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사제 가랑트런트
* * *
"아아. 아아."
도망치던 탐색자가 탄성을 흘렸다.
인간이 품은 마음, 마음을 현상으로 발현할 뿐인 용사의 권능.
그러나,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본질을 볼 수 없고 타인을 외곽선으로만 파악하게 만드는 어둠 속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바리스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성으로 후퇴하세요."
빛을 품은 용사 바리스의 음성이 전장에 가득 찼다.
도망과 후퇴는 달랐다. 생존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패잔병은 자신과 옆을 바라볼 수 있을 때만 도망은 후퇴로 바뀔 수 있다.
희망은 자신의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리도록 팔을 지탱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들어 올린 검은 옆에 선 자의 검과 어울려 진형이 되었다.
무너지던 탐색자와 여러 교단의 인물, 그리고 주변 도시의 생존자와 타국에서 지원 나온 선발대까지.
혼성 부대가 도망자 무리에서 다시 싸울 줄 아는 부대로 바뀌어갔다.
어울려진 진형이 보란성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요르네스님, 요르네스님. 왜 이런 일이."
빛을 보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어버스나이트 사제 가랑트런트는 완전히 바스러져 사라져버린 사도를 애통하게 불렀다.
스스로 신성이 되고자 한 자, 내딛는 걸음이 큰 만큼 반발도 커서 자신을 유지하지 못 했다.
반발에 존재가 무너지고 말았다.
"왜 왜. 우리는 왜."
"가랑트런트."
"너, 너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 알고 이를 조장한 거 아닌가?"
단단한 육체로 거력을 일으키던 가랑트런트도 한낱 인간이었다.
약한 마음이 가랑트런트에게 속삭이는 것이다. 원망해도 될만한 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현실을 외면하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마음을 지탱하던 지지대가 무너지고 사라져버리자, 가랑트런트의 마음은 가장 쉽고 편한 상태, 남을 원망하려고 했다.
"어버스나이트는 역시 지키는 자다. 나이트라 불리는 의미를 잊지 마라."
나는 가랑트런트가 품은 패배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평상시부터 고뇌해 왔을 화두를 던졌다.
그가 보이는 요르네스를 향한 충성심은 단순한 충성심 그 이상이었다. 충성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가 나이트라는 의미에 심취했기 때문이라면, 어쩌면 그가 어버스나이트 신성과 가장 가까운 자일지도 몰랐다.
"혼돈이기에 순수를 갈구한다."
현실을 외면하는 만큼 약해져 가며, 그저 타인에 대한 원망으로 자신의 약한 마음을 보호하려고 하는 가랑트런트에게 나는 신성한 어구를 건넸다.
지켜야 할 것 잃어버린 자에게 위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잃을 수 없기에 지켜왔을 테니까.
하지만, 원래부터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지킨 자에게, 위로가 아닌 조언이라면 먹힌다.
"갈구는 부족하기 때문이지. 부족한 자는 당연히 괴롭다. 괴로워해라 가랑트런트."
"네놈. 네놈이 이 사달을 일으킨 거지?"
"뭐, 네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다만 조언을 하나 던져주지. 마녀 헤스티를 지켜라."
"무슨 말이냐? 내가 왜 네놈의 동료를 지켜야 하지?"
"이유는 네가 찾아야지."
가랑트런트는 물론 헤스티가 의아해했다.
헤스티는 자신을 마녀가 아닌 마법사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마녀에게 흔한, 광기가 보이지 않기에 마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성에게 얽매이지 않고, 외부의 힘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는 자는 마녀라고 부를 수 있다.
조화를 이루어내어 스스로 광기를 막아내었다고 해서, 마녀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 일어서서 순수를 이루었음이 더 중요했다.
"약한 인간아."
나의 말에 가랑트런트가 움찔 인상을 썼다.
반발하려다가, 단순한 무력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멈췄다.
그토록 사도 요르네스의 상실감에 절규하다가도 자신의 길을 이야기하자, 귀를 기울였다.
가랑트런트는 지킬 것을 잃어버린 자일 뿐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추모하기보다 내가 던져준 난제를 살폈다.
"가랑트런트."
가랑트런트는 예전 회귀 때도 나이트에서 더 오르지 못했다. 인간 이상의 격에 도달하지 못했다.
나와 함께 미궁 지하 20층 아래를 탐색하면서 사도 요르네스와 나에게 이용당했었다.
"하지만, 약한 인간은 갈구할 수 있지. 갈구하며 지킬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조언은 여기까지. 더이상은 가랑트런트가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버스나이트.
혼돈이기에 순수를 갈구하며, 순수를 지키기에 나이트라고 불리는 신성과의 연결은 그가 해낼 일이다.
그 이야기는 내가 풀어낼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회귀를 시작하기 전에 펼쳐졌던 이야기. 신성이 신성이 되기 전의 이야기와의 연결은 그가 걸어야 할 길이다.
나는 그저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일단 헤스티를 지키기 위해 합류하는 가랑트런트를 허락할 뿐이다.
*
"재미있군요."
"그래, 재미있지."
이른 밤의 악마와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부드럽게 몸을 숙이고 고개를 아래로 내려 감사를 표현했다.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다려준 악마가 웃었다.
"아, 괜찮습니다. 저도 즐겼으니까요. 제가 덮은 검은 어스름을 뚫고, 몇몇 신성이 힘을 발휘하는 모양입니다만, 물 위로 오른 물고기의 파닥거림일 뿐이지요. 어쩌면 미궁님의 의지일지도 모르고."
"미궁님?"
"아아, 그건 이야기하지 맙시다. 저도 님도 미궁님을 논할 격이 되지 못합니다. 하루를 사는 벌레가 별의 수명을 논할 필요가 없듯이."
"별보다 오래 사는 벌레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아? 시간을 멈춘 벌레님?"
"하하, 시간을 멈췄다니요. 그저 시간을 멈췄을 때 일어날 현상을 흉내 냈을 뿐입니다.
그리고 조금 기분 나쁜데요. 벌레라니요."
"그래, 벌레도 시간에 속한 존재지. 흐름에 순응하는 존재이고."
"저에게도 충고하는 건가요? 발버둥 치지 말라고. 하아, 흐름에 순응하라고? 하지만, 그건 그 흐름은 절대적일 때 이야기입니다. 한낱 인간도 강의 흐름을 바꿀 수 있지요."
이른 밤의 악마, 더스크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악마가 호기심이 많고 수다스럽다면 원하는 것이 있어서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에도 인간은 성으로 대피하고 전황이 바뀌고 있지만,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정보 수집을 더 추구한다.
이 악마 역시 미궁 아래에서 발버둥을 치는 존재다. 단지 더 아래를, 더 깊이를 볼 수 있기에 절망과 체념이 익숙할 뿐이다.
미궁이 열어주는 칸 안에서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이탈을 꿈꾼다.
"강은 흘러 흘러 세계의 끝에서 사라지는 걸까? 아니야. 흐름을 반복하지."
"?"
악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추상적인 이야기하지만, 이 대화 자체가 인간과 악마의 거래였다.
나에게 가치가 있거나 악마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전황을 좌우할 귀중한 시간을 내줄 리 없다.
"역시 너도 모르는군."
"설마, 당신은 흐름을 반복하는 존재입니까?"
"뭘 알고 있다면 너를 처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쉽군."
"호호. 과연. 제가 올라와야 할 이유는 당신이었습니까? 그저 조금 더 강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악마와의 거래가 끝났다.
바리스가 사람들을 구하는데 악마가 간섭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악마는 격을 상승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변화가 없는 악마의 모습에서 나는 역으로 정보를 얻었다.
"너 또한 미궁에 속한 조각일 뿐인 거지."
*
나는 레리아나의 검을 다시 잡았다.
핑크빛 검기를 일으켰다.
"너 여자는 아니지?"
"무성입니다만, 혹시 여성이길 원하십니까?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설마. 내 검이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호오 자상하셔라. 물건에 얽매인 혼, 비루한 존재에도 마음을 주시는군요."
"악마를 멸할 검인데, 그리 말하면 안 되지."
뭉클, 레리아나의 검이 핑크빛 기운을 흘려냈다.
평상시 적과 싸울 때와는 약간 다른 몽롱한 핑크빛.
나는 레리아나가 비루하다고 비하하는 악마의 말에 상처 입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저 부끄러워하고 있음이 느껴지니까.
악마가 비하하는 단어보다 내가 마음을 줬다는 말에 부끄러워하고 있으니까.
"시작하자. 약한 악마야."
"그래요. 강한 인간이시여."
바리스가 혼성 부대를 유도했고, 보란성으로 이끌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을 하나씩 제거했다.
하지만, 악마는 나와의 대화를 멈출 수 없었다.
그 역시 갈구하기 때문이다.
미궁님이라고 공손하게 말하지만,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미궁에서 벗어날, 이겨낼 방법을 찾고 있음을 의미했다.
멈춘 것들이 다시 움직였다.
검은 하늘 아래, 죽었지만 다시 움직이는 것들.
몸 절반만 남은 트롤이 내게 달려들고, 팔이 없는 고블린이 나의 다리를 노렸다.
쩔뚝거리는 오크가 몸으로 나를 덮으려 했다.
나는 그저 검을 휘둘렀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핑크빛이 흘러 선을 만들었다.
검 속에 갇힌 소녀, 레리아나가 기분이 좋아 노래를 부르듯이 선을 피워냈다.
나는 웃었다.
악마의 끈적거림도 전체 대화 중에 '내가 마음을 주고 있다'는 말만 기억하고 흐뭇해하는 소녀의 마음을 가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