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5.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쏘냐(1) (36/152)



〈 36화 〉5.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쏘냐(1)

정조가 바뀐 세계로 온지 벌써 약 세 달.

그렇게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 삶은 한량과 다를 바 없었다.
오늘은 알바하나 없는 쉬는 날인만큼 더욱이.

“좋다…….”

그렇게 나는 놀이터주변 벤치에 앉아 따사로운 햇빛을 즐기는 중이었다.

지금 있는 곳은 이사를 하기 전 원래 세계에서부터 살았던 빌라 주변.
깜빡 잊은 물건들이  개 있기에 회수할 겸  곳에 다시 온 상태였다.

“야, 기다려!”
“튀어, 튀어!”
“꺄하하하하!”

귓가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벤치에 앉은 채 나는 멍하니 저 멀리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남자아이 둘에 여자아이 넷.
남녀 구별할  없이 모두가  몸에 흙을 잔뜩 묻힌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유독 남자 아이보다 여자 아이들이  개구쟁이처럼 날뛰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애들도 여자애들이 더 괄괄하게 뛰어노네.’

저 정도로 어리면 이 세계에서의 남녀 구분이 크게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걸까.

아니, 생각해보면 원래 세계에서도 그랬지 않았나?
어릴 때는 오히려 여자 애들이 더 기가 쌘 경우도 많았으니까.

“하아암…….”

하품과 함께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주말이기도 한지라, 오늘은 생각도 정리할 겸 이렇게 하루를 보낼 예정이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건 오랜만이네.’

주말이기에 모델 알바는 당연히 없고, 간만에 상하차 알바는 재꼈다.
아무리 이런 몸이라고 해도 가끔은 쉬고 싶은 법이니까.

 오늘은 세계가 변한 뒤로 맞는 내 첫 휴일이었다.

뭐, 사실 모델 알바는 그렇다 쳐도 상하차 알바는 이제 딱히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가장 큰 목적은 이미 이뤘으니까.

나는 벤치 옆에 놓은 핸드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틀 동안 연락이 없다라…….”

나는 이틀 전 만난 그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박소진.
나이는 스물일곱.
나보다 한 살 연상.
직업은 변호사.

캐나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의 혼혈로 태어난 적발의 미녀는 그 아름다운 외모 못지않게 엄청난 스펙을 자랑했다.
해외의 이름난 법학대를 나오고, 졸업 후 국내로 돌아와 1년 만에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 현재는 대형 로펌에서 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다.

‘변호사라서바쁜 건가.’

연락한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막상 이틀이 지나도록 소진에게서는 그 흔한 톡 한 번이 없었다.

먼저 내가 톡을 보낼까 싶었지만 결국은 보내지 않았다.
괜히 밀당이라도 하는 거면 먼저 보내는 순간 손해 보는 거다.
생각보다 영악한 여자니까.

‘하긴 그 누나 입장에서는 크게 아쉬워할 필요가 없을지도.’

사실 원래 세상에서도 외모 피라미드의 정점은 초특급 미녀가 아닌, 초절정 미남이 아니었던가.
이미 웬만한 남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가 많을 테지.
어쩌면 나와의 관계를 애써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박힐 때마다 좋아 죽던 모습과 헤어질 때 아쉬워하는 소진의 모습이 못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간에 체온을 나누며 교감을 나눈 나로서는 오히려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올 거라는 묘한 확신마저도 가지고 있었다.
그저 직업이 직업인만큼 쉽사리 연락을 할 시간조차 내기 힘든 것이리라.

뭐, 알아서 연락하겠지.

까똑! 까똑!

 소리와 동시에 나는 벤치에 놓인 핸드폰을  낚아챘다.

[화연] 현수야 뭐해?
[화연] 우리 안 한지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
[화연] 오늘 간만에 어때? 내가 집에 갈까?
[화연] (혀를 내민 채 헉헉거리는 갈색곰 이모티콘)
[화연] (손가락으로 하트를 날리는 복숭아 이모티콘)

“에휴.”

톡을 보자마자 한숨이 푹 나온다.

“너는 연락 좀 적당히 해라 진짜…….”

현재  공식적(?)인 섹파는 둘.
바로 주화연과 최다슬이다.

그  주화연의 성욕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현재 세계가 바뀌게 된 지는 두 달에서 세 달이 지난 시점.
 동안 주화연과 정사만 해도 자그마치 약 30번.
즉, 3~4일에 한 번 꼴로 화연과 섹스파티를벌인 셈이다.

특히  번 하면 만족하는 다슬과는 달리, 화연과 뒹굴 때는 하루를아예 섹스하는 날로 잡아야 할 정도다.

나야 육체능력이 강화되었으니 망정이지……. 아마 일반 남자였으면 진작에 복상사하지 않았을까?
이 세계 남자라면 하루는 버티려나 몰라.

‘나도 싫은 건 아니지만…….’

물론 나도 섹스는 좋아하니까  문제는 없긴 하다.

다만 화연의 경우에는 도가 지나치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하필 다른 사람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막상 이런 톡이 온다고 생각해 봐라.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다.

‘최다슬 반만 닮아 봐라, 진짜…….’

반면 주화연보다 비슷한 시기에 섹파로 지내는 최다슬과는 노래방에 갔던 날을 포함해서 이제 고작 세 번 만났을 뿐.
심지어 한 번은 섹스도 하지 않고 단순히 데이트만 했다.
애초에 최다슬의 경우에는 술을 마시면 야해지는 거지, 평소에는 유별리 야한여자가 아니었다.

‘남자 경험이 조금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의 차이가 이런 건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최다슬의 태도도 날 배려한 것 같긴 하다.
나야 섹스를 하는 게  좋긴 하지만  세계 남자들은 나와 같진 않을 테니 말이다.

‘교대도 다녔다는 애가 이성 다루는  참 서툴러…….’

선생님이라면 교육대학을 나왔을 테고,  세계 기준 교대라면 분명 남자가 더 많을 텐데.
아직 군대도  간 최다슬과 달리 주화연은 이미 전역을 마치고 초스피드로 임용고시까지 합격한 상태가 아닌가.
성격 차이라 해도 경험 면에서 한참 선배일 터인데 도대체  저렇게 남자한테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지, 참 이해가 안  때가 있다.

‘아니……. 그래서 오히려 이성한테 서툰 건가?’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전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이고, 경쟁도 당연히 치열하다.
그런 세상인 만큼 학교 선생님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저 맹한 성격으로 선생이 되기 위해 공부에 얼마나 힘을 썼을지 생각하면 뭐……. 어지간히도 고생하긴 했을 것이다.
아마 이성교제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공부에만 몰두했겠지.
심지어 그 외모로도 아싸라는 설정이니까.

‘무시하기도 좀 그러니까 대충 보내자.’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핸드폰을 들고 주화연에게 간단한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생각 없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까똑!

내가 톡을 보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화연] 알았어. 어쩔 수 없지…….
[화연] (대충 울고 있는 토끼탈 이모티콘)

톡을 확인한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럴 거면서…….”

이러쿵저러쿵 해도 말은 참 잘 듣는단 말이지.

집착하는 듯해도 막상 거부감을 드러내면 강하게 나오지는 못한다.
평소 소심한 주화연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렇게 풀이 죽은 화연을 달래는 답장을 보내던 찰나.

“어?”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아이 한 명이 날 보며 손가락질하는 게 보였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잠깐, 얼굴이 낯이 익은데?

“아저씨!”
“옆집 꼬마애네?”
“안녕하세요!”

눈앞에는 이전에 살던 곳의 이웃, 옆집 유부녀 아들이 나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설마 했는데 여기서 얘를 볼 줄이야.
이건 생각지도 못 했는데.

나는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네!”
“그래, 그래.”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남자아이를 보며 나는 절로 아빠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아이들은 좋아하는 편이었으니까.

거기에 귀여울 뿐만 아니라 애 교육도 아주 단단히 시켜놨고.

‘결혼하면 나도 애가 생기겠지?'

저 야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소 결혼 생각이 없는 나라도 애 생각이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이런 세상인데 나는 결혼은 어떤 식으로 할지 모르겠네.
아무리 애가 좋다고 해도 그거 하나만 보고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지금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가?’

하긴 뭐,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필요는 없지.

“엄마는 어디 가고 혼자서 놀고 있어?”

잡생각을 멈추고 묻자 아이가 고개를 홱홱 저으며 뒤를 가리켰다.

“혼자 아닌데요?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그래?”

그 말에 나는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말한 또래 아이들 뒤로, 부모로 보이는 이들 몇 명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알고 있는 옆집 유부녀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다른 애들의 경우에는 이미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 아이만 홀로 보호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혼자 오게  건가?’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간  같은데 혼자 놀러오게 두다니.
아무리 평화로운 세계라고 해도 좀 그렇지 않나?

“엄마는 안 계시니?”

내 물음에 아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엄마는……. 바빠요.”
“바빠?”

대답하기 싫은지 입을 꾹 다무는 아이.
무슨  있나?

“바쁘면 일이라도 가셨어?”

내 말에 무거운 아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럴수록 내 의문은 한층 깊어졌다.

“오늘 노는 날 아니니?”
“우리 엄마는 노는 날 없다고 했어요…….”
“그래?”

그러니까 주말에도 일하러 간다는 건가.

'그러고보니  엄마도 평일에는 외출용 복장을 입고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유독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긴 했다.
평일에도 단순히 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우고 들어가지 않고, 항상 어딜 가곤 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알바를 가면서 매일 봤기에  정도는 나도  수 있었다.

애 아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엄마는 주말에도 일을 하는 워킹맘이라.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문득 머릿속으로 육감적인 아이 엄마의 몸매가 떠오른다.

흠.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우리 꼬마아이는 이름이 뭐야?”

부모님도 없이 나한테 찾아온 아이를 매몰차게 대할 순 없는 노릇.
뭐, 원체 내가 애를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응?”

호의적인 표정을 유지한 채, 벤치에서 엉덩이를 뗀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래, 이건 딱히   엄마가 예뻐서 이러는 게 아니다.
‘전’ 이웃사촌으로서의 호의일 뿐이다.

암, 그렇고말고.

“이도윤이요.”
“도윤이구나. 아저씨는 김현수라고 해.”
“현수 아저씨?”
“그래. 그런데 아저씨 말고 삼촌이라 불러주면 안 될까?”
“아저씨!”
“…….”

아무튼 요즘 애들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니까.

“그럼 엄마  때까지 아저씨가 기다려 줄까?”
“우와, 좋아요!”

 말에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펄쩍 뛰며 대답했다.
경계심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모습이다.

‘사탕 준다고 하면 그냥 따라갈 기세네.’

아무리 이웃사촌 관계였다곤 해도 결국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인데 이런 건 좀 교육을 시키는  좋지 않았을까.
납치 같은 건 가까운 사이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웃사촌이 괜히 나쁜 마음먹고 접근하면 어떡하려고 이러는지.

뭐, 실제로 나쁜 짓 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나로서는 잘된 일이긴 하지만.

내 행색이 말끔한 덕인지 주변 아이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나에 대해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는 듯했다.
거기에 도윤이도 내게 거부감이 없었고.
얼마나 붙임성이 좋은지 이제는 아예 벤치에 올라와서는 날 보며 헤헤 웃고 있다.

그런 도윤이를 보며 내가 말했다.

“배 안 고파? 점심은?”
“아직 못 먹었어요.”
“그래? 그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까?”
“네, 네!”
“도윤아! 밥 먹어야지!”

마침 저쪽에 있는 애 아빠들-정조역전세계라 그런지 엄마가 아닌 아빠가 많았다-도 나를주목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마 도윤이 엄마가 미리 부탁을 해 두었을 테지.

그렇다면 지금이 의심받지 않고 끼어들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으쌰!”

내가 번쩍 안아들자 꺄르륵 웃는 도윤이.
그런 아이를 향해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윤아.”
“네?”
“밥 먹을 때는 아저씨라고 하지 말고 삼촌이라고 해야 돼. 알았지?”
“왜요?”
“음……. 안 그러면 내가 도윤이랑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
“그건 싫어요!”
“그렇지? 아저씨도 도윤이 엄마가 올 때까지는 같이 있어주고 싶어. 그러니까 그러려면 아저씨 말고 삼촌이라고 불러야 돼. 알았지?”
“네!”

씩씩하게 대답하는 다윤이를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유괴범들 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  같단 말이야.
나쁜 짓  생각은 없는데도 말이지.

도윤이를 안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보호자 사이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의아한 기색의 부모들을 보며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윤이 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인사에 사람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 경계하는 것이 아닌 호의적인 시선들이 많았다.

“도윤이 엄마가 삼촌 온다는 말은  했었는데?”
“아, 저도 이렇게 올지 확실하지 않았거든요. 시간이 남아서 마침 이렇게 왔습니다.”
“음, 그래요?”

그나마도윤이의 엄마에게 직접 부탁을 받은 듯한 30대 남성  명만이 조금 의심스러워했을 뿐, 그 이상의 의심은 없었다.

뭐, 결국 남의 애다 이거겠지.

내 반듯한 외모도 한 몫 했을 거 같긴 하지만.

“그럼  먹으러 가시죠.”
“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단체 소풍을 나온 듯한 가족 무리에 끼어들었다.

‘김칫국 마시지 말자. 애 아빠 없다고 확정된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있을 애가 불쌍해서 있는 거잖아. 어차피 남는 시간 떼우는 거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괜한 기대감을 품지 않으려고 억지로 머릿속 생각을 심어둔다.

'그래도 진짜 미망인이면……. 크, 생각만 해도 꼴리네.'

허나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응큼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