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5.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쏘냐(3)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면서 나는 그녀와 함께 근처 마켓에서 장을 보았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업은 채 장을 보는 모습이 딱해서 짐은 내가 들려고 했지만, 장바구니를 꼭 쥔 그녀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아, 자꾸 이러면 죄송해서…….”
“괜찮다니까요 진짜.”
한사코 사양하는 그녀에게 나는 거의 반 강제적으로 바구니를 빼앗아야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너무 신세를 지네요.”
장바구니를 쥔 내 모습을 보며 진아 씨는 미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마냥 쩔쩔매는 모습이다.
강하게 나오지 못하는 진아 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으로 유독 소심한 녀석 한 명이 떠올랐다.
‘주화연 걔도 지나치게 소심하긴 하지.’
눈앞의 유부녀나 화연이나 외모로 절대 꿀릴 게 없는 미모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이렇게 소심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따름이었다.
특히 히로인인 화연의 경우에는 가만 보면 미모에 비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자기주장이 약했다.
원래 세계였다면 들이대는 남자가 한 둘이 아니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없다.
심지어 아예 이성에게 대쉬를 받은 적조차 없다고 했다.
내가 읽던 소설 설정상 그렇다고는 하지만, 현실에 적용이 되니 위화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만 잘나면 사는 방식이 달라지는 법인데.
‘근데 소진이 누나는 또 다르단 말이지.’
반면 같은 히로인답게 그녀 못지않은 미모를 지닌 소진 누나의 경우에는 자기 얼굴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 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 내용상으로도, 소진은 하루가 멀다 하고남자를 갈아치우며 날뛰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애초에 히로인급 외모를 가지고도 제대로 된 대쉬를 받은 적이 없는 화연의 경우가 말이 안 되는 거다.
‘설정 한 번 제멋대로네.’
같은 소설 속 등장인물의 히로인인데도, 생활상에 상당한 차이가 난다.
작가가 만든 설정이라는 게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치면 다슬은 완전 현실성 있는 느낌이네.’
그렇게 치면 현재 내 섹파 중에는 의외로 최다슬이 가장 정상적인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적당히 귀엽고, 키가 좀 작다 뿐이지 몸매도 앞의 둘에 비하면 살짝 살집이 있고.
‘뭐, 지금 눈앞의 진아 씨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글래머이긴 하지만.’
앞선 세 사람과 굳이 비교를 하자면 유진아는 최다슬과 비슷한 느낌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몸매는 정반대지만…….
성격만 따지면 최다슬 다운그레이드 느낌이랄까?
소심하다고 표현은 했다만, 정확히는 행동 하나 하나를 굉장히 조심한다는 느낌에 가깝다.
실제로 장을 보는 사이에도 중간 중간 어색하지 않게 적절하게 잡담을 건네 오기도 했고.
하긴 결혼까지 한 사람이니천성이 아싸인 나와는 성향이 완전히 다르긴 할 테지.
“끝인가요?”
“네.”
“그럼 나갈까요?”
장바구니를 번쩍 들며 말하자 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계산을 끝낸 뒤 우리는 마켓을 나왔다.
들어오기만 해도 주홍빛이 느껴졌던 바깥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 즈음 꿈나라에 빠져 있던 도윤도 눈을 뜨며 슬슬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으응…….”
“도윤이 깼어?”
눈을 비비려던 도윤에게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순간이었다.
“안 돼요.”
“네?”
“쉿.”
내 손이 닿지 못하게 하듯 몸을 홱 돌리는 진아 씨.
얼떨떨하게 있는 나를 보며 진아 씨가 단호한 표정으로 검지를 입가에 대었다.
“지금 어중간하게 깨우면 안 돼요. 울어버리거든요.”
“아, 네.”
“일단 빨리 가요.”
다급해진 진아 씨의 발걸음을 따라 나도 속력을 높였다.
다행히 마켓과 빌라까지의 거리는 3분도 채 되지 않았다.
“으으응, 엄마아…….”
집에 돌아오자 딱 맞춰 아이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짜증 가득한 기색에도 진아 씨의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웟다.
“착하지, 도윤아? 밥 먹어야지.”
“싫어어, 잘래애…….”
“전 물건 좀 찾고 오겠습니다.”
도윤이가 칭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바로 옆에 위치한 예전 내 집으로 향했다.
이전에 두고 갔다는 물건을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입주도 하지 않고 비밀번호도 그대로였기에 들어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미리 집주인에게 얘기도 해 놨고.
“여기 있네.”
곧바로 물건을 회수한 나는 진아 씨가 있는 집 문 앞에 섰다.
‘괜찮으려나.’
문앞에 선 채 나는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여기까지 온 것도 그저 주화연의 그 발정을 피하고자 한 것에 불과했을 뿐, 애초에 회수할 것도 뭣도 아닌 사소한 물건이었다.
굳이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생각 정리 겸 나름의 휴식을 가지고자 했던 것뿐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계획도 없이 애도 있는 여자 집에 함부로 들락날락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들었던 것이다.
나도 나름대로 선은 지키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그 괘씸한 미드만 아니었으면 그냥 돌아갔을 텐데.’
흔들거리던 그녀의 큰 젖가슴을 떠올리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싶은 욕심은 지금도 여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애초에 내가 먼저 오자고 한 것도 아니니 괜찮을 거다.
여기까지 와서 밥만 먹고 갈 수도 있는 거고.
아직은 모르는 거니까 뭐, 괜찮겠지…….
“실례하겠습니다.”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문을 열었다.
그런 나를 반긴 것은 장난간 검을 들고 돌격하는 도윤이의 모습이었다.
“정의의 검을 받아랏!”
”으아악!“
악, 존나 아파!
힘차게 내 정강이에 검을 휘두르는 도윤이의 장난에 정강이를 잘못 맞은 내가 발을 동동 굴렀다.
”도윤아!“
내 비명소리에 진아 씨가 헐레벌떡 현관문 앞으로 다가왔다.
요리를 하던 중인지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다.
오우야, 앞치마 꽉 잡힌거 보소.
”이 녀석, 손님한테 그러면 안 돼요!“
”히잉…….“
”죄, 죄송해요.“
떼를 쓰는 아이를 업으며 진아 씨가 고개를 숙였지만, 내 귀에 그녀의 사과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여 훤히 드러난 가슴골을 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므로.
거기에는 이미입고 있던 티셔츠는 없어진 지 오래.
……옷 입은 거 맞지?
”엄마아!“
”얘가, 가만히 못 있니?“
”으아앙! 싫어!“
아픔조차 잊은 채 나는 아이를 안은 그녀의 앞가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그 가슴 속에서 아이가 몸을 비비적거렸다.
딱 1분만 내가 저 애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정말 죄송해요. 저희 애가 좀 극성이라…….“
겨우 아이를 진정시킨 진아가 말했다.
”자고 일어나니 기운이 넘치나 봐요. 미안해서 어쩌죠?“
”아, 아닙니다. 애가 다 그렇죠. 그보다 옷이…….“
”네?“
당황한 내가 영문을 몰라 하는 그녀의 가슴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런 내 반응에 그녀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작게 웃었다.
”아, 너무 더워서 셔츠는 좀 벗었어요. 괜찮아요, 안에는 브라 찼으니까요.“
”네, 네……?“
”왜 그러세요?“
도리어 그런 내 반응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진아.
그 반응에 나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맞아, 하긴 이런 세계였지.’
이 정조역전세계에서 여자의 상반신 노출은 하등 의미가 없다.
생각해보면 이 세계의 여자들은 가슴을 숨기려는 행동 자체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왕가슴의 애 엄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욕이 별로 없는 이곳 남자들은 애초에 가슴으로 잘 흥분도 하지 않는 듯했고, 여자들도 하반신 외에는 노출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업계 포상이란 말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치미를 떼며 나는 조금씩 그녀의 가슴을 감상했다.
장난을 치는 도윤이를 막아서는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출렁인다.
알몸인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진아 씨 말대로 안쪽에 브라가 희미하게 보인다.
속옷에 청바지, 거기에 앞치마만 두른 모습이 마치 알몸으로 입은 듯 절묘하게 옷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밥만 먹고 못 가겠는데, 이거.’
그것을 보며 내 마지막 남은 망설임도 완전히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손으로 반드시 저 거대한 젖가슴을 만지고야 말리라.
***
음험한 생각과 달리 나는 최대한 평범하게 보이고자 노력했다.
그녀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도윤이와 놀아주면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은 뒤로도 애를 재운다는 핑계 등으로 한동안 밍기적 거리면서 때를 기다렸다.
”잘 먹었어요. 요리 진짜 잘하시네요.“
설거지를 마치고 도윤이도 마침내 잠이 든 시각.
거실에서 간단한 차를끓여온 진아와 함께 나는 그녀와 담소를 나누었다.
”집밥 못 먹은 게 한세월인데 덕분에 너무 잘 먹었어요“
참고로 진아 씨는 아직도 브라 하나에 에이프런을 찬 차림 그대로.
마치 알몸 그대로인 것 같은 모습에 나로서는 발기를 참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몸이 건강해진 건 좋지만, 가끔은 너무 건강해서 문제란 말이지…….
”잘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니에요. 이렇게 요리도 잘 하시고.“
담소를 하면서도 나는 어떤 식으로 그녀를 공략해야 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미 앞서 밥을 먹고 집을 둘러보면서 이 집안에 대한 간단한 정황은 파악한 상황.
”남편 분은…….“
저녁을 먹으며 파악한 정보로 상황을 유추하며나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돌아가신 건가요?“
”아, 네…….“
내 말에 안색이 어두워지는 진아 씨.
허나 언제 그랬냐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4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랬군요…….“
”참 사람이 무심한 사람이었다 싶었는데, 갈 때도 무심하더라고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오히려 모르는 척 하는 게 더 불편할 때가 많은 걸요. 일부러 주변에 가족사진을 걸어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그러면 아직도 남편 분을…….“
”네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녀가 수줍게 대답했다.
”아직도 사랑하죠, 그이를…….“
4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못 잊고 있는 건가.
‘이거 생각보다 힘들지도 모르겠네.’
차를 후루룩 마시며 나는 애써 아쉬운 기분을 감추었다.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을지 몰라.’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나는 진아 씨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야 아직 남편에 대해 미련이 남은 듯해도 이미 간 사람은 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없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들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정조역전세계니 성욕을 어떻게든 풀긴 하겠지.’
남편에 대한 애틋함과는 별개로 이 세계 여성의 성욕은 어쩔 수 없거든.
홀로 푸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남편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다면 혼자 밤마다 타오르는 몸을 홀로 달랠 심산이 컸다.
오랜만에 능력도 한 번 쓸 때가 왔군.
”잠시 화장실 좀.“
”아, 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화장실로 가는 척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로 향하면서 나는 차를 마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호감도 지수는……. 16인가.’
왼쪽 눈을 가리자 나타나는 수치를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16 정도면 친한 지인이나 친구 정도로 느끼는 수치.
이성으로는 거의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만큼 그녀의 가슴 속에는 전 남편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얘기겠지.
그런 그녀에게 단기간에 나를 각인시키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호감도가 아니라 음란도니까.’
물론 섹스를 하는 데 중요한 건 호감도가 아닌 음란도지.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가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54…….’
나타나는 수치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성욕으로 따지면 이 곳 세상의 여성의 1.5배 정도일까.
확실히 높긴 한데 뭔가 미묘한 수치다.
‘이 정도 음란도면 분명 야한 건 맞는데…….’
미망인이 아니었다면 대쉬를 해도 나쁘지 않은 수치일 터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마음속에 남편이라는 존재를 품고 있지 않은가.
과연 남편 하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그녀의 일편단심이 먼저일까, 아니면 4년 간 반강제적으로 시달린 금욕을 풀고자 하는 욕망이 먼저일까.
지금 이 수치만으로는 쉽사리 확신이 서지 않았따.
”왜 그러세요? 우두커니 서 계시고.“
가만히 있는 내 거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화장실 안 들어가세요?“
”아, 그게…….“
나는 근처의 가족사진을 보며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내 머릿속은 그녀를 어떤 식으로 덮쳐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요.“
”생각이요?“
”그……. 남편 분도 없이 지금껏 혼자 애를 키우셨다는 거잖아요. 많이 힘들지 않았나 해서요.“
”힘들었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아무튼 살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요.“
”그렇네요.“
적당히 말을 돌리는 내 화제에도 친절하게 따라오는 진아 씨.
‘슬쩍 떡밥이라도 던져 볼까.’
진중한 표정의 진아 씨를 보며 나는 슬그머니 그녀에게 다가갔다.
적당히 던져서 반응이 있으면 잡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뭐.
여기서는 가볍게 유혹해 볼까.
”하지만 제가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혀, 현수 씨?“
앉아 있는 진아 씨에게 한층 더 몸을 가까이 한다.
지척까지 다가온 내 움직임에 당황한 진아 씨가 몸을 슬쩍 빼려고 했다.
”저, 저기…….“
”남편 분께서 돌아가신 지 4년째에, 아이도 있었다면……. 진아 씨도 그만큼 스스로를 달랠 시간이 없었다는 얘기겠죠.“
”네에?!“
깜짝 놀란 진아 씨를 향해 그녀의 허벅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읏!"
낯선 감촉 때문인지 흠칫 떨리는 몸.
하지만 딱히 내 손길을 거부하는 반응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진아 씨.“
헐렁한 청바지 너머로 느껴지는 육덕진 허벅지를 슬며시 훑으며,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싫다고 하신다면 곧바로 그만두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당황한 진아 씨를 향해 나는 그대로 입술을 들이밀었다.
”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