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4. 두 번째 히로인(2) (29/152)



〈 29화 〉4. 두 번째 히로인(2)

결과적으로 그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나 나는 그다지 낙담하지 않았다.

소설에서도 정확한 날짜가 묘사된 것도 아니다.
그저 소설의 흐름에 따르면 슬슬  시기쯤에 나타날 것이라 예상할 뿐.
애초에 처음부터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일상에는 자연스레 상하차 아르바이트가 포함되었다.

모델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주말을 제외한 대부분을 물류센터로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몸도 움직이고 돈도 벌고, 일하는 사람들이랑 적당히 안면도 트고.
평소 집돌이였던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렇게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

나는 그 날도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퇴근시간에 맞춰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아, 좀 비켜요!”
“여기도 자리 없어요!”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 내의 불쾌지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하철 내부의 땀 냄새와 텁텁한 공기는 끔찍한 불쾌함을 주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에어컨을 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려는 6월 중순에 접어들 무렵, 초여름임에도 벌써 25도를 넘나드는 지하철 내부는 가히 지옥에 버금갈 정도였다.

하, 이 정도 되니까 나도 힘드네.

‘죽겠다…….’

초월적인 육체를 지녔다고 해도 불쾌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거기에 신진대사가 좋아지다 보니 이전보다 땀도 훨씬 많이 흘리는 몸이 되었다.

부대끼는 사람들 속에서 내 인내심도 슬슬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애초에 정조역전세계인데 내가 굳이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웬만한 여자는 내가 말 거는 것만으로도 쉽게 따먹을  있는 세계잖아. 그런데  놈의 히로인에 고집하면서 이렇게 개고생을 할 필요가 있어?’

일주일을 이러고 있자니 점차 회의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나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끝장은 봐야지.’

그래도 지금까지 한 게 있는데 아까워서 어떻게 그만 두겠는가.
그 생각만으로 나는 버티고 있었다.

‘좀 더 붙는 바지를 입고 와야 되려나……. 아니, 그러다가 저번처럼 또 괜한 아줌마나 유혹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심지어 중간에 성추행을 당한 적도  번 있었다.

대놓고 엉덩이를 슬슬 문지르는 느낌에 그 때는 벌써? 라고 생각하면서 희희낙락했었다.
고작 3일 만에 성공한  알고 말이다.

허나 손을  잡아챈 상대방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히로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했던 가느다란 팔이 아닌, 퉁퉁 분 것 같은 팔뚝.
거의 엄마뻘 되는 여성의 얼굴을 보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래……. 여긴 아줌마가 성추행을 하는 세계였지.’

배가 툭 튀어나온 50대 아줌마가  엉덩이를 슥슥 만진다고 생각해 보라.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솔직히  모습을 확인한 순간 황당하기도 하고, 내가 생각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대로 경찰서로 가려고 했다.

허나 다음 역에서 함께 내리니 아줌마는 엄청나게 처량한 표정으로 애원을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안 그럴게. 응? 나 정말 처음이야. 정말 뭐라고 사과를 해야 될지…….
-에휴…….

정조역전세계로 오면서 이런 일이 언젠가벌어지리란 예상은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처음 당한 성추행임에도 당황스러움과 분노보다는 안쓰러움이 앞섰다.

심지어 나이대도 엄마뻘 되는 사람이 아닌가.

아무리 정조역전세계라고는 하지만……. 막상 처량한 표정으로 싹싹 비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머리로는 이곳이 정조역전세계인 것을 이해하지만, 막상 가치관은 원래 세계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엄마뻘 되는 사람 그러는 걸 보고 있자니 뭔가 딱한 기분도 들고…….
경찰서까지 가자니 여러모로 들게  수고와 시간이 아깝고…….

그렇게 그냥 보내주는 걸로 끝내버렸다.

-다음에는 절대 안  드립니다.
-물론이지! 내  그러면 이 손을 자르고 말지!

나는 멀어지는 아주머니를 보며한숨을 푹 쉬던 그 날을 떠올렸다.

지금에 와서는 제발 그 다짐이 겉으로만 하는 다짐이 아니기를 빌 뿐.

‘생각이 짧았어.’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깝기는 하다.
어떻게 잘 입을 털었으면 합의금 정도는 받아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뭐, 그래도 이미 지나간 일이야 어쩌겠는가.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도 배웠기도 하고, 그냥 인생 공부 번 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애초에 내 목표는 아줌마한테 붙잡혀서 돈을 뜯어내는 게 아니었다.
돈이야 언제든 벌 수 있기도 하고.

‘얘는 언제쯤 나타나는 거야.’

그렇게 한 주 동안 지속되는 지루함과 사람들에 끼인 불쾌감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이, 드디어 내 노력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

슬그머니 엉덩이를 스쳐지나가는 손등.

내심 희열을 느끼면서도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은 실수인지 고의인지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지나가다 실수로 스친 걸지도 모르고.’

현재 이곳은 사람이  들어찬 지하철 안.
움직이기조차 버거운 상황 속에서 방금 전의 감각을 성추행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벽에 기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두 번째 히로인의 경우에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성격의 인물.
만약 내가 함부로 반응을 보이는 순간 그대로 나를 포기하겠지.

그렇다면 나와 그녀와의 접점은 그걸로 끝이다.

‘신중하자.’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지 약 20초 정도 지났을 무렵.

“이번 역은 XX입니다. 내리릴 분은 오른쪽…….”

마침 다음 지하철도 다음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면서 내리려는 사람과 올라타려는 사람들 사이의 혼선이 빚어졌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엉덩이를 지나가는 감각.

‘왔다……!’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도  길었다.
심지어  번 엉덩이를 살짝 움켜쥐기까지 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고의성이 다분히 느껴지는 손이었다.

‘흥분하지 말자.’

나는 떨리는 심장을 겨우 겨우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얼굴이 마주친다면 그대로 도망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직은 간만 보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미끼를 물때까지 조금만  참자.

곧이어 문이 닫히고 다시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사람들 속에 이리저리 치인 나는 어느새 출입문 바로 앞에서 꽉  채로 서 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양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곧이어 열차가 출발하면서 다시 한 번  엉덩이를 만지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다시  번  엉덩이를 주물럭.

허나 나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아냐.’

내 반응을 살피듯 손이 내 엉덩이를 슬쩍 슬쩍 만져댄다.
낚시를 하는 어부의 강태공의 심정으로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는 내 모습에 용기를 얻은 것일까.

주물럭.

잠시 만지고 곧바로 떼던 손놀림의 머뭇거림이 점차 길어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아예 내 엉덩이를 슥슥 문지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손은 마른  같은데.’

이제는 거의 대놓고 비비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엉덩이에 감각을 집중했다.
상대방의 나이를 짐작하기 위함이었다.

‘달라.’

확실히 이전의 통통했던 아줌마가 만지던 느낌과는 다르다.

이건 분명 아가씨, 최소 30대 이하의 손이었다.
거의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상대방의 손길은  단단한 엉덩이를 쓰다듬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트레이닝복 너머로 점차 상대방의 손바닥이 점차 과감하게 내 엉덩이를 훝어 내려갔다.
설마 바지 안쪽까지 들어오진 않겠지.

그렇게 얼마간을 있었을까.

콱!

과감하게  둔부를 잡는 악력.
생각지도 못한 과감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공장소에서 너무 과감한  아냐?

“큭큭…….”

처음으로 보인 내 반응에 곁에 있던 상대방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치고는 꽤나 앙증맞은 목소리였다.

음, 일단 목소리는 합격점이고.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데…….’

얼굴만 보면 분명 예쁠 테니까 알아차리긴 할 터.

하지만 두 번째 히로인의 경우는 굉장히 치밀한 성격이다.
이렇게 치한짓을 하는 것조차 도망칠 자신이 있어서 저지른 것일 테고, 설령 걸린다고 해도 시치미를 땔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해왔을 것이 뻔하다.
소설에서도 딱 그런 전개였으니까.

아마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먼지처럼 사라지겠지.

‘더 참아야 하나…….’

그래,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완전히 미끼를 물 때까지.

얌전히 있는 나를 좋은 먹잇감이라 생각한 것일까.

곧이어 그녀의 손길이 점차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우…….”

한숨소리와 함께 아래쪽에서 뱀처럼 스르륵 기어가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진다.
슬쩍 고개를 숙이자 가느다란 세련된 느낌의 액서서리가 있는 가느다란 팔  허리 쪽을 가볍게 쓰다듬는 게 보였다.

곧이어 아래쪽으로 내려온 손길이 내 아랫도리를 확인하듯 더듬거렸다.
그런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은 바로 사타구니.

뭘 확인한 것인지는…….  안 해도 알곘지.

“후후.”

이제서야 내가 즐기고 있다는 걸 확신한 것일까.
마침내 경계심을  그녀가내  뒤로 작게 웃는 게 들렸다.

“아저씨.”

후우, 하고 입김을 불어넣듯이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

슬그머니 나를 부른 그녀가 몸을 한껏 밀착시키고는 내 허리 아래쪽을 슬그머니 감싸 안기 시작했다.
 뒤로 푹신하게 닿는 그녀의 가슴이 나를 자극했다.

“이런 거 좋아하나 봐?”

여전히 내 고간을 주물럭거린 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더 만져줬으면 해요?”

이건 월척이군.

이제는 슬슬 고개를 돌려도 되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확신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특징.
히로인 다운 압도적인 외모.

내 옆에서 나를 성희롱하고 있는 이 여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소설 속 히로인 중  명이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죠.”

순간 넋을 잃을 뻔한 정신을 겨우 붙들며 내심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내 말에 그녀가 한 번 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변태 맞네.”

그리 말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손길은 내 고간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덕택에  꼬추는 팬티에 끼어 아플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입술은 슬쩍슬쩍 내 귀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상황에, 주변 사람들이 들리지 않게 속삭이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건 안 커지고는 못 배기지.

“설마 퇴근길에 이런 개 변태를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쪽만 하겠어요?”
“여자는 원래 이런 생물이라고요? 오히려 이런 짓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아저씨가 이상한 거죠.”
“뭐, 피차 선수끼리 시간 낭비는 그만둡시다.”

그리 말한 나는 앞섬을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손목을 슬며시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불어질 듯 얇은 손목이었다.

“뭐야? 그만두게?”

내 움직임에 그녀의 목소리에서 살짝 경계하는 기색이 묻어나왔다.
나 참, 여기까지 와놓고는 경게를 하는 건가.

나는 그런 그녀를 안심시킬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이대로 내릴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이렇게 커졌는데.”
“그것도 그렇네.”
“일단 내려서 얘기합시다.”
“……계속할 셈이야?”
“당연히 계속 해야죠. 그럼 이대로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이게 말이야 방귀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간만 보고 끝내자고?
내가  만나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알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말투에 그녀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허, 이거 내가 대박을 잡았네. 알았어.”

그리 말한 그녀의 손길이 점차 거둬졌다.
그제서야 나는 차분히 발기한 자지를 작게 만드는  집중할 수 있었다.

“…….”
“…….”

우리는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날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로  것인지 가만히 서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떠나지 않았음은 알 수 있었다.

이미 밀착한  뒤로 그녀의 요염한 숨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으니까.

거 참, 이러다 또 커지겠네.

“이번 역은 XX입니다. 내리실 곳은 오른쪽……,”

다음 역에 도착한 나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전철을 나왔다.
물론 혹여나 도망가지 않도록 그녀의 팔목을 붙잡은 채.

다행히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그녀도 나와 함께 전철을 나왔다.

“휴우.”

나오기 무섭게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진짜 어마어마했네.”

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래로 살짝 묶은 검붉은 머릿결.
진하게 염색을 한 것과는 확실이 차이가 나는 자연스러운 머릿결이다.

그 아래로 보이는 이목구비도 평범한 사람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눈, 립스틱이라도 바른 듯 진한 입술, 오똑한 콧날까지.
기본적인 인상만을 봐도 날카로운 기색이 엿보이는 얼굴이다.
그것은 이미 한국인의 인상과는 확연히 다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그것을 보면서 나는 확신했다.

‘혼혈인 것도 설정대로네.’

굳이 상하차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만나기로 한 여자.
캐나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서 태어난 한국인 국적의 혼혈 미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소설의 두 번째 히로인, 박소진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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