 되는 단점이다.
그렇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내가 통화를 끊고 폰을 주머니에 넣는 순간이었다.
“저기…….”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어느새 내 눈앞에 다가온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응? 나 부른 거 맞나?
“저요?”
“아, 네.”
“어……. 왜 그러시죠?”
“저, 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와……. 이 사람 빠구 없네.
이렇게 스트레이트로 꽂아넣는 경우는 나조차도 처음 겪어본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능숙하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나는 이전과 달리 능숙한 태도로 헌팅을 하는 여성들을 쳐낼 수 있게 된 상태였다.
이미 이 세계로 오면서 이런 헌팅도 벌써 수십 번은 받아왔으니까.
이전의 찐따 김현수의 라이프는 제로라고.
“아, 네…….”
시무룩하게 떠나가는 그녀를 뒷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배가 불렀지.’
참고로 지금 떠나간 여자의 외모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원래 세계의 나였다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곧바로핸드폰 번호를 건네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소설 속 설정이 섞인 세계.
심지어 그 중에서도 소설 속 최고의 미녀 두 명과 잠자리를 한 만큼, 웬만한 여성으로는 눈이 차지 않을 만큼 기준이 높아져 있었다.
‘기왕 거절한 거 수치나 한 번 확인해 볼까.’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좌우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그녀의 음란도 수치와 호감도 수치가 지나갔다.
이 세계를 기준으로 평범한 수준의 음란도 수치와 20이 넘는 호감도 수치다.
‘어차피 탈락인가.’
그것을 확인한 나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뭐, 평소의 나라면 번호 정도는 교환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늘의 나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있다.
바로 ‘나쁜 여자’를 만나는 것.
그리고 그 여자와 다슬과 함께 쓰리썸을 즐기는 것.
‘여기 여자들도 하나같이 다 변태는 아니니까.’
일단 목표로 하는 여자의 음란도 수치는 방금 여성이 보여준 평균 수치보다는 훨씬 높아야 한다.
그래야 유혹에 좀 더 잘 넘어갈 테니까.
거기에 처음부터 나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그야말로 원나잇에 굶주린 여성의 경우가 좋았다.
그러러면 호감도 수치도 다소 낮은 편이 좋았다.
이 세계 기준으로는 내가 ‘따먹히는’ 입장이니 말이다.
즉, 원래 세계로 따지면 ’먹버‘ 라는 거다.
그러니 경박한 양아치 같은 여자일수록 좋겠지.
그런 녀석들이 도덕관념이 희미하고 하룻밤의 관계에 쉽게 넘어올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좀 더 시간을 소모해 공을 들인다면 굳이 경박한 여자와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역시 재미가 없을 거 같단 말이지.‘
이것도 제대로 정조역전 세계관을 즐기기 위한 일환 중 하나다.
원래 세계에서 여자를 먹이 마냥 보는 하이에나처럼, 이 세계의 하이에나 같은여자들이 어떤 식으로 날 다룰지 기대가 된다.
거기에 쓰리썸까지 하면 일석이조고.
아, 물론 최다슬이나 주화연 같이 순한 여자가 싫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매운 맛도 땡길 때가 있는 법.
그러니 오늘 목표로 하는 여자는 좀 더 내 매운맛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여자여야 할 것이다.
“……현수 오빠.”
그러는 사이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게 느껴졌다.
거기에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최다슬의 모습이 보였다.
“어, 왔어?”
인사를 하며 나는 다슬의 모습을살폈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골과 배꼽이 드러나는 하얀색 나시.
매끄러운 허벅지가 그대로 노출된 핫팬츠.
평소의 다슬과는 다르게 꽤 노출이 있는 복장이다.
이는 내가 오늘을 위해 다슬에게 미리 부탁한 차림이기도 했다.
오늘은 그야말로 제대로 놀아날 내 예정에 될 테니까.
“옷 예쁘게 입었네?”
나는 그런 다슬을 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허나 그런 내 칭찬에도 불구하고 다슬은 불만이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왜 그래?”
“뭐, 오빠가 오래서 오긴 왔는데…….”
나를 바라보는 다슬의 표정은 꽤나 미묘했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싶은 표정이다.
“오빠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완전 괜찮지.”
“……에휴. 됐어요.”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하는 내 모습에 도리어 다슬이 한숨을 푹 쉬었다.
“걱정하는 내가 바보 같네…….”
걱정? 나를?
얘 설마 지금 나 챙겨준답시고 이러는 건가?
‘왜 툴툴 거리는가 했더니 그런 이유였나.’
그런 다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떡정도 정이라고, 막상 내가 다른 여자와 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는가 보다.
하긴, 이 세계에서는 내가 ‘따먹히는’ 입장이니까.
“뭐가 그렇게 불안해?”
낄낄 웃으며 말하자 다슬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제가 불안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찝찝해서 그러는 거거든요?”
“뭐가 찝찝한데?”
“무슨 소X넷 정모하러 가는 기분이에요.”
“……뭔 비유를 해도.”
소X넷 정모라니.
무슨 성범죄 저지르러 가는 것도 아니고.
”너도 좋아서 수락한 거 아니었어? 갑자기 왜 이래?“
”그냥…….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좀 찝찝해서요.“
”뭐가?“
”그렇잖아요. 제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랑 하겠다는 거니까.“
흠, 그건 앞서 다 얘기 끝마친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무리 자유분방한 다슬이라고 해도 쉽사리 받아들이긴 힘들었던 걸까.
머뭇거리던 다슬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 뭐냐……. 거기도 공유해야 될 거고.“
”뭔 소리야?“
”그……. 3p 할 거라면서요.“
”그랬지.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렇게 되면 다른 여자랑 한 걸 넣어야 될 텐데, 그게 좀…….“
아.
그 얘기였나.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여기서 만나는 애랑은 제대로 콘돔 끼고 할 거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로 다슬이 툴툴거렸다.
“어차피 저랑 낄 때도 콘돔 끼고 하면서…….“
”뭐? 아니,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 아냐? 결혼도 안 했는데 애 만들 일 있어?“
”그러니까 그걸 오빠가 왜 신경 쓰냐고요!“
갑자기 빽 소리를 치는 다슬을 나는 황당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콘돔 끼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런 걸 신경 쓰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애 생기면 전적으로 여자 잘못이지!“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체.
이해가 안 가네.
나는 억울한 표정의 다슬을 보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니, 잠깐만.
설마……. 이것도 정조역전으로 인해 바뀐 설정들 중 하나인가?
”그런 건 서로 책임져야 하는 문제 아냐?“
일단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하자 흥분해 있던 다슬의 모습도 한층 약해졌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다슬을 보며 말을 이었다.
”피임은 남녀를 떠나서 신경 써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오빠가 처음이네요.“
”엥?“
”하긴 끼워주기도 전에 알아서 콘돔 끼우는 것부터 신기하다 생각했어요.“
설마 이 세계는 피임도 다 여자가 신경 써야 되는 건가?
심지어 남성용 피임기구도 여자가 챙겨줘야 된다고?
와, 진짜 어질어질하네.
”뭐, 오빠의 그런 점은 저도 좋아해요……. 하지만!“
내가 충격에 빠져 멍하니 있는 사이 다슬의 언성이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건 남자가 신경 안 써도 되는 문제라고요!“
”그런 거야?“
”당연하죠! 여자들이 다 알아서 피임약 먹고 하는데! 그리고 저 오빠랑 만난 뒤로 꾸준히 피임약 먹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했어야…….“
”당연히 하다 보면 알아서 오빠가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라 좀…….“
아니, 그래.
한이 맺힌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번화가 한가운데에서 당당하게 싸느니 뭐니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얘는 지금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부끄럽지도 않나?
”그런데 오빠는 한 번도 안에 안 싸 주고!“
”야, 야……!“
조용히 해라는 내 제스처도 무시한 채 다슬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제발, 나 부끄러워 죽겠어.
”씨잉…….“
어?
얘 설마 지금 우는 거야……?”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살짝 고여 있었다.
당황한 채 서 있는 날 향해 다슬이 분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어째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
와락!
갑자기 다슬이 내 팔뚝을 확 끌어안았다.
”약속해요!“
”뭐, 뭘?!“
”오늘밤에 무조건 저한테 먼저 쌀 거라고요!“
……얘 진짜 미쳤나봐.
그런 소릴 할 거면 목소리 좀 줄이라고 제발!
지금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그, 그래.“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팔뚝을 잡은 다슬의 몸을 이끌었다.
정조역전세계고 뭐고 간에 일단은 이 자리부터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러면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겠으니까 말이지.
”알았으니까 일단은 가자…….“
”씨이…….“
분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는 다슬을 끌고 가자니 주변 사람들이 키득거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진짜 쪽팔려 죽겠네.
”휴…….“
나는 다슬이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어째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거 같은 예감이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