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사도 요르네스
* * *
아리나란이 아리시를 꼭 껴안았다.
원래 바바리안 소녀였던 아리나란은 아리시를 동족의 아기처럼 느끼고 애정을 주었다.
부드러운 애정에 아리시가 조심스럽게 아리나란에게 기대었다.
"조심해."
"···."
아리나란의 당부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시를 아리나란이 걱정했다.
"안심해. 숲속의 탑으로 들어오는 몬스터는 내가 실시간으로 파악하니까."
나는 아리나란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수희까지 거들었다.
숲속의 탑에서 에리와 에드샤를 데리고 나가는 대신, 수희가 남았다.
그녀가 있으면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대응할 수 있다.
몬스터 일부가 방향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은 수희가 숲속의 탑 밖에 나와 있으면 수희를 추적해왔지만, 수희가 숲속의 탑 안에 있어 인지하지 못하면 주변 인간들을 공격하면서 퍼져나갔다.
그렇던 몬스터 일부가 한 곳을 향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유도를 한다는 의미였다.
'이른 밤의 악마, 더스크.'
나는 몬스터들을 유도할만한 상위 개체를 떠올렸다.
악마를 상대로 비행선은 효율적인 탈것이 아니었다.
지상의 몬스터를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악마는 날아다니는 존재였다.
상대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빠질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전장 근처까지 타고 간 다음, 내려서 지상에서 싸우는 것이 나았다.
하늘이 전장이 아니라면, 에리와 에드샤를 합류시킬 수 있기에 나쁘지 않았다.
에리와 에드샤가 지상에서의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만큼, 숲속의 탑에서 방어를 전담하던 둘을 데리고 나왔다.
*
*
*
보란성과 멀지 않은 마을.
어느 신성을 모시던 성소인지 알 수 없었다.
불탄 교단의 기울어진 상징물 위에 악마 더스크가 앉았다.
"어리석구나."
그의 시선이 성 밖으로 나와 늘어서는 보란성의 병사들에게 닿았다.
각 교단의 사도와 사제와 신도 역시 병사들과 함께했다. 지원으로 온 모란드 왕국의 선발대까지 함께해 사기가 높았다.
하지만, 악마 더스크는 내려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
*
*
보란성에서 각 교단의 생존자와 미궁 도시 피난민이 버티는 이유.
단순히 성벽과 해자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보란성은 미궁 주변 도시와 가깝진 않지만, 상인들이 오가는 성이었다. 당연히 미궁에서 성장한 전사들과 마법사 역시 들리고 머물곤 했다.
보란 성주와 성주 가문은 일반인이었다.
미궁에서 성장한 무법자들에게 취약한 일반인이었다. 그래서 무법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기사단과 병사들뿐만 아니라, 시설에도 투자해왔다.
보란성의 방어시설.
시설 그 자체만 보면, 한 성의 성주가 투자할 수 있는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이용한 방어시설은 시설만큼 마법사가 중요했다.
범용 마법사만 있어도 마법을 이용한 방어시설은 효율이 두 배로 올랐다. 방어 마법을 아는 마법사가 있으면 다섯 배는 우스울 정도로 효율을 뽑아냈다.
어버스나이트 교단과 함께 후퇴한 교단에는 '디펜그라드' 교단이 있다.
방어에 특화된 교단, 조건이 맞으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세력이 약했다.
탐색자의 미궁 사냥의 기본은 수비가 아니라 공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저층에서는 신성을 따르지 않는 탐색자나 다른 신성을 믿는 자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달라져 버렸다.
신성을 다른 신성을 배척했다. 강한 신성을 가진 신도가 필요한 층으로 내려갈수록 디펜그라드 교단은 다른 교단과 협력하지 못했다.
차라리, 왕이나 귀족과 연계할 수 있다면, 미궁의 초인을 견제하기 위해 소모하는 막대한 투자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디펜그라드 교단 역시 신성을 따르는 교단이었다.
왕과 귀족은 신성과 교단을 믿지 않았다.
핏줄로 정당성을 성립시키고 지배를 정당화하는 왕과 귀족은 혈연이 아니라 신성이 선택한 자가 지배하는 체제와 함께할 수 없었다.
*
하늘거리는 긴 은발.
디펜그라드 교단 사제 스라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몬스터 웨이브에 사제와 신도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디펜그라드 교단에 사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스라나가 교단에 들어왔을 때부터 없었다.
"너무 희생이 커."
극단적인 방어특성을 가진 디펜그라드 교단은 몬스터 웨이브 후퇴 작전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그만큼 죽었다.
몬스터 웨이브 후퇴 작전에서 몬스터를 저지하는 자들은 한계 가까이 버틴 다음 뒤로 빠졌다.
생존력과 고통 내성이 탁월해 '마조' 교단이 아니냐고 모욕당하곤 했던, 디펜그라드 교단의 사제와 신도는 버틸 수 있는 한계가 더 깊었다.
다만, 한계에 가까울 때쯤이면, 이미 몬스터에게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방어력만큼 공격력이 뛰어나지 못한 사제와 신도들은 포위를 뚫지 못했다. 그대로 버티다가 죽었다.
"자매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스라나는 흘러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디펜그라드 교단 사제 스라나는 교단의 희생에 어버스나이트 교단 사도 요르네스의 수작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몬스터 웨이브를 상대하는 전선이 고착화할수록, 디펜그라드 교단은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신성한 행위'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컸다.
신성을 따르던 이는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며 특정 행동을 하면 크게 성장했다.
디펜그라드 교단의 신성한 행위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상황은 신성한 행위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작지 않았다.
사제가 사도로 각성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디펜그라드 교단에서 사도가 등장한다면, 어버스나이트 사도 요르네스에게 정치적인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에게 미궁 탐색이 아니라, 몬스터 웨이브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 만큼, 요르네스에게 고개를 숙였던 다른 모든 교단이 디펜그라드 교단 아래에 모일 가능성마저 있었다.
사제 스라나는 차가운 석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고개를 숙이고 축복을 이었다.
마법 시약을 보급받지 못해 효율이 떨어졌지만, 성의를 다했다.
방어시설의 성능을 올리는 데 집중했다. 보란성은 마법 자원을 투자해 만들어졌다.
방어 마법을 아는 마법사가 방어시설의 효율을 5배까지 올릴 수 있다면, 스라나는 20배까지 올릴 수 있었다.
스라나의 양손에 맺힌 푸른 빛과 똑같은 푸른 빛이 등에 멘 방패에 맺혔다.
그녀의 몸통만 한 방패에 맺힌 신성과 양손에 맺힌 신성을 연계하며 축복을 이어나갔다.
*
*
*
늘어선 병사들 앞에서 어버스나이트 사도 요르네스가 웃었다.
소년의 몸으로 늙은이의 목소리를 내는, 자신감으로 가득찬 모습은 따르는 이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일반 병사들이라면 기괴한 지휘관에게 사기가 내려가고 분열될 테지만, 더 기괴한 적을 상대해왔던 미궁 탐색자가 주력이고 미궁 탐색자들을 보아온 병사들이었다.
그저 가슴을 들썩이며 전의를 다졌다.
"혼돈 속에서 흔들리리라. 부서지고 무너져, 작고 약한 것으로 돌아가리라."
사도 요르네스가 영역을 전개했다.
그의 의지 아래, 영역이 땅과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전개되었다.
몬스터들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의 인물들도 어깨를 움츠리고 진탕되는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다.
'혼돈에 파괴된 것은 순수로 돌아간다.'
요르네스가 스스로 세운 성법이었다.
그는 어버스나이트의 신성한 행위인 '혼돈이기에 순수를 갈구한다.'의 하부 행위로 조건을 만들었고 이를 이루었다.
그렇기에, 몬스터 웨이브는 요르네스에게 기회였다.
혼란에 빠져 치열하게 싸우고 죽어가는 전장은 그에게 잘 차려진 성찬과 다르지 않았다.
사도 그 이상을 꿈꾸며 노력해온 그는 성법마저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신성에게 신탁을 받는 순간은, 신성의 조바심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신성이 완벽하지 않다고 느끼고 확신하는 순간이 되었다.
신탁은 신성이 아니라 사도인 요르네스가 위로 오를 길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힘을 풀었다.
고블린이 속도를 잃었다. 오크가 힘을 잃었다. 트롤이 재생력을 잃었다. 하피가 높이를 잃었다.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본질을 잃고 약해졌다.
사도 요르네스의 영역 아래, 본질을 파괴당하고 혼란에 빠졌다.
""와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다른 교단의 신도조차 동조하며 기세를 올렸다.
다른 교단의 사도와 성력이 강한 사제들은 움츠렸지만, 신도들은 아니었다.
후퇴 작전을 치르면서 다른 교단의 신도들은 요르네스의 힘에 노출되었고 노출된 만큼 잠식되었다.
마치 어버스나이트의 신도인 것처럼 걸음을 내디뎠다.
요르네스의 영역 아래에서 강해졌다. 단순히 강해질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전의로 가득 찼다.
광폭화했다.
"힘을 느끼리라."
사도 요르네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믿었다.
광기는 혼란을 부르고, 혼란은 더 많은 죽음을 부를 것이다.
죽음은 가장 순수한 상태 중에 하나, 순수로 돌아간 인간과 몬스터는 요르네스에게 더 강한 힘을 부여할 것이다.
요르네스는 그의 행동을 재미있어하는 악마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