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몬스터 웨이브
* *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은 고블린 급이, 다음으로 오크 급이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층의 몬스터가 올라올 테고, 그들이 상대라면 수희라도 쉽게 도망칠 수 없다.
하지만, 여유를 부렸다.
"여기 있습니다."
수희는 미소지으며 일곱 개의 네르본 크리스탈을 받았다.
어버스나이트 사도 요르네스의 시간은 수희의 시간보다 더 귀중했다. 심층의 몬스터가 올라오기 전까지 요르네스가 취하는 행동이 요르네스의 입지를 결정할 것이다.
또한, 수희가 작정하고 방해하면 어버스나이트라고 할지라도 쉽게 배제할 수 없었다.
수희만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힘내~."
격에 맞지 않는 인사를 남기며, 수희가 사라졌지만, 요르네스와 가랑트런트의 머릿속에는 수희의 존재가 이미 사라졌다.
교단이 소멸할 위기지만, 다른 교단의 사도급을 사제 취급하며 흡수할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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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수희. 시란느도."
후켄스 백작령 영주민을 나에게 종속된 신성 영역인 '숲속의 탑'으로 밀어 넣는 일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진행되었다.
백작의 병사 중에는 영주민을 설득하기는커녕 자신도 마지못해 명령을 따르며 어기적거리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해가 사라지고 하늘이 검게 변해버리자, 그것도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지속하자 가장 지독하게 영주민을 이동시키는 병사가 되었다.
그리고, 병사들은 영주민들을 압박할 필요가 없었다. 영주민들이 먼저 죽을힘을 다해 움직였다.
보호받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실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네르본 크리스탈로 뭘 할 거예요?"
"유인해야지."
미궁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왕국을 향할 것이다.
다만, 그 시점은 눈에 보이고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모든 인간을 죽인 다음이 될 것이다.
"왕국의 오판을 인식시켜야지."
왕국 역시 몬스터가 주변 인간들을 몰살시킨 후에 왕국으로 향하리라 예측하고 작전을 세웠다.
교단과 탐색자 출신 강자들을 죽인만큼, 몬스터들 역시 전력을 소모할 테니, 남은 몬스터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하고 있다.
"네르본 크리스탈은 신물이지. 한낱 사도가 만들고 한낱 사도가 소유하며, 사제에게 쓰라고 나누어준 물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격이 높은 신물."
"흐흐, 요르네스는 가치를 모르고 넘겼군요."
속였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은지, 수희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시간을 다루는 힘이 가장 위대하지."
내가 미궁을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미궁층은 미궁 밖과 같은 시간이 아니라 뒤섞인 시간을 내게 보여줬다.
그리고 아직도 알지 못하는 '나의 회귀' 역시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다음은 거리. 우리는 거리를 다루는 이들을 봐왔어. 전투 중에 위치를 바꾸는 마법사의 마법 블링크, 전사이면서도 한순간에 적 앞으로 돌진하는 바바리안의 기술."
바리스가 예전 일이 생각나는지, 아리나란을 꼭 껴안았다.
"거리는 멀면 멀수록 더 거대한 힘과 지혜가 필요해. 하지만, 거리를 초월할 수 있는 이력이 있어도 넘을 수 없고, 같은 시간에 있으면서도 거리를 측정할 수 없는 곳이 있지."
"미궁······."
"그래, 그래서, 미궁층을 의지대로 오갈 수 있는 길잡이 스킬이 기이한 스킬이야. 동시간에 존재하면서 거리를 측정할 수 없는 미궁층과 미궁층을 오가려면 그에 어울리는 격이 있어야 해. 하지만, 길잡이 스킬은 그만한 격을 요구하지 않아."
수희도 강하지 않을 때부터 길잡이 스킬이 있었고, 어버스나이트 사제 중에 미궁을 혼자서 탐색하는 이는 모두 길잡이 스킬을 가지고 있다.
교단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탐색자들도 종종 가지는 스킬이었다.
"마치 미궁이 일부러 허락한 것처럼."
"그럼, 미궁층 어디에 있든지 즉시 연락하고 이동할 수 있는 네르본 크리스탈은···."
나는 바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추측을 말했다.
"어버스나이트 교단의 전대 사도가 미궁의 허락을 비틀어낸 신물인 거야."
일곱 개의 네르본 크리스탈을 만지작거렸다.
"비틀어낸 신물은 또 다른 힘을 비트는데 사용할 수 있지."
분명 한계는 명확했다.
몬스터 웨이브로 튀어나온 몬스터들에게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기원한다면, 바로 네르본 크리스탈이 부서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느껴지는 인간 모두를 죽여라'는 명령을, '저 하나의 인간을 먼저 죽이고 느껴지는 인간 모두를 죽여라'라고 비틀 수 있다.
몬스터 웨이브로 튀어나오는 몬스터 전부를 유인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지만, 일부라도 유인하면 전황의 변화가 생긴다.
'왕국군은 물론, 미궁에게도.'
몬스터 웨이브가 무서운 것은 압도적인 전력도 전력이지만, 기습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벌면 벌수록 인간은 저항할 힘을 모을 수 있다.
'네르본 크리스탈의 비틀림을 수희에게 담는다.'
요르네스는 네르본 크리스탈을 우리에게 넘겨주면서 되찾을 계획을 세워놨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되찾을 계획이 있으니 넘겼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되찾을 수 없다.
'소모될 테니까.'
부서진 것은 되찾을 수 없다.
*
숲속의 저택.
우리만의 공간에 일행이 모였다.
에리와 에드샤가 정리해, 완전하게 평탄 작업이 끝난 정원이었던 평지에서 일행은 수희를 보았다.
풀어헤친 검은 머리카락이 새하얀 나신을 간지럽혔다.
"수희야, 괜찮겠어?"
"아 조금 흥분되긴 해. 아니 좀 많이인가···."
바리스가 걱정해서 묻는 물음에 수희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잖아. 나는 이런 순간이 싫지 않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거기다가 모두의 시선을 모으는 일."
살짝 허리를 비틀며 수희가 나에게 눈을 마주쳐왔다.
"나를 지켜줄 거죠?"
"당연히."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요. 헤스티, 페로, 오노르 마법진을 그려줘요."
하지만, 수희의 말에도 바리스는 걱정이 되는지 다시 물었다.
"내가 유인하는 역을 맡는 것이 낫지 않을까?"
"헤에, 바리스,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강해. 그리고 일행 중에서 네르본 크리스탈의 반응을 제대로 이끌어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수희가 어버스나이트 교단을 나온 지 오래인데도, 교단 사도가 만든 물건은 수희를 거부하지 않았다.
바리스는 수희의 손을 꼭 잡았다. 천천히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헤스티가 보관하고 있던 크라켄의 연골에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문어와 달리 크라켄 몸속에 있던 연골은 거대한 힘을 가졌다. 그 힘을 헤스티가 뽑아내고 이끌었다.
페로가 그동안 모았던 마법 시약을 소모했다. 오노르가 후작가와의 전투에서 빼앗았던 화속성 마법 시약을 이용해 화속성을 촉발했다.
오노르는 물의 마녀지만, 일정 한계 내라면 불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내게 종속되고 인어의 눈물층 전투를 경험하면서, 왕국에게 세뇌당했던 과거를 허물처럼 객관화해냈다.
허물 속에서 원하는 힘을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헤스티가 이끄는 힘이 페로와 오노르보다 월등했다.
원래라면 헤스티의 힘에 페로와 화속성을 운용하는 오노르는 집어삼켜 질 테지만, 실시간으로 힘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마법진을 이용하는 것이라 어렵지 않게 조율해냈다.
마법진 중앙에 깨끗한 나신에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리며 수희가 섰다.
수희의 등 뒤로 일곱 개의 네르본 크리스탈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수희의 육체에 네르본 크리스탈이 공명했다.
'공명은 시작일 뿐.'
나는 네르본 크리스탈의 반대쪽에서 수희에게 다가갔다.
미궁은 몬스터를 강력하게 제어한다.
몬스터들에게 새겨진 미궁의 세뇌를 비틀기 위해서는 미궁에 견줄만한 비틀림이 필요했다.
네르본 크리스탈이 비틀림을 담고 있다고 하지만, 미궁에 비할 수 없었다. 연료로 소모하기 적당할 뿐이다.
나는 수희를 껴안았다.
미궁에서 가장 비틀린 존재로서, 크리스탈을 파괴해 흘러나온 힘을 수희에게 새겨넣었다.
*
"하아."
수희가 꿈틀거렸다.
큰 힘을 맛보며 달달해진 음성.
나신으로 마법진 중앙에 섰던 수희는 야릇한 호흡을 내뿜으며 내게 달라붙었다.
"하아, 이거 참기 힘들어. 그냥 준영씨, 숲속의 탑에 처박혀 한 달 동안 탐닉하지 않을래? 이 상태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이야."
나는 부드러운 수희의 몸을 쓰다듬었다.
시도는 성공했다.
수희의 반응은 이상 반응이 아니었다. 육체 내부가 충만해지면서, 수희의 여러 욕망 중에 성욕이 내게 자극받아 전면으로 나왔을 뿐이다.
"그동안 노력했구나."
"흐으, 나를 뭐로 본 거야. 그동안 열심히 했지."
수희의 격이 절반 올랐다.
수희가 그동안 쌓아오지 않았다면 네르본 크리스탈의 힘을 내가 녹여준다고 해도 성장하지 못하고, 힘을 담기만 했을 것이다.
헤스티처럼 완전한 승격은 아니지만, 수희가 세상을 새롭게 느꼈다.
"안아줄 거야?"
"그 전에."
"그 전에?"
"몸을 달구고 와. 적들 앞에서."
"흐, 알았어."
헤스티와 다른 방식으로, 수희는 자기 자신을 충족시키며 성장해왔다.
성욕 역시 그녀의 일부분이며 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가자."
수희가 내민 나의 손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