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5.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쏘냐(2)
터덜터덜 길거리를 걷는 어두운 표정의 여인.
계란 한 판을 막 넘어선 나이와 달리, 그 얼굴은 20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젊다.
하지만 아무리 젊어 보이는 얼굴이라 해도 표정이 어둡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
말 없이 걷는 여성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멋이라곤 부릴 여유조차 없어 보이는 헐렁한 줄무늬 긴팔 티셔츠와 다소 헤진 청바지, 때 묻은 운동화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처량함을 더하고 있었다.
셔츠가 터질 듯 커다란 가슴이 언밸런스함을 더해주는 것은 덤.
그런 그녀의 이름은 유진아.
나이 서른한 살.
그녀는 오늘도 힘겨운 공장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를 하는 중이었다.
“하아…….”
집으로 향하는 워킹맘, 진아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평소라면 일이 끝난 시점에서 싱글거리며 퇴근을 했을 터이건만, 오늘 지점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니 퇴근길에도 발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이젠 보너스도 아예 없다니…….’
홀로 아이를 키워온 지 어언 3년.
없는 돈 다 긁어 모아가며 전세나마 집을 구하고,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겨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왔다.
그렇게 제대로 된 스펙 하나 없이 인맥으로 찾은 일이 바로 공장 일이었다.
‘내년에는 도윤이 초등학교도 보내야 되는데.’
예상 지출은 늘어나는데 수입은 오히려 줄어든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진아의 마음은 무겁기만 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혼자 살았더라면 이 정도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자신에게는 책임져야 할 아이가 있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키우는 돈만 해도 억 단위라는데, 과연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여보…….’
갑갑한 상황 속에서 진아의 머릿속으로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통사고로 4년 전 남편을 잃었을 때 절망했던 그 날들.
장례식장에서 펑펑 우는 자신을 보며 함께 울던 아이까지.
“흐윽…….”
그 날을 생각하는 진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눈물을 떨어뜨릴 새도 없이 눈가를 억척스럽게 슥슥 닦아낸다.
‘안 돼, 그 날 이후로 안 울기로 결심했는걸.’
우는 건 이미 그 날로 마지막이라 정했다.
사랑하던 이가 사라졌음에도 슬퍼할 겨를 따윈 없었다.
아무리 슬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남편 한 사람만이 아니기에.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아는 충분히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어떡해. 눈 다 부었겠다.’
혹여나 아이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걱정부터 앞선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늦은 상황.
이미 저기 놀이터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눈을 슥슥 닦으며 진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돌아간 걸까…….’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한 놀이터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진아의 머릿속으로 불안한 생각이 덮쳐왔다.
“도윤아!”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주말에 급하게 일을 간 터라 이웃들에게 부탁해두긴 했지만, 막상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니 걱정이 앞섰다.
제대로 점심은 사 주었을까,
괜히 어른들에게 버릇없게 굴지는 않았을까,
혹시 다 가고 혼자 어디 구석에서 기다리는 건 아닐까.
아니, 혹시 어쩌면……,
“엄마!”
"도윤아!"
다행히 그런 불안한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았다.
놀이터 입구에서 떨어진 사각지대, 구석의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는 도윤의 모습을 확인한 진아가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벤치 구석에서 생각지도 못한 상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아, 그 때 옆집 청년…….”
깜짝 놀라 현수를 보던 진아가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도윤과 함께 놀고 있는 현수의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거라도 받으세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진아에게 손수건을 건네받은 현수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손수건으로 흙을 털어낸 현수가 몸을 일으키며 진아를 바라보았다.
“잘 지내셨어요?”
***
“설마 다시 뵐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러게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이 사람을 볼 거라고 생각하고 온 건 아니었으니까.
“애기가 참 귀엽네요.”
“그죠.”
그녀의 등에 업힌 도윤을 보며 말하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애 엄마답게 참으로 자애로운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뭐, 사실 귀엽다고 말해도 중간에는 꽤 힘들었지만.
“저야 제 애라 귀엽긴 한데…….”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마냥 그녀가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러고보니 내 주변 여자들은 은근히 다들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아니면 이 세계 여자들 눈치는 원래 세계랑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걸지도.
“아니에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재빨리 말했다.
"보호자 분들도 있어서 특별히 힘들지도 않았네요.”
“아, 네. 마침 부탁하셨던 이웃분도 연락하셨더라고요.”
“그래요?”
“네. 삼촌이라는 분이 저희 애 보고 있다고 톡하셨던데. 현수 씨가 점심값도 내주셨다면서요? 심지어 다른 아이들 밥값까지 계산하셨다고.”
이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핸드폰으로 눈짓하며 그녀가 말했다.
방금 전 이웃에게 연락을 돌린 결과 그녀도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충 파악한 듯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유괴라든가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혹여 정말 유괴범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사실상 남남인 이상, 상황만 따지고 보면 의심한다 해도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정말 감사드려요. 애 보느라 힘드셨을 텐데 거기다 밥까지 사 주시고.”
다행히 그런 내 걱정은 기우로 그쳤다.
이전부터 나름 친분을 쌓았기 때문일까, 설마 그렇게까지 여기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긴 원래 세계에서도 인사 정도는 했던 사이였으니까.
‘그렇다 쳐도 경계심이 너무 없긴 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원래 유괴 같은 건 더 가까운 데에서 일어난다고 하지 않나?
어쩌면 이것도 정조가 뒤바뀐 것에 대한 차이점인 걸까?
“아닙니다. 애들이라 밥값도 얼마 안 해요.”
그러한 생각을 숨긴 채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를 좋게 봐주는 건데 굳이 내가 그 부분에 태클을 걸 필요는 없겠지.
애초에 나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니만큼, 어쩌면 이것도 작가 겸 창조주가 내 위주로 흐름을 보정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놈의 편의주의적이고 제멋대로인 설정 때문이거나.
‘이럴 때 보면 꼭 정조관념만 바뀐 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언제 한 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해 둘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리 생각하며 나는 그녀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다 저도 한가했던 참이어서요. 마침 애도 혼자 있는 것 같기에 잠깐 같이 있어준 것 분이에요.”
“그러셨군요. 그래도 저희 애 때문에 그렇게까지 시간 써 주시고……. 정말 감사해요. 제가 뭔가 사례라도 해야…….”
“아이, 괜찮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서로를 띄워주는 말이 두 세 마디 더 오고 간 뒤에야 잡담이 다시 원래의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곧이어 진아가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무슨 일로 돌아오신 건가요? 이사 갔다고 들었는데.”
“아, 실은 이사하면서 잊은 물건이 몇 개 있어서요.옛날 생각도 나고 물건 회수할 겸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주말이기도 하고요.”
“그렇네요. 오늘은 주말이었죠.”
내 말에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마냥 중얼거리는 그녀.
그 모습을 보며 질문을 하고자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호칭을 찾지 못해 질문이 입안을 맴돈다.
‘내가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지.’
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이름도 모르고 지금껏 용케 대화를 하고 있었네.
지금껏 몇 년 동안 얼굴 마주치면서 이름 한 번 모르고 있었다니.
“유진아에요.”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챈 그녀, 유진아가 재빨리 대답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진아 씨를 보며 나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아, 전 김현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뭐, 친인척도 아니고 이웃 관계니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렇죠? 후후.”
내 말에 진아라 불린 여성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표정과 대조되게 눈 밑은 다크서클이 희미하게 피어나 있었다.
“……,”
뭔가……. 딱한데.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느낌이네.
그런 모습까지 보고 있자니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 해도 알 수 있었다.
‘역시 남편은 없나 보네.’
하긴 이런 주말에까지 애를 두고 일을 하러 갈 정도다.
남편이야 당연히 없을 테고, 어지간히도 생활이 힘든 것이겠지.
거기에 육체적 능력 자체는 원래 세상의 여성과 다를 바가 없을 터.
육체적 능력도 일반 여성에 불과한데, 스펙마저 별 볼일 없다면 취직이 더 힘들 것 정도는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이런 여자를 따먹으려 한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니 지금까지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역시 그냥 돌아가야겠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자니 미안해서 그러질 못하겠단 말이지.
진아라는 여성과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예상했던 바가 아니기도 하고
뭐, 그래봤자 내 행동도 그저 걸레일 뿐 쓰레기 같은 행동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애 키우면서 고생하는 여자를 따먹을 생각을 하자니 영 양심에 찔린다.
역시 원래 세계에서의 가치관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가 보다.
하긴, 어차피 앞으로도 따먹을 여자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냥 얘기만 하고 돌아가자.
나는 잡담이나 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아, 네. 그보다 진아 씨는 주말에도 출근하시나 봐요?”
내 말에 진아 씨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원래는 안 하는데 급하게 일이 생겨서요.”
“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녀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뭔가 대화에 집중이 안 된다.
주화연보다 더 큰 가슴.
저 엄청나게 큰 가슴이 내 판단력을 흐리게만들고 있었다.
‘저기 파묻혀 보면 소원이 없겠네.’
상반신을 움직일 때마다 힐끗힐끗 보이는 저 가슴골을 볼수록 방금 전 그냥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결심이 자꾸만 흔들린다.
그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가슴이었다.
거기다 하필 또 정조역전이라고 가슴도 제대로 안 숨기고 다니고 있으니 말이지…….
“현수 씨는요?”
“네?아, 저요?”
한참 가슴에 정신이 팔렸던 내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 저는 그냥 알바입니다. 모델 알바 같은 거요.”
“모델요? 와, 대단하시네요……. 그것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지 않나요?”
“그렇지도 않나 보죠. 저는 가니까 바로 면접 통과시켜 주던데.”
“그거야 현수 씨가워낙 멋있으셔서…….”
“그래요?”
잡담을 하면서도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욕망을 겨우 억제하는 사이.
갑자기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네?”
망설이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닫았다는 반복하는 진아 씨.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얼떨결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진짜 이상한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라요.”
그렇게 한참을 입을 열었다를 반복하던 진아 씨가 겨우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조심스럷다니까.’
여기 여자들은 남자 대하는 걸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 거지.
잘못 접근하면 성희롱이라도 한다고 여기는 걸까?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그, 진짜 감사하는 의미로 하는 얘기거든요? 시간도 시간이고, 괜히 오해하실까봐…….”
“오해 안 합니다.”
“그, 그런가요?”
내 거듭된 대답에 그제서야 진아 씨도 용기를 얻은 듯했다.
지긋이 나를 바라보던 진아 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어요? 마침 장도 봐야 되고…….“
”좋습니다.“
”네?“
머릿속으로 필터링을 할 겨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밥 먹으러 갑시다.“
이건 솔직히 내 잘못 아니다.
이 여자가 유혹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