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화 〉2. aqua man(2) (11/152)



〈 11화 〉2. aqua man(2)

다음날 일요일 아침.
화린과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 날.

현재 나는 영화관 안에 있는 대기실에서 화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되게 쳐다보네.’

그리고 그런 나를 중심으로 묘하게 쏟아지는 시선.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시선이 느껴진다.

당연히 그 시선의 대부분은 여자.

‘의외로 말은  거네.’

뭐, 쳐다보는 게 죄도 아니고.
귀찮게 안 한다면야 별 상관 없지.

그렇게 적당히 시선을 즐기면서 멍하니 있던 찰나.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

문득 근처에 있던 커플 한명이 갑자기 다투기시작했다.

“뭐, 뭐가?”
“몰라서 물어? 계속 어딜 보는데!”
“당연히  봤지, 뭔 소리야…….”
“입에 침이나바르고 말해!”

시선을 돌리자 날 잔뜩화가 난 남성을 향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심지어 잔뜩 뿔이 난 남자가 눈앞에 있으면서도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게 아닌가.

흠, 저건 글렀군.

“……아, 됐어.  갈래.”
“자, 잠깐만! 어디 가? 종훈아!”
“따라오지 마!”

아예 삐져서 몸을 홱 돌리는 남자.
그런 남자의 모습에 그제야  여자도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새침한 남자와그걸 달래는 여자라니.

“하아…….”

재밌는 구경거리지만 그 모습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문득 어제 친구들과 만나  대화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라는 놈들이 어째…….”

아싸인 나에게 친구라곤 해봐야 고작 세 명.
그것도 모두 거시기 달린 녀석들 뿐.

하지만 이 세계에 온 뒤로 나는 그들을 은근히 피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수도승 같았던 딱 한 명만 빼고.

아무리 불알친구라고 해도 말투가 진짜 여자애처럼 바뀌니까  거시기한 게…….
도저히 안 되겠더란 말이지.
방금 새침하게 몸을 돌리던 남자처럼 말이다.

“한심하다 진짜…….”

정조역전세계라 해서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구나.
그나마 한 명은 여전하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려나.

“오빠!”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상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화린이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일찍 오셨네요?”

활기찬 모습으로 꾸벅 인사를 하는 화린.
지금껏 봐온 교복 차림이 아닌, 귀여운 체크무늬 멜빵치마에 털이 복슬복슬 올라온 스웨터 차림새는 평소의 깜찍한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뭐, 얘는 뭘 입어도 귀여울  같긴 하지만.

“주말이라시간이 남아서.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잖아.”

내 말에 화린이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이런 말 한 것만으로도 저런 반응이라니, 역시 귀엽네.

“히힛.”
“갑자기 왜 웃냐.”
“그냥 좋아서요.”

작게 웃은 화린이 근처에 있는 무인발급기를 가리켰다.

“그럼 영화표 끊고 올게요.”
“그러면 그 동안 내가 팝콘 사올게.”
“아, 제가 살게요.”
“에이, 영화 보여주는데 팝콘까지 사게 할 수는 없지.”
“으음…….”
“됐으니까 내가 살게. 음료수 뭐 마실래?”
“그, 그러면 전 콜라로요.”
“오케이.”

멍하니 바라보는 화린을 뒤로 한  나는 팝콘 2인분과 음료수를 사러 갔다.
금방 뽑을 수 있는 무인발급기와 달리 먹을거리에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표 뽑았어요, 오빠.”

금세 표를 뽑아온 화린이 내게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 뭐하러 따라온대.

“그럼 저기 앉아서 기다리고있어.”
“괜찮은데.”
“뭐하러 둘이 서 있어. 앉아 있어.”
“치.”

뭐가 불만인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서는 화린.

 참, 이 세계로 와도 여자 마음은 모르겠네.

‘역시 팝콘은 카라멜이지.’

곧이어 주문을 마치고 화린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2인분 사이즈의 팝콘과 콜라 두 개를 들고 오자 화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참, 앉아 있으라니까   듣네.

“아, 오빠. 제가 들…….”
“아, 괜찮아. 무겁지도 않은데 뭘. 그보다 저기 빨대 좀 가져다줄래?”
“아, 네.”

내 말에 총총걸음으로 빨대를 들고 오는 화린.
나는 곧바로 그녀가 꼽은 빨대를  빨았다.

거기에 살짝 튀어나온 카라멜 팝콘 하나를 입으로 쏙.

“크.”

단짠단짠? 그런 게 어딨어.
그냥 단 게 짱이지.

“저도 콜라 주세요.”
“자.”

내가 먹고 있는 모습이 맛있게 보였던 모양이다.
콜라를 가져간 화린이 쪽쪽 콜라를 마셨다.

“맛있다. 히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작게 웃으며 콜라를 흡입하는 화린.
나는 그런 화린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 순간, 시선이 마주친 화린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꺼내들었다.

“오빠 그거 알아요?”
“뭐.”
“오빠 진짜 멋있는  같아요.”
“엥?”

얘는 갑자기 뭔 소리래.

의아한  표정을 본 화린이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그, 뭐라고 해야 되지? 맨크러쉬? 약간 그런 느낌.”
“맨크러쉬……?”

맨크러쉬는  뭔데.
걸크러쉬의 반댓말 같은 건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하는데 가끔씩 이런 생소한 말이 나올 때마다 벙찌게 된다.

내 물음에 화린이 고민하듯이손을 입가에 댔다.

“음, 그러니까……. 오빠는 좀 다르다는 거예요.”
“뭐가 다른데?”
“다른 남자들이랑 다르다고요.”
“어디가 다른데?”

내 말에 화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릴 하려고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는 걸까.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뭐, 어차피 오빠는  여자로 보지도 않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응.”
“……거기선 그냥 아니라고 해 주지.”
“네가 말해놓고 그러냐.”
“치……. 아무튼 저 사실 남친 사귀었었거든요.”
“그래?”
“네. 아, 물론 당연히 고등학생이요.”

그야 당연히 그랬겠지.
설마 대학생이랑 사귀진 않았을 테니까.

허나  말을 하면서 화린은묘하게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물론 나는 일부러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괜히 애한테 이상한 기대감 품게 하면  되니까.

“……뭐, 그랬는데.”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곧바로 화린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걔는 맨날 약속시간에 늦게 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
“네. 거기다 돈도 맨날 내가 쓰고.”
“그건 좀 너무하네.”
“그쵸? 심지어 지가 사고 싶은 것까지 그러더라니까요. 그러면서 눈치는 또 얼마나 주던지. 아, 이제 와서 생각하니까 빡치……. 가 아니라 화나네.”

서둘러 말을 정정한 화린이 말했다.

“아무튼 둘  고등학생이라 겨우 용돈  쓰는 거잖아요. 그런데 맨날 나보고  달래요. 웃기지 않아요?”
“나야 성인이니까 걔랑 비교하는 건 좀 다르지 않을까? 물론 너 혼자 사는 건 확실히 잘못되긴 했지만 말이야.”
“차라리 그거뿐이면 이 말 시작도  했어요. 걔는 지가 살 거 사놓고 꼭 나한테 들게 시켰다니까요? 쇼핑만 한다 하면 나를 짐꾼 취급하고. 으, 생각하니까  열 뻗쳐서.”
“잘 몰라서 그랬던 걸지도. 겨우 고등학생이잖아.”
“그렇게 치면 저도 고등학생인데요?”
“……그것도 그러네.”
“아무튼 오빠는 그런 점에서 다르다는 거예요.”

화린이 말하려는 바가 무슨 뜻인지는 대충 이해가 된다.
나도 어제 친구들과 만나며  느낌을 뼈저리게 겪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모든 남자가  그렇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허나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에서는 절로 남자를 비호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적어도  세상의 모든 남자가 그런 식이진 않을 거라는 마음을 담아서.

“괜찮은 남자도 많아. 너야 하필 그런 애를 사귀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네, 맞아요. 저도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화린이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웃었다.

“지금처럼 오빠 같은 남자들이 있단 걸 알았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나 말고도…….”
“매너만 좋은 게 아니라 얼굴도 존잘이지, 심지어 말도 잘 통해, 게임도 좋아해……. 크, 미쳤다 진짜.”

그리 말하는 화린의 눈빛은 그야말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왜 갑자기 날 찬양하는 시간이 된 거지.

“오빠 사실 어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아니에요?”
“오글거리는 소리  그만 해라…….”
“아니, 진짜 오빠 보면 그런 생각 든다니까요.”
“…….”
“거기다, 이렇게 잘났는데 왜 여친도 안 만드는지 모르겠……. 아, 아니! 이건 말실수! 으하하!”

자기가 말해놓고 잊으라는 듯 홱홱 손사래를 치는 화린.
혼자  치고 장구 치고  하네.

“크흠!”

황당한 내 모습을 보며 화린이 민망한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오빠는 여친 사귀지 마요. 기왕 사귈 거면 나중에 저랑 사귀는 걸로. 알았죠?”
“너 지금 설마 고백하는 거냐?”
“전부터 좋아하는 티 많이 내지 않았어요? 모르는 척은.”
“어이가 없네…….”
“그래서 대답은요?”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나?”

나는 그런 화린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고등학생이랑 사귀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지.”
“으, 진짜.”

능글맞게 대답하는 내 모습에 분한 표정을 짓는 화린.
그런 화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영화나 보자.”
“알았어요…….”

아무튼 귀엽다니까.

이후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한 뒤.
우리는 곧이어 근처 카페로 가서 즐겁게 잡담을 나누었다.

“영화 어땠어요?”
“솔직히 그냥 그렇더라.”
“그래요? 전 재밌던데.”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꺄르륵 웃으면서 얘기를 하는데, 나도 남자라는 생각이 들더라.

고등학생에, 하물며 역전세계임에도 여자애는 여자애다 이건가.
거기에 귀염상이기도 하고.

원래 세계에서 꼬추들끼리 얘기할 때랑은 즐거움의 농도가 차원이 달랐다.

‘이게 인생이지.’

아, 물론 애한테 이상한 생각 품거나  건 아니다.
진짜로.

“그럼  먹어요, 밥.”
“뭐 먹을래? 맛있는 거 사 줄게.”
“음, 그럼…….”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대화를 한 뒤.
우리는 곧이어 다음 장소로 향했다.

“여기?”
“네. 여기 맛있어요.”

그렇게 다음으로 결정된 장소는 바로 다름 아닌 집 근처 분식점.

아니, 얘는 기왕사준다는데  이리로 오냐.
근처로   설마설마 했는데.

“맛있는  사준다니까.”
“전 떡볶이랑 김밥도 맛있는데요?”
“너 후회한다. 사준다고 할 때 먹어.  의외로 인색한 남자라고.”
“됐거든요.”

그렇게 내가  번을 물어도 한사코 고개를 젓는 화린.
뭐, 나야 돈 굳어서 좋긴 하다만.

그렇게 우리는 분식집에서 조촐한 식사를 함께 했다.

눈치 보지 않고 우걱우걱 김밥을 집어넣는 화린의 모습이 퍽 우스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뭐, 잘 먹으면 좋지.

그렇게 떡볶이 3인분과 김밥 4인분을 해치운 뒤.

입안에 떡볶이를 가득 문  화린이 말했다.

“우물우물……. 이해 머하효?”
“뭐라는 거야.  삼키고 말해.”
“꿀꺽……. 푸핫. 이제 뭐 하냐고요.”
“너 양념 다 묻었다.”
“어디요?”

못 말리겠네 진짜.

“으휴.”

가볍게 한숨을 쉰 나는 티슈를 꺼내들었다.
내가 티슈를 가져가자 화린이 깜짝 놀라 고개를 젖혔다.

“자, 잠깐만요! 제가 할 테니까!”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으……. 괜찮은데…….”

손을 거두지 않는 내 모습에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슬쩍 얼굴을 내미는 화린.
피식 웃은 나는 그대로 볼에 묻은 양념을 닦아 주었다.

“칠칠맞기는.”
“…….”
“다 먹었어?”
“네에…….”
“그럼 이제 집에 갈까.”
“네? 벌써요?”
“벌써라기엔 슬슬 해도 지는데.”
“조금만 더 놀아주면 안 돼요?”

아쉽다는 듯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화린.
그런 화린을 보고 있자니 나도 괜히 마음이 약해진다.

흠, 밤엔 나도 따로 약속이 있는데.

뭐, 아직 6시도  됐으니까……. 괜찮겠지?
어차피 근처기도 하고.

“그래.”

결정을 내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피시방이라도 갈까.”
“오빠도 게임 진짜 좋아하나 보네요.”

내 말에 화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들은 피시방 별로 안 좋아하던데.”
“나는 피시방 좋아해.”
“아무튼 특이하다니까.”

어이없다는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인 화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요.”

허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화린을 보고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런 날 보며 화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요?”
“같이 해도 괜찮으려나 몰라.”
“네? 무슨 소리에요?”
“너 실버잖아. 나랑 수준  맞을 텐데.”

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곧이어 터질 듯이새빨개진 얼굴로 화린이 빽 소리쳤다.

“와, 씨!  골드거든요! 오빠랑 하려고 얼마나 고생해서 올려뒀는데!”
“브실골이면 나한텐 다 똑같은데.”
“와, 진짜! 오빠 괜히 발렸다고 삐지지나 마요!”
“알았다, 알았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예 내 팔뚝 소매까지 붙잡고 일으키는 화린.

패드립은 참아도 게임 못한다는 말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는데.
설마 정조관념 말고 이런 것까지 바뀐 건 아니겠지?

“빨리요!”
“알았으니까 그만 잡아당겨.”

쓴웃음을 지은 나는 못 이기는  화린을 따라 나섰다.


***

화린과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열 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그나마 피시방에 미성년자는 10시까지만 해야 된다는 법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 그게 아니었으면 새벽까지 죽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럼 다음에 봐요!”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고 떠나가는 화린.

점차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고등학생 아니랄까봐 하루종일 활력 하나는 넘치는군.

물론 나도 보정을 받은 몸이라 육체적으로 그렇게 피곤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지치는 느낌이라고 해야 될까.

사실 원래라면 수갑을 차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긴 하다.
내 외모도 바뀌고, 정조관념도 반대가 됐으니 남들 보기 이상하지 않을 뿐.

역시 이런  보면 아직은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이 안 된 걸지도 모르겠네.

“그럼 2차전 시작인가…….”

한숨을 돌린 나는 중얼거리며 폰을 꺼내들었다.

뭐,  망설여지긴 하는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약속 대상에게 톡을 보냈다.

[나] 화린이 집 갔다
[나] 나도 10분 안에 갈듯

미리 약속한 그녀란…….
바로 주화연.

참고로 약속이 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시간에 만난다는 시점에서 더더욱.

‘얘도 어떻게 하긴 해야 되는데.’

사실 화연에게는 나도 여러모로  말이 많이 있었다.

아직 이 세계에 제대로 적응도 하지 못한 만큼,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해 오는 화연에게는   제대로 얘기를 해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는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우우웅.

톡을 보내기 무섭게 울리는 전화벨.
10초도 안 돼서 울리는 벨소리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와, 진짜 보낸지 5초도 안 지났는데.

“……여보세요.”
“헤헤.”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 참, 그렇게 좋나.

“헤헤헤.”
“말을 해, 말을.”
“헤헤, 응. 그럼 지금 집 가면 되는 거지?”
“와서 뭐 하려고.”
“뭔 소리야. 약속했으면서.”

슬쩍 시치미를 떼자마자 곧바로 정색조로 바뀌는 화연의 말투.

‘어우, 집착 보소.’

일단 약속을 해서 이렇게 연락을 한 거긴 하지만…….
왠지 피하고 싶어지는 기분은 대체 어째서일까?

“우리 오늘 보기로 했잖아.  또 그래, 응? 내가  잘못한 거 있어?”

대답이 없는 반응이 불안했던 것일까.
갑자기 다급하게 말을 이어가는 화연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울려 퍼진다.

뭐, 어차피 이 여자가 원하는 목적은 단 하나.

‘결국 또 섹스하자 이거지.’

물론 사실 나도 그 목적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그저 너무 들이대니 색기가 안 느껴진다는  문제일 뿐.

……그래도 약속까지 했는데  까는 건 아무리 그래도 아니지.

“알았어.”

나는 한숨을 쉬고픈 것을 참으며 대답했다.

“오든가 말든가.”
“아싸!”
“대신에.”

물론 나도 미리 준비해둔 바가 있다.

나는 이전의 그것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전에 선물해준 옷 기억나지?”
“어?”
“그거 무조건 입고 와라.”
“어어어……?”

한창 신이 났던 목소리 톤이 순식간에 쭉 내려간다.
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당황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지, 지금? 진짜로?”
“어. 지금. 진짜. 무조건 입고 와. 안 그러면 안 해.”
“아니, 현수야…….”
“어차피 차도 있다면서. 다 오면 차에서 갈아입어.”
“그, 그래도 그렇지. 그냥 너희 집에서 갈아입고 하면  될까?”
“싫으면 말던가.”
“자, 잠깐!”

핸드폰 너머로 습하 숨을 고르는 소리.
아마도 고민이 되는 거겠지.

뭐, 솔직히 우리 집에서 갈아입어도 별 상관은 없지만 굳이 얘기하진 말자.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거 같고.

“하아.”

한참을 망설이던 화연이 전화기 너머로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알았어."

결국 안 한다고는 안 하네.
어떻게든 나랑 하고 싶다는 의지가 전화기 너머로도 전해지는 거 같다.

"입고 올게. 진짜 취향 특이하다니까…….”
“오케이. 그럼 도착하면 전화할게.”
“알았어.”

그렇게 통화를 끊은 나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이거 아까 전까진 그냥 그랬는데…….
갑자기 좀 기대되네?

"흐흠~♬"

집으로 돌아가는 사이 절로 콧노래가 새어나온다.

참고로 입고 오라고 부탁한 옷이란  별  아니다.
그냥 전부터 상상했던 플레이를 소소하게 해보고자 하려는  뿐.

이름하야 코스튬 플레이.

“흐흐흐.”

집으로 가는 내 입가로 징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전과 달리 좀 색기 있는 화연의 모습을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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