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이른 밤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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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몬스터 웨이브와 똑같이 사람의 인기척이 사라져 버린 거리. 거리를 채운 몬스터들.
미궁 주변 도시는 완전히 궤멸했다.
다만, 과정이 달랐다.
이전 웨이브에서는 어서 피난하라는 외침보다, 몬스터가 먼저 덮쳤었다. 죽음만이 물결처럼 퍼졌었다.
살해당한 주민이 시체마저 남기지 못하고 먹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민 중 많은 이가 도망칠 수 있었고, 소식을 전파했다.
수많은 피난민이 미궁 반대 방향을 향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했다.
농사짓던 땅에 미련을 가진 자들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버티지 못했다.
토지에 대한 집착보다 세대를 이어가며 주입된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공포는 움직일 체력이 있는 자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두 단체의 이름이 퍼졌다.
어버스나이트 교단, 그리고 '숲에서 걸어 나온 자.'
협약에 따라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선발대가 출발했다.
미리 파악해두었던,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을 때 자국으로 밀려올 경로를 역으로 탐색하며 이동했다.
그중의 일부는 준영의 도움에 네룬 성으로 후퇴한 왕국군의 본진, 우라덴 왕국에 도착했다.
아무리 친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몬스터 웨이브가 우라덴 왕국만의 일이었다면 각국에서는 느긋하게 관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몬스터 웨이브는 각 나라 권력자의 기득권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었다. 그렇기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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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탑 방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몰려드는 몬스터는 에리와 에드샤가 만든 절벽과 같은 탑의 외벽을 오르기보다 열어놓은 단 하나의 통로로 몰려들었다.
너무 심하게 모이면 수희와 비행선을 이용해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흩트렸다.
통로는 내게 종속된 신성 영역인 '숲속의 탑 지상 1층'으로 연결해 놓았다.
숲속의 탑 입구의 수상한 모습에 머뭇거리는 몬스터도 에드샤가 통로를 좁혀 '탑 지상 1층'으로 몰아넣고, 그 안에서는 아리시가 밀려 들어온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검은 날개 소녀의 껍질이었던 아리시.
아리나란과의 교감으로 아군이 된 아리시는 '탑 지상 2층'에 머물었었다.
그녀를 '탑 지상 1층'으로 불렀다.
내게 종속된 아리시는, 내게 종속된 공간인 숲속의 탑 안에서 지치지도 않고 몬스터를 처리했다.
처리한 만큼, '숲속의 탑'이 강해지고 탑이 내게 종속된 만큼, 나 역시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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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
나는 이전 몬스터 웨이브를 조사했던 자료들을 떠올렸다.
그 어디에도 검게 물든 하늘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검은 하늘.'
하지만, 내 기억에는 있었다.
내가 회귀를 반복하면서 도착해본 최하층은 지하 29층이었다.
이전 회귀 때는 지하 24층에서 바리스가 헤스티를 구하면서 죽어버려 실패했다.
'미궁 20층 이후부터는 토벌하는 방식이 불가능했지.'
미궁층의 빈틈을 찾아 억지로 돌파했었다. 그것도 어려워서 동료들을 희생시키며, 디딤돌 삼아 한층 한층 억지로 내려갔었다.
'내게 절망을 줬던 놈, 토벌을 포기하게 만든 놈.'
이른 밤의 악마, 더스크.
'더스크가 나오는 20층까지의 몬스터가 올라오는 건가.'
악마는 버겁지만 대응할 수 있다. 격이 다른 미궁 심층 몬스터와 달랐다.
미궁 심층의 몬스터는 모든 보상을 내게 집중해서 무력을 최대로 올렸던 회차에서도 죽는다고 느끼기도 전에 나를 죽였다.
'미궁 심층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절차가 필요해.'
그리고 그 절차는 만신전, 판테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검은 날개 소녀가 이끌었던 성소에서 얻었던 것이 그 근거이다.
아리시의 원래 몸, 검은 날개 소녀가 죽어가면서 이끌었던 길에는 석판이 있었고, 석판에는 판테온과 연관된 뼛조각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석판에 적혀있던 글을 기억했다.
[나의 석판을 부순 이여, 나는 너를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미궁의 의지에 먹힌 곳, 성소와 석판이 유지되는 현상마저 깨트린 자라면 만신전의 세 석상을 부술 수 있겠지.
일찍이 뼈로 이루어진 거인이 내게 주었던 뼛조각을 남긴다. 뼛조각은 원래 그 조각이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
'몬스터 웨이브를 정리하면 미궁 21층으로의 길이 열린다.'
미궁 심층 몬스터를 떠올렸다.
그것들을 떠올리자, 20층까지의 몬스터가 미궁 웨이브로 올라오는 거라고 확신했다.
미궁 심층의, 그 격이 높은 것들은 한낱 악마, 더스크가 이 미궁 밖 세상이 자신의 소유인양 하늘을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이른 밤의 악마는 미궁 웨이브가 시작되자마자 하늘을 검은색으로 물들였었다.
본체가 올라오기도 전에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한낱 악마가 할 수 있는 것을 미궁 심층 몬스터가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즉, 올라오지 않을 거라서 힘을 투사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한가지 가정을 세웠다.
'혹 미궁 심층 몬스터가 올라오지 않는 것은 만신전 때문이 아닐까?'
미궁 심층 교단의 신성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어쩌면 더 높은 격을 가진 심층 몬스터. 몬스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격이 높은 그것들.
그것들이 미궁 밖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만신전이 사이에 존재해서가 아닐까.
'가정이 맞다면 만신전은 21층에서 미궁 심층 사이에 있다.'
나는 검게 변한 하늘과 관련된 추론을 끝냈다.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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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무리가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눈에 비친 차가운 성벽.
얼마 전만 해도 성벽을 마주할 때마다 무도한 병사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갔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허한 눈으로 성벽에 기대어 선 병사들을 살펴보고선 그저 발걸음만 재촉할 뿐이었다.
보란성.
성의 홀, 영주의 자리를 향해 어버스나이트 교단 요르네스가 걸었다.
고급 가구로 만들어진 영주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인 양 앉았다.
그의 오른쪽 아래에 가랑트런트가 서고, 양쪽으로 어버스나이트 교단 사제들이 섰다.
사제의 아래쪽으로 와서야, 원래 보란성의 성주와 그의 기사들이 섰다. 성주의 맞은편에는 다른 교단의 인물들이 표정을 굳힌 채 자리했다.
성주가 안절부절못하며 요르네스의 눈치를 보았다.
"우리는 보란성에서 반격의 기회를 잡을 겁니다."
요르네스의 늙은 목소리에 성주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미 보란 성주의 영지는 박살 나고 영지민은 대부분이 피난을 떠났지만, 보란성은 영주의 마지막 재산이었다.
보란성이 무너지고 보란성에서 후방 방향의 영지까지 초토화되면 성주에게는 재기의 기회도 없이 끝이었다.
괜히 상석을 양보하고 아래에 선 것이 아니었다.
"모란드 왕국에서 개입을 약속했습니다. 이미 선발대가 출발했다고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아, 아니."
보란 성주의 눈이 떨렸다.
미궁 도시에서 후퇴한 교단과 협력하는 일과 보란성의 북쪽, 야심 찬 모란드 왕국의 지원을 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을 왜 나와 협의도 안 하고."
"보란 성주."
"큭."
사도 요르네스가 보란 성주를 노려보자, 평범한 육체를 가진 성주는 침음을 토해냈다.
"언제 토의해서 언제 지원 요청하려고요? 보란성이 완전히 파괴된 다음에? 모든 영주민과 피난민들을 마물의 먹이로 만들 셈입니까? 인간을 죽여 더 강해지라고 영주민들을 갖다 바칠 생각입니까?"
"그렇지만."
"당신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그나마 병사들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을 허락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고 그 역할에 충실해 주길 바랍니다."
"크윽."
사도 요르네스의 시선이 다른 교단의 인물에게 닿았다.
"다음 전투에서 병사와 함께 전열에 나서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 사제와 신도들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휴식이 더 필요합니다."
"한계에 도달했을지 몰라도, 죽지 않았지요."
사도 요르네스가 눈을 감고 죽은 자들을 추모했다.
"저희 어버스나이트 교단 사제는 희생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요. 가랑트런트와 몇몇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단의 인물은 입술을 들썩거렸다.
당신에게 반향적이던 사제들만 죽고, 충성하는 사제만 남긴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이는 전면전을 벌이자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몬스터 웨이브 위기 상황을 제일 먼저 알리고, 후퇴 전략을 먼저 내밀고 이끈 덕분에 통합 지휘권을 확보한 요르네스와는 싸울 수 없었다.
각 교단의 주력은 후퇴 작전에 희생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요르네스의 수작이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주장할 수 없었다.
"반격의 시간입니다."
요르네스가 자상하게 미소지었다.
'모란드 왕국의 선발대까지 집어삼킬 생각이냐? 요르네스.'
다른 교단의 인물은 침을 삼켰다.
모란드 왕국의 선발대는 당장 가지고 온 무력에 상관없이 정치적 위상이 높았다.
선발대가 보낸 보고가 이어질 지원에 영향을 끼치고, 지원 부대의 규모에 따라 모두의 생존이 결정될 수 있었다.
즉, 선발대의 의견이 중요했다.
선발대가 도착하고 잠깐의 휴식을 나누면서 보란 성주를 비롯한 주력 인물과 사교를 나누고 의논할 시간을 주면, 선발대를 중심으로 다시 권력이 다시 집결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하지만, 작전 중이면 달랐다.
선발대는 권력이 재집결할 수 있는 축이 아니라, 요르네스가 움직이는 수레의 바퀴가 되어 버린다.
"반격이라."
내세운 기치마저 거부할 수 없었다.
반격은 모두가 염원하는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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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밤의 악마, 더스크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지상의 공기, 미궁에게 잡아먹히지 않아 미궁화되지 못한 세상의 공기는 언제나 달콤했다.
"응?"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몬스터들.
그리고 몇 군데 정체된 구간.
그중에 한 구간을 인지했다.
"반격?"
이른 밤의 악마, 더스크는 나른하게 몸을 폈다.
보란성을 향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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