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몬스터 웨이브
* * *
습한 공기가 끈적거리는 미궁 저층.
탐색자 오토가 실실 웃었다. 동료 에릭과 단둘이 나온 고블린 사냥.
둘 다 고블린 정도는 쉽게 사냥하는 탐색자인 만큼 위험은 크지 않았다. 거기에, 둘이서 전리품을 나눌 수 있으니 이익이 컸다.
오토는 여유롭게 고블린의 단검을 막았다.
“뭐야. 발정이라도 났나?”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은 고블린의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부터 알았다.
“이놈들, 고블린들이 화내봤자지.”
고블린은 은밀한 기습이 무서운 몬스터, 이렇게 광폭화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과감한 공격을 하면 오토와 같은 숙련자에게는 오히려 쉬웠다.
오토는 초보자 파티였으면 무너졌을 거라고 생각하며, 공격 동작을 이었다.
역으로 파고들어 검으로 고블린의 목을 찔렀다.
고블린은 숨이 끊어져 가면서도 오토의 다리를 잡으려 했다.
"어딜."
몸을 빼는 순간에도 검을 비틀어 확실하게 마무리했다.
"오토."
"왜?"
“이거 수상해.”
“뭐가. 미궁 안에서 이 정도 변화는 흔하잖아. 에릭.”
“하지만, 불길해. 일단 나가지 않을래?.”
“이대로 올라가자고? 기분이 이상한 거 맞아? 그 술집년이 생각 난 것은 아니고?”
“갑자기 그년은 왜, 또.”
“빈손으로 가면 그년이 좋아할 것 같아? 에릭, 고블린 하나라도 더 잡고 가야 거시기라도 빨아줄걸?”
“아아….”
“왜 말문이 막혔어? 내 말이 맞지?”
“아아 아.”
푸각.
오토는 에릭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고블린 층에서 나타날 리 없는 몬스터 오크가 에릭의 두개골을 도끼로 갈랐다.
“제기랄.”
몸을 돌렸지만, 도망치지 못했다.
쿠오오.
포효를 내지른 오크가 도끼를 회수하지도 않은 채,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휘두르는 검보다 깊숙이 파고든 오크의 손이 오토의 팔을 잡았다.
그대로 사지를 찢었다.
*
*
*
아직은 평온한 미궁 주변 도시.
어스름한 햇빛이 어버스나이트의 교단 건물을 비췄다.
수희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숨긴 채, 교단의 손님을 맞이하는 접객실에서 하품했다.
“너의 낯짝은 정말로 두껍군.”
“누구? 누구의 낯짝?"
어버스나이트 사제 가랑트런트의 말에 수희는 좌우를 둘러보며 비웃었다.
"교단에 낯짝이 얇은 사람도 있어? 속과 곁이 다른 건 어버스나이트의 기본 소양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인데.”
"말조심하지."
"흥, 비틀린 충성심."
수희의 말을 그대로 따지면 어버스나이트 사도에 대한 모욕이 된다.
교단과 사도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굳은 가랑트런트 인만큼, 교섭을 이어갈 이야기로는 좋지 못했다.
수희는 그냥 사도보다 가랑트런트를 한 번 더 모욕해주고 용건을 밝혔다.
"네르본 크리스탈, 가지고 있지?"
"…."
"거짓말도 잘하지 못하면서 머리 굴리지 말고. 당장 달라는 거 아니니까."
"네르본 크리스탈은 어디서 들은 거지?"
"그게 중요하지 않을 텐데."
수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등급이 높은 비밀이라, 수희가 접근할 수 없었던 정보. 수희는 준영에게서 들었었다.
알려준 정보를 되새겼다.
네르본 크리스탈은 어버스나이트 교단 현재의 사도인 요르네스가 아닌, 전대 사도가 만든 신물로 총 일곱 개가 있다.
'전대 사도는 요르네스처럼 속이 좁은 놈이 아니었나 봐.'
수희는 현재의 사도 요르네스가 교단의 장래를 위해 신물을 만들어 미래를 대비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반대로, 그가 이전부터 내려온 성물에서 힘을 뽑아낸다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사제들에게 나누어준 상태지? 이곳에 없는 사제들한테."
"어디서 그 정보를 들었는지 궁금하군."
가랑트런트는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판단 내렸는지, 수희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출처를 계속해서 물었다.
네르본 크리스탈은 사용자 간에 길잡이 스킬과 이정표를 공유하는 신물이었다.
이 신물은 성격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른 어버스나이트 사제가 공통의 목표가 생겼을 때, 즉시 힘을 합칠 수 있게 해줬다.
이 신물 일곱으로 어버스나이트 교단은 다른 교단과의 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외부에 흩어져서 활동하다가도 사도가 위험하면 즉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용한 후 충전이 쉽지 않기에 함부로 쓰지 못하지만,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쟁에 여유로워지고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내가 그 정보를 어디서 들었는지 알 봐 없고."
수희는 가랑트런트를 노려보았다.
"즉시 사용해서 사제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잃고 싶지 않다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책임? 흥, 책임을 말했어? 책임과 이득은 동전 하나에 붙은 양면. 내게 책임을 묻는 건, 내 말이 맞을 때 그 책임의 무게만큼 대가를 준다는 거지?"
"네르본 크리스탈은 너와 말장난을 할 물건이 아니다."
"허."
수희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말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그런가요? 사도 요르네스?"
수희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도를 향해 물었다.
"허허, 큰 성취가 있었군요."
사도는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닌데, 알아차리고 불러낸 수희에게 감탄한 모양새를 꾸몄다.
속으로는 불쾌할지라도 이를 곁으로 드러낼 만큼 사도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혼돈 속에서 순수를 추구하는 교단의 사도, 어린아이의 외모를 하고 늙은이의 말을 쓰는 자. 나타난 사도 요르네스에게 가랑트런트가 예의를 표했다.
"가랑트런트, 수희의 말을 따르세요."
"하지만."
"그들이 저보다 깊은 것을 알고 있다는 예감이 듭니다. 신탁은 아니지만요."
"안드레드 수희."
"네."
수희는 풀네임을 부르는 사도를 무시하지 못하고 그저 심통 부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알고 있는 바를 풀어주세요. 우리가 네르본 크리스탈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 합당한 이득을 드리겠습니다."
"약속하는 거죠? 보상은 제 말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면 즉시."
"허허. 급하군요."
늙은이처럼 웃는 사도 요르네스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좋습니다."
수희도 마주 보며 웃었다.
사도가 무대로 올라왔다. 사도가 평상시에 즐기던 짓, 가랑트런트를 앞에 내세우고 뒤에서 주시하는 흑막 놀이를 그만두고.
그 놀이를 그만둘 만큼 사도는 '만신전'에 대한 욕심이 컸다.
그는 네르본 크리스탈을 동시에 사용할 만큼 중대한 일은 만신전과 관련된 일밖에 없다고 추측했다.
수희가 그 욕심을 이용해 이득을 약속받아냈다.
사도는 알릴 정보가 '만신전'에 관한 내용이라면, 어버스나이트 사제가 만신전에 들어설 때 약속을 이행하면 되기에 쉽게 약속을 했다.
하지만, '몬스터 웨이브'는 이제 곧 터진다.
"몬스터 웨이브."
"무슨."
"말도 안 되는."
수희는 고개를 살짝 들고 턱을 올려, 사도와 가랑트런트를 내려다봤다.
"이제 곧."
"정말인가?"
수희는 가랑트런트의 반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약속만 이행되면 되니까."
"하아, 정말이군요."
사도 요르네스가 허탈하다는 듯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신성이 멀게 느껴집니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흔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공교롭게도."
"가랑트런트."
"네, 사도님."
"네르본 크리스탈을 사용해 미궁으로 들어간 사제들을 불러들이세요. 쉽게 믿지 않을 테니 제 이름으로 전하세요. 저는."
사도 요르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모든 교단에게 '제 이름으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거라고 알릴 겁니다."
사도의 말에 수희는 혀를 찼다.
'교활한 늙은이.'
몬스터 웨이브는 어버스나이트뿐만 아니라, 미궁 주변 모든 교단의 위기였다.
미궁 내에서 지속적으로 이득을 캐내는 작업장뿐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신도 역시 죽었다.
그리고 아직 신도가 아닌 미궁 탐색자의 수가 줄어도, 어버스나이트 신도의 수 역시 줄어들 것이다. 교단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몬스터 웨이브'의 사실을 알리고 대응을 이끌면, 사도 요르네스의 이름이 더 넓게 퍼진다.
요르네스가 감당해야 할 위험부담이 크긴 했다.
수희의 말이 거짓말이라면, 경거망동해 가볍게 움직인 사도 요르네스의 입지가 확연하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르네스는 도박판에 올랐다.
수희의 말이 맞다면, 대비할 시간을 벌어 교단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좋아요. 대신 보상은 더 큰 것으로 준비해줘요."
"그래요. 증명되면 바로 지급하지요."
가랑트런트가 사도 요르네스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
수희는 몸을 돌렸다.
교단 쪽은 어버스나이트 교단이 알린다고 해도, 거래하던 경매장과 상인에게는 직접 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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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기둥이 하늘을 찔렀다.
해가 사라지고 하늘이 흘린 검은 피가 하늘을 덮었다.
비명과 절망.
미궁 주변 지역에 자리 잡은 사람 중에 '몬스터 웨이브'를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조차 말을 알아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귀신 이야기처럼 몬스터 웨이브에 대해 들었다.
탐색을 떠났던 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입구 근처에 있던 자들이 설탕이 녹듯이 죽어 나갔다.
"요르네스, 네르본 크리스탈을 전부 내놓으세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같이."
"하아."
"순순히 내놓아요. 몬스터 웨이브를 대응하는데 쓸 거니까, 사도님은 그걸 다른 교단에 알려 명성이나 올리시구요."
"자네, 정말 크게 성장했군."
수희는 비웃으며 눈웃음쳤다.
준영과 일행이 몬스터 웨이브를 알리고, 네르본 크리스탈을 이용한 대응은 당장은 요르네스의 공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요르네스의 명성이 준영보다 높을 때는 요르네스의 공으로 유지될 것이다.
수희는 준영의 명성이 여기서 멈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요르네스의 명성을 덮어, 진실이 드러나는 날을 기대하며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