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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화 〉 몬스터 웨이브 (131/139)

〈 131화 〉 몬스터 웨이브

* * *

"망할 고블린."

미궁 도시 남쪽 구역 경비대장 혼트는 거칠게 방패를 밀어냈다.

하늘이 검게 변하고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평상시에 얍실한 놈들은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쳐버렸다. 옆에 남은 이는 미련한 놈들.

"긴장을 늦추지 마라."

탐색자의 벌이보다는 훨씬 못한 급여에, 자존심에 성격이 고약한 탐색자들을 상대하며 입에 욕을 달고 살던 부하놈들이 막상 난리가 나자, 미련하게 무장하고 집결했다.

안정된 직장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은 직장인데.

그리고 유일한 장점.

미궁 속에서 픽픽 죽어 나가는 탐색자와 다르게 생존율이 높다는 장점은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렸다.

"교단에서는 지원 안옵니까?"

"병신아, 저 중앙이랑 북쪽에서 들리는 소음은 뭔데? 소꿉장난하는 소리 같냐?"

"그거 불나서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고···."

"교단새끼님들이 싸우시는 소리다. 그 덕분에 오크가 이리로 안 오는 거다."

무슨 분쟁이 있을 때마다 교단에게 치여서 교단새끼라고 부르지만, 도망치지도 않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님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그래도."

"알아. 시발. 망할 고블린."

고블린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너무 빠르게 넓게 퍼졌다.

전선을 형성할 틈도 없이 고블린에게 포위당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고블린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강자 외에는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경비대원의 의무, 쥐꼬리 같은 급여가 주는 의무를 저버리고 먼저 도망친 놈들을 더 이상 욕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지금쯤 죽었을 테니까.

경비대장과 그의 주변에 모인 경비대원들도 교단에서 강한 놈들과 싸워주지 않았다면, 탈출 작전을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발."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두려움에 떠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딴에 의무를 수행한다고 일반 주민까지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고블린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 블록을 이동할 때마다 집안으로 침입해 들어가 주민들을 학살하던 고블린이 튀어나왔다.

"야이 개새끼야."

경비대장 혼트는 스르르 주저앉는 경비대원에게 다가가 뺨을 때렸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일어서 개새끼야, 쓰러지면 죽는 거야. 서서 걸어 새끼야."

"대장님 저는 이제."

"닥치고 걸어."

혼트는 고개를 돌렸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후 후속 조치만 해도 살 수 있는 경비대원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여덟의 고블린. 다시 포위되었다.

"어."

미궁도 전쟁도 경험해본 경비대장 혼트는 당황했다.

고블린이 아니고 임프와 같은 마물이라면 속임수를 쓴다고 확신하고 무시했을 것이다.

고블린 여덟이 동시에 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반응이 늦은 경비대원의 공격을 피해가면서. 즉각 이루어지는 반격을 하지 않고 한 곳을 바라봤다.

"후후후­. 후후후­."

낮게 들리는 요염한 미녀의 목소리.

고블린의 반응만 아니었다면 상급 마물의 출현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살육과 파괴가 이루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가득한 이곳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웃음소리는 상급 마물의 특기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상처를 입고 정신력이 약해진 놈도 넋을 잃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또 일어나는가 하며 두려워할 뿐이었다.

그리고 고블린이 등을 돌렸다.

검을 든 경비대장에게 등을 보였다. 제일 약한 소녀를 먼저 죽이고 키킥거리기 위해 몸을 빼는 것이 아니라 웃음소리에 정신이 팔렸다.

그리고 달려나갔다.

"대장님 이건 무슨···."

"정신 차려. 우리는 구출 작전을 속행한다. 홀린 고블린은 무시해."

경비대장 혼트는 부상당한 경비대원을 어깨에 들쳐멨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장정 하나쯤 가뿐히 감당할 수 있다.

*

*

*

미궁 도시 남쪽.

수희는 하늘을 보고 웃었다.

교단이 모인 북쪽은 어버스나이트 교단이 알아서 대응할 테니, 남쪽에서 시작했다.

"후후후­."

새하얀 나신을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감아, 드러내지 않는데도 야릇함이 피어올랐다.

"찢어 죽이고 싶지? 집어삼키고 싶지? 그래, 나를 봐."

남쪽 경매장, 화재로 무너지고 앙상하게 남은 기둥 위에 서서 수희는 흐름을 즐겼다.

하찮은 몬스터의 시선에서부터 강한 놈의 시선.

적개심에 눈을 붉히고 접근하는 놈들.

그리고 인간의 시선, 몬스터에게 상처 입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몬스터가 돌아서는 바람에 자신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의 기적이라고 믿을 준비가 된 사람의 시선.

어버스나이트 교단이 북쪽에서 구출 작전을 시작했기에, 그나마 도움을 받은 북쪽 사람들과 달리 더 지독하게 당하고 더 위험했던 사람들의 시선.

두려움과 경배.

수희가 마물인지 인간이지 확신하지 못하기에 담긴 두려움.

그래도 몬스터의 이빨을 돌리게 만들었기에 혹시나 품는 희망.

그리고 경배.

인간이든 마물이든 자신을 구해달라며 올리는 염원.

"후후훗. 후후후 후­."

수희의 웃음소리가 넓게 퍼져나갔다.

몬스터의 지독한 살기가 수희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고 싶어하며 집중되었지만, 오히려 미소지었다.

"하찮은 것들."

수희의 머리카락이 길게 길어졌다.

"내가 놀아줄까?"

고블린이 가장 빨랐다.

빠른 만큼 먼저 다가왔던 고블린의 가슴을 길어진 머리카락으로 꿰뚫어 절명시켰다.

또다시 고블린 세 마리, 다섯 마리, 열 마리.

죽이고 사체를 쌓아 올렸다.

어린아이와 놀아주듯이, 검은 머리카락이 하늘거렸다.

자장가처럼 웃음을 흩날리며, 침실로 아이들을 데려가 재우듯이 고블린을 꿰뚫고 사체로 언덕을 만들었다.

남쪽 경매장의 타고 남은 기둥보다 몬스터의 사체로 만든 언덕이 더 높아졌을 때 그 위에 올랐다.

"하아."

거침없는 힘의 투사에 쾌감을 느끼고 눈을 반개했다.

어차피 남의 힘. 네르본 크리스탈로부터 힘. 차곡차곡 녹이는 것도 아니고 소모시켜서 힘을 뽑아낸 거라, 아낀다고 해서 남은 전부가 수희의 힘으로 쌓이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 가는 데로 소모해, 충만한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알려준 준영의 충고를 수희는 충실하게 지켰다.

"후후후. 더 더 와줘."

고블린들의 뒤를 이은 오크.

오크가 두 손을 위로 올리고 포효를 터트리려고 했다.

하지만, 포효는 들리지 않았다. 수희의 웃음소리에 먹혔다.

"어서 와. 얘들아."

고블린 급을 넘어 저층 오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살기에도 수희는 웃으면서 상대했다. 달려드는 오크들의 가슴을 하나씩 꿰뚫으며 미소지었다.

저층 오크는 수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애들아, 가자."

검게 변한 하늘.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일부러 기운을 돌려 수희의 아래에 깐 검은 연무.

실제로는 빠르게 움직이지만, 느긋한 발걸음만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탐색자가 봐도 검은 하늘 아래 수희가 선 것이 아니라, 수희가 검은 하늘을 만든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의 연출.

그리고 연출이 아닌 것처럼 진실인 것처럼 속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몰려드는 몬스터의 진짜 살기.

넓게 퍼트린 머리카락 끝으로는 더 강한 몬스터와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표정과 웃음과 몸짓은 여군주인 양 여유를 연기했다.

거짓을 싫어하지 않았다. 허세를 즐겼다.

타인의 것으로 은혜를 베풀고 돌아오는 감사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이기적인 지혜가 수희의 실체마저도 충실하게 가꾸기 시작했다.

수희가 물결처럼 터져 나온 몬스터들을 이끌었다.

*

*

*

여유로운 걸음으로, 빠르게 미궁 도시를 벗어났다.

수희의 연극은 폐막 시간이 정해진 연극.

더 깊은 미궁 속에 있기에, 도망치기 버거울 정도로 강한 몬스터가 올라오기 전에 미궁 근처에서 벗어나야 했다.

물론 더 강한 몬스터도 수희를 쫓을 것이다. 몬스터의 인지 거리는 몬스터의 강함과 대체로 비례했다.

"아, 좋았는데."

아쉬운 듯이 미련을 토해내며 수희가 두려움 없이 쭉쭉 달려나갔다.

수희의 뒤로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몬스터의 이동만으로도 지축이 울리고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대지를 덮었다.

고블린들은 장애물을 피하며 달려왔지만, 오크는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쳐내며 달렸다.

그리고 코끼리를 닮은 마물은 밟았다.

곤충을 닮은 몬스터가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베어내고 육중한 골렘형 몬스터가 땅을 짓이겼다.

폐허를 만들며 수희를 쫓았다.

만들어지는 폐허는 후켄스 백작령을 넘었다.

도중에 몇 번이나 따라잡힐 뻔했지만, 내게는 [종속체 배치]가 있었다.

나는 미궁 도시에서 왕국군이 주둔 중인 킬덴 평원과 이어지는 선상에 작은 움막을 짓고 영역을 종속시켜두었었다.

수희가 몬스터에게 따라잡히려 하면, 미리 종속시켜둔 영역으로 수희를 소환했다.

몬스터들은 수희가 사라지는 순간, 멈칫거렸지만 바로 수희의 위치를 알아차렸다.

수희의 유도는 시각이나 냄새를 통한 유인이 아니었다.

미궁이 새긴 본능 레벨의 세뇌를 비틀어낸 것이기에, 소환된 위치로 나타난 순간 다시 쫓아왔다.

"드디어."

수희가 킬덴 평원으로 들어섰다.

왕국군과 거대한 몬스터의 물결이 서로를 시야에 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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