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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화 〉 왕국 (127/139)

〈 127화 〉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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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크라켄의 처분도 엘프들 전부가 달라붙자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다른 해양 동물과 달리 몸 안쪽에 있던 뼈와 마석은 좀 더 연구한 다음 처분하기로 했다.

네리미아의 다리에 달린 지느러미가 하늘거렸다.

인어의 눈물층 수중에서 부드럽게 헤엄쳤다. 다만, 조금은 침울해하는 느낌.

나는 바리스와 수희에게 신호를 보내고 해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헤스티로부터 [물의 가호]를 받았기에 수중 호흡하며 침착하게 탐색을 이었다.

적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동굴 안에는 인어들이 썼던 것으로 보이는 무기와 장비가 보였다.

“저 올라갈래요.”

네리미아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

[좋아. 전리품 수거는 엘프들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아예 숲속의 저택에 가 있을래?]

“네, 그럴게요.”

나는 [종속체 배치]로 네리미아를 바로 미궁 밖으로 보냈다.

해저 바닥에 깔린 진주를 수거하는 일은 네리미아가 더 잘할 수 있지만, 네리미아에게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해저 동굴은 인어의 도살장이고, 아무렇게나 놓인 물건들은 인어들의 유품이었다.

적으로 상대할 때야, 적에게 어떤 과거가 있든지 우리의 승리를 위해 움직였지만, 전투가 끝나고 나니 네리미아도 사념을 쉽게 배척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머메이드들의 반응이 이상했어.’

단순하게 미궁화된 몬스터라면 보스가 죽었다고 해도 침입자와 마주치면 덤벼들어야 했다.

하지만, 전투 후에 마주친 머메이드들은 일행을 보고 도망쳤다.

그 모습은 미궁 속 몬스터가 아니라, 미궁 밖 먼바다에서 대포 소리에 놀라 도망친다는 머메이드를 떠올리게 했다.

‘공감이라, 네리미아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인 거지.’

그녀는 머메이드의 비극에 공감하고 공감하는 자신에게 당황하고 있다.

‘네리미아가 자신의 무리를 원하게 될까?’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간에 나쁘지 않았다.

무리를 원하게 된다면 머메이드 몇몇을 종속해 네리미아에게 맡기면 될 뿐이었다.

다르게 결정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종족에 대한 고민은 자신에 대한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직시해야만 하는 벽이었다.

고민은 네리미아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

엘프들은 묵묵히 ‘인어의 눈물’을 채집했다.

진주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보석은 수속성 마법 효과를 올리는 시약뿐만 아니라, 마법물품으로 가공이 가능한 희귀한 재료였다.

‘왕국의 마법사들, 불에 강한 ‘규율자’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마녀이지만, 왕국에 납치되었던 시란느의 어머니 오노르.

왕국은 물의 마녀인 그녀를 화속성으로 덮어 지원마법사로 세뇌했었다.

우리는 이를 역으로 분석해, 왕국의 전략을 파악해냈다.

‘토대는 준비되었다.’

시란느의 아버지인 후켄스 백작은 이미 우리 쪽으로 완전히 배팅했다.

이제 적대 관계로 확정된 안토니오 후작 영지의 점령을 위해서라면, 딸인 시란느에게라도 무릎을 꿇고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상대는 왕국. 그들에게 우리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는 선택지는 없다. 오히려 우리를 넘어 미궁을 노리고 있다.’

그들의 준비를 보면 왕국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미궁에서 터져 나온 몬스터 웨이브에 당해 멸망 직전까지 갔던 왕국은 해답지에 ‘대포’를 올렸다.

일정 범위 내에 뭉쳐진 대상에게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대포.

현재 산업 수준으로는 불안정한 무기지만, 화속성에 정통한 마법사가 있으면 달라진다.

기술의 부족을 마법사가 화속성을 직접 통제해 안정성뿐만 아니라 위력까지 올릴 수 있다.

이를 위해 왕국은 ‘마녀’를 잡아들여 세뇌하고 ‘지원마법사’로 만들었다.

만들어진 지원 마법사들을 이용해 귀족들을 규합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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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무뚝뚝한 성벽을 훑으며 지나갔다.

“후켄스 성 개조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나는 성벽에 올라 시란느의 보고를 들었다.

“15층 전리품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겸손해할 필요 없어. 너와 오노르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

“으으, 칭찬을 받고 싶어도 헤스티님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져요.”

시란느도 내게 안긴 이후로는 편안하게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조급해하지 마. 너에게는 너의 길이 있으니까.”

그만큼 인어의 눈물층에서 보인 헤스티의 역량은 대단했다.

계열이 완전히 다른, 탈출에 특화된 마법사인 페로마저 전투가 끝난 후에 우울해하며 사람을 안 만날 정도였다.

네리미아는 아예 하늘 위에 하늘을 보듯이 하니 충격이 작았지만, 시란느와 오노르는 흔들렸다.

발휘하는 현재 능력은 오히려 배를 조종하고 [물의 길] 마법을 함께 시전하면서 올랐지만, 더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였다.

헤스티는 물론 나 역시 둘을 재촉하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니면, 다른 자극도 괜찮고.’

성 밖으로 훈련하는 상비병들이 보였다.

이종족인 엘프들이 지휘했지만, 병사들은 충실하게 따라왔다.

이전 전투에서 정확한 지휘를 보여주고 생존을 보장했다. 거기다가 후작가 영지들을 돌며 약탈해 모은 식량은 왕국과 전투를 치를지도 모른다는 소문에도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수로 공사 역시 속도가 올랐습니다.”

영주민을 동원한 공사였지만, 민심은 오히려 올랐다.

이 역시 식량이 큰 역할을 했다. 군인들에게 동원되면 품삯은커녕 약탈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데, 넘치는 식량 덕분에 노동의 대가를 과하게 지급하니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농민들은 수로는 농사를 위한 시설이라고 생각할 뿐 전투를 위한 시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농민을 위해 자기 돈을 쓰는 군인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그래.”

시란느는 나의 짧은 대답에 조용히 기다렸다.

“손님이 왔어.”

“손님이라면….”

“엘프들로도 충분한 손님 같지만. 시란느, 오노르와 함께 가볼까. 오노르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나의 말에 시란느가 살짝 긴장했다.

엘프보다 강하지 않다고 해도 오노르가 아는 사람은 왕국의 마법사 ‘규율자’와 연관된 가능성이 큰 만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자.”

나는 시란느를 공주 안기로 안아 들고 성벽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미 백작령 곳곳에 종속물을 배치해두었다. 접근하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수로와 수로 위 다리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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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배낭에 허름한 로브를 걸친 이들.

배낭에 매달려 건들거리는 쇳덩어리는 행상인이 파는 요리도구가 아니었다. 떠돌이가 무기를 소지하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배낭에까지 보조 무기를 매달리지 않는다.

미궁 덕분에 가격이 싸졌다고 해도 무기는 비싸고 관리하기 까다로운 품목이었다.

사용하지 않아도 풀잎에 맺히는 이슬과 여행자를 괴롭히는 비는 거금을 주고 구한 무기의 판매가를 확연하게 떨어트려 버렸다.

그럼에도 귀한 휴식시간과 관리용품을 소모해 무기의 상태를 유지하는 이들.

탐색자라고 불렀고, 미궁 근처뿐만 아니라, 후켄스 백작령에서도 보이기 시작하는 이들이었다.

안토니오 후작과 후켄스 백작의 전쟁이 후켄스 백작의 승리로 끝나면서 탐색자들이 다시 늘어났다.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미궁을 떠올리게 하는 ‘숲속의 탑’은 매력적인 탐색지였다.

마법 재료는 언제나 비싸고 귀했다. 특히 환경이 다른 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마법 재료에 대한 마법사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끓어올랐다.

단순한 호기심와 학문적 욕구가 전부가 아니었다.

소모품이든 영구적이든 마법용품은 평범한 육체를 가진 귀족과 부자를 인간의 한계를 넘는 무력을 가진 초인에게서 권위와 재산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탐색자들은 미궁과 다른 마법 재료 하나만 나와도 희소성 때문에 막대한 재화를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숲속의 탑’을 향한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탐색자가 정비와 휴식, 그리고 유흥을 즐길 수 있는 후켄스 백작령 내의 마을에 방문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후켄스 백작은 정보 유출을 걱정했지만.’

후켄스 백작은 항복한 후에는 말 잘 듣는 사냥개처럼 굴었다.

허리에 힘을 빼고, 어깨를 움츠린 모습을 보이지만 나를 따르고 내가 성공했을 때 얻을 이익은 후작 작위 이상이 될 것을 파악할 정도로 예민한 자였다.

단순히 굽실거리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보 유출 같은 사항을 걱정하고 이를 알릴 정도의 판단능력을 갖췄다.

‘탐색자를 구분하는 것은 너무나 쉬워.’

나뿐만 아니라 탐색자와 접할 일이 많았던 수희도 가능했다.

한 걸음을 걷고 무기를 잡으려는 동작만 봐도 탐색자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무력을 올렸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백작가 영지 곳곳에 심어둔 종속물은 검문하지 않아도 그들을 조사할 수 있게 했다.

차라리 일반인 출신 첩자가 행상인으로 꾸미고 잠입했으면 판별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지도 몰랐다.

일반인의 삶을 모르는 나는 행상인이 첩자인지 아닌지 바로 판별할 수 없다.

마을로 들어온 시간과 나가는 시간을 적어놓고 계산해 빠른 정보 전달을 위해 움직이는 자인지 아닌지 구분할 뿐이다.

물론, 일반인 첩자는 주요시설에 접근할 수 없다.

‘왕국의 침공이 가까워졌군.’

종속물을 통해 확인한 탐색자로 꾸민 첩자.

미약하지만, ‘규율자’의 마력으로 인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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