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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화 〉 만신전 [완] (139/139)

〈 139화 〉 만신전 [완]

* * *

나는 길게 검을 내리그었다.

깊은 상처, 흘러내리는 악마의 피.

악마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피를 처음 보는 것인 마냥 손가락 끝에 묻히고 만지작거렸다.

치명상을 입은 악마는 고개를 들어 나와 레리아나의 검을 보았다.

"저는 여기까지인가요? 사과드리지요. 그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검이군요."

"고맙군."

이미 승패는 갈라졌다.

바리스는 사람들을 지켰고, 헤스티는 마법에 집중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다.

디펜그라드 사제가 사도로 각성하면서 바리스의 뒤를 바쳐준 덕분에, 바리스는 사람들을 지키는 동시에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이른 밤의 악마 더스크를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볼 수 있었다.

나와 바리스 사이에서 악마는 패배했다.

"짙은 밤에 침식당하듯이 사그라질 시간이 왔군요. 하지만, 미련이 남는군요. 기억하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묻고 싶군요. 저, 당신과 만난 것이 처음 아니죠?"

"처음이 아니야."

"역시나 이 전투도 반복되어왔던 거군요."

"그건 조금 달라. 네가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다. 예전 회차에 너와 만났던 곳은 미궁 안이다."

"호오, 그래요?"

부서져 가는 악마가 미소지었다.

"변화인가요. 반복되지만 변화가 일어난 건가요? 그럼, 이번 회차, 이 이야기를 다음 차례에 당신과 마주할 나에게 전해주겠어요?

다음 차례의 나는 분명히 보상할 겁니다. 아, 다음 차례의 내가 믿지 않을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저의 '진명'을 가르쳐드리죠."

"약속할 수 없는데."

"아아, 역시 악마라 믿기 어려우시려나?"

악마가 아이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야. 미궁 안의 너를 다시 보지 않을 거니까."

"호오, 그 말씀은."

악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뭉개져 가는 눈으로 자신이 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어버스나이트 신성과 디펜그라드 신성, 두 미약한 신성의 향기가 길을 열었군요. 저보다 늦게 잠식당한 분 아니랄까 봐. 한 수를 숨기셨군요.

뭐, 당신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건, 다른 세계에서 온 뼛조각의 공명도 도움이 되었을 테고요."

나는 뼛조각을 담은 목걸이를 꺼냈다.

이어 아리나란을 따르는 아리시, 검은 날개 소녀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 세계는 다른 세계였다.

"그래 다른 세계. 미궁은 다른 세계를 침식해 미궁층으로 고정시켜버리지. 그리고 그 짓을 나 역시 할 수 있게 되었어."

"하아, 패배하고 소멸되어가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미궁님과 당신, 미궁과 숲속의 탑, 비교할 격이 아니지 않나요?

당신의 숲속의 탑은 저 역시 느꼈답니다. 미궁이 바닷속에서 나는 고래라면, 당신의 '숲속의 탑'은 하루를 사는 벌레랍니다."

"벌레는 미비하지. 하지만 똑같은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지."

"그 말씀은…."

"침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렇군요. 그래서, 다음 차례의 저와 만날 수 없다는 거군요.

침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분리 역시 엿볼 수 있었을 테니까. 다른 세계를 인지하고 끌어당겨 침식하는 것에 비하면 분리는 쉬울 테죠.

원래부터 다른 세계였던 것을 되돌리는 것이니까, 강제로 합쳐놓은 것을 분리하는 것일 뿐이니까. 하아, 아쉬워라. 아쉬워라. 지켜보고 싶은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아, 그래도, 미궁에서 나와서 소멸해서 다행이야."

이른 밤의 악마, 무성의 악마가 빙글빙글 돌았다. 한 바퀴 돌 때마다 몸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소멸하면서도 기뻐했다.

내가 분리를 해낸다면, 나와서 소멸한 악마는 미궁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기에.

*

하늘에서 내리쬐는 한 줄기 햇살.

사람들이 환희하며 떨었다. 두 손을 들어 올리고 포효했다.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몬스터 웨이브 시작부터 세상을 덮었던 어스름, 이른 어둠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몬스터 웨이브가 끝났음을 확신했다.

나는 바리스를 마주했다. 헤스티를 바라보았다.

"바리스. 헤스티."

"네, 준영씨."

"히히, 수고하셨어요. 어라, 다시 출발하는 거예요?"

이어서, 나는 수희와 네리미아를 소환했다.

"수희야."

"끝났어? 으으, 일단 좀 씻고 싶어."

"분위기 보니까 아닌 것 같아요."

투덜거리는 수희를 향해 네리미아가 속삭였다.

"에리, 에드샤."

"네.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전투가 끝난 거 아니지? 바로 출발하는 거야?"

나를 믿는 에리를 꼭 껴안았다. 나를 찬찬히 살피며 묻는 에드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자. 만신전으로."

"으으, 저 혼성 부대랑 보상 이야기는 하고 가야 하는데."

수희가 투덜거리면서도 뒤를 따랐다.

나는 수희에게 턱짓으로 시란느와 오노르를 가리켰다.

함께 싸웠던 둘은 만신전까지 따라오지는 않지만, 왕국군과 사람들에게 권력을 얻어낼 것이다.

만신전에서 돌아왔을 때를 위한 토대를 쌓아둘 것이다.

혼성 부대는 시란느와 오노르가 가진 힘에 상관없이 따를 것이다.

누가 그들을 구원했는지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구원할 정도로 강한 우리를 보았고 검 끝이 자신을 향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악마를 소멸시키면서 또다시 올라간 나의 격은 이전의 인지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느끼지 못하지만, 악마와 악마가 이끄는 것들과 전투를 보았다.

우리가 가진 힘을 보았다.

시란느와 오노르에게 얌전하게 모든 것을 바치지 않겠지만, 둘 역시 성장한 만큼 우리가 돌아왔을 때를 위한 토대를 조성해놓을 것이다.

*

판테온.

만신을 위한 신전.

그리고 미궁이 집어삼킨 다른 세계의 신들 가둔 곳.

신전이라는 이름의 감옥 속에서 다른 세계의 신들은 격을 잃고 한낱 신성이 되어버렸다.

만신전에 갇힌 죄수들은 구멍을 뚫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들이 도망치기 위한 구멍으로.

하지만, 빠져나가지 못했다. 구멍은 그저 인간들에게 힘을 편린을 보여주고 유혹하는 경로가 되었다.

*

커다란 바위도 비틀림이 만든 작은 틈 하나에 부서진다.

만신전에 갇힌 신성이 미련과 원망으로 만든 그 구멍은 미궁층과 미궁심층을 분리할 수 있는 틈이 되었다.

*

갈라졌다.

미궁의 계단이 끊어졌다. 여러 세계에서 기원한 미궁층을 연결하던 통로이자, 붙잡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다.

부서졌다.

신성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광소를 터트렸다. 몇몇은 소멸을, 몇몇은 세계의 갈라짐에 빨려 들어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운명마저 붙잡고 옮아매던 미궁심층 것들을 비웃으며 휩쓸려가고 혹은 사라졌다.

사라져가던 신성도, 비틀림으로 빨려가던 신성도 나에게 선물을 던졌다.

그들은 다른 이가 해준 일에 감사하고 보상하는 거룩한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한 존재였다.

힘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그들을 옥죄던 미궁심층을 원망하고 원망을 나를 향한 선물로 표현할 뿐이었다.

자신들의 선물이 언젠가 미궁심층을 찌를 단검이 되기를 바라면서.

*

분리된 미궁층은 떠올랐다. 분리된 미궁심층은 가라앉았다.

미궁심층에 머문 것들이 가진 격의 무거움은 저절로 미궁층과 미궁심층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

*

*

푸른 햇살이 아이들의 몸을 따듯하게 덥히고 부드러운 바람이 아이들의 뺨을 간지럽혔다.

나는 천천히 손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숲속의 탑 최상층에서 기다렸다. 대비하며 기다렸다.

용사는 어머니가 되었다. 할머니가 되었다.

나와 함께하며 격이 올라 인간의 한계를 넘고 수명과 노화를 극복한 바리스는 언제나 나와 함께 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다음 용사를 기다렸다.

용사는 현재 세계의 의지였다. 이 세계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세계를 잡아먹는 존재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그리고 쓰임이 다한 도구는 다시 창고로 집어넣는 법이었다.

나는 이를 거부했다. 내가 숨긴 바리스는 돌려줄 수 없다.

용사 바리스는 나의 것이다.

현재 세계는 바리스를 단념했다. 내가 숨긴 바리스를 포기했다. 대신 다음 용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나와 공존하는 현재 세계가 위험해지면 용사를 보낼 것이다.

살아가는 존재가 항상 그러하듯이 외부의 큰 적이 가까워지면,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일어서는 나에게 새로운 용사를 보낼 것이다.

*

*

*

광활한 숲.

수많은 하프 엘프들이 숲을 지배하며 삶을 영위했다. 바다와 이어지는 커다란 호수에서 하프 머메이드들이 번영을 구가했다.

대지의 힘을 품은 아이들이 자라나 미래를 대비했다.

그들의 늙지 않는 할머니 에리, 에드샤, 드리아데, 피리레, 네리미아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언젠가 있을지 모를 '다른 세계'의 접근을 대비했다.

숲속에는 거대한 길이 나 있었다.

인간의 유산임을 증명하듯이 단단한 바닥돌로 이루어진 인간의 길. 마치 인간 역시 이 세상을 지키는 이임을 주장하듯이.

수많은 탐색자들이 거대한 길을 지나 '숲속의 탑'에 올랐다.

죽음과 보상 둘 중 하나가 주어지는 숲속의 탑.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곳이기에 여러 소문이 흘렀다.

그중에는 탑의 주인이 여러 아내와 함께 최상위층에서 기다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최상층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탐색자가 없는데도, 탑의 주인이 미래를 대비할 새로운 용사를 기다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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