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15층 공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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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지하 15층, 인어의 눈물.
누가 미궁층의 이름을 붙이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을 붙이는 존재는 가볍지 않은 존재일 것이다.
그저 미궁 지하 15층을 지나가는 자라면, 인어의 눈물층이라고 부를 수 없다.
지나가는 자에게는 머메이드는 침입자를 공격하는 몬스터일 뿐이고, 그자는 크라켄이 머무는 해저 동굴 바닥에 깔린 진주를 보지 못할 테니까.
크라켄에게 먹이가 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피식자의 비애가 미궁 지하 15층엔 있다.
“크라켄이 움직인다.”
나의 말에 일행은 배 위에서 다시 한번 전의를 다졌다.
흔들리는 배.
우든 엘프가 선박의 외벽을 만들고, 흙과 광석에 친숙한 다크 엘프가 외벽 안쪽에 흙으로 층을 만들어 보충했다.
일반적인 조선술과는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진 배. 그렇기에 선박으로서의 조건은 갖추지 못했지만, 물의 영역을 차단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했다.
배는 일행이 디딜 곳이 되었다.
마녀로 격이 올랐음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헤스티는 크라켄이 떠오르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녀를 돕는 백작가 자녀 시란느와, 시란느의 어머니이자 마녀인 오노르는 머메이드 혼혈 네리미아와 함께 배의 운용에 집중했다.
돛도 노도 없지만, 수속성의 시란느와 오노르, 머메이드 네리미아의 물 장악력이면 운전 자체는 쉬웠다.
그래서 셋은 크라켄을 직시하지 않았다. 일부러 배의 운용에 집중했다.
“이거 존재감이 대단하네.”
수희가 돈주머니를 도둑맞았다는 식의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잡으라고 있는 놈이 아닌 것 같지?”
나는 웃으면서 수희의 말을 긍정했다.
같은 미궁 15층에 있는 머메이드나 머메이드 챔피언과는 아예 다른 존재감.
수희는 투덜거렸다. 그녀의 방식으로 압박을 털어냈다.
투덜거리면서 눈으로는 슬쩍슬쩍 크라켄이 다가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뭐, 그래도 잡을 거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수희. 가벼운 움직임에 어울리는 쌍검을 만지작거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수희의 말에 바리스가 웃었다.
바리스는 크라켄이 다가오는 방향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용사 바리스. 용사라서 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지로 버텨낼 수 있도록. 용사의 특성은 도울 뿐이었다.
바리스는 아군을 지키려면, 적을 직시하며 아군을 느껴야 한다는 원칙을 잊지 않았다.
나는 수희와 대화하면서 내게 달라붙는 아리나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제대로 피부를 가지지 못하고 피막으로 몸을 유지하는 그녀는 위태로운 만큼 적에게도 변수가 된다.
그리고 헤스티.
눈을 살짝 감았다.
“오네요.”
눈을 뜨고 적이 다가오는 방향을 보았다.
미혹을 걷어낸 맑은 눈에 의지가 서렸다. 변화하는 상황은 믿을 수 있는 동료에게 맡기고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긴 집중을 시작했다.
나는 헤스티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믿고 있음을 표현하고 이어질 전투를 준비했다.
“네리미아, 시란느, 오노르.”
“응.”
“네.”
“네, 준영님.”
“배를 유지해줘. 그것이면 충분해.”
“알았어.”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크라켄은 무거운 존재다. 같은 속성이라서 크라켄의 무거운 존재감에 질식해버릴 수 있다.
아직 자신을 이루지 못한 3명은 마음이 꺾일 위험이 있다.
존재를 직접 주시하는 것보다 적이 만드는 현상을, 본체에서 멀어진 현상을 관찰하고 반응하는 것이 더 낫다.
‘반응이 늦어질 수 있지만,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들이 주시하지 않더라도 내가 반응할 수 있도록 이어줄 수 있다.
“온다. 첫 번째 촉수.”
빠른 공격.
본체로부터 뻗어 나오는 촉수는 창과 같다.
아직 거리가 있는데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전진 속도 가속. 좌로 최대한 꺾어.”
말로 지시하는 동시에,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 [종속체]와 접촉하는 능력을 이용해 세밀한 지시를 동시에 내렸다.
내게 종속된 존재는 배와 배 위의 아리나란, 네리미아와 엘프들만이 아니었다.
물속이 크라켄의 영역일지언정, 나의 종속물은 이미 사방에 뿌려졌다.
처음에 날렸던 관찰을 위한 종속물인 창날뿐만 아니라, 헤스티의 화염을 담았던 금속통이 터지고 남은 파편도 여전히 내게 종속되어 있다.
종속물을 통해 인지했다.
압도할 만큼 커다란 촉수는 그만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파악.
배가 지나온 자리의 수면이 찢어지며 물보라가 튀었다.
“우로 최대한. 속도를 줄이고.”
바리스와 수희는 수면 위로 튀어나온 크라켄의 촉수를 확인했지만, 네리미아, 시란느, 오노르 수속성 3명은 배의 운용에만 집중했다.
왼쪽 앞에서 터져나가는 수면.
물보라를 일으키며 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공격 패턴은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해저 동굴에서 나온 크라켄은 수면으로 나오지 않았다.
본체로 우리를 압박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촉수를 늘여서 공격해왔다.
“본체가 멀리 있으면, 공격은 창과 채찍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나의 말에 바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스는 나의 가르침을 도구로 현재의 경험을 상승을 위한 토대로 쌓아갔다.
창과 채찍의 방식, 이는 리치가 긴 공격을 하는 몬스터가 가지는 물리적인 특징이다.
인간과 다른 형태를 가진 몬스터도 무기를 든 인간과 비슷한 특징을 가진다.
힘의 중심이 본체이면 이 특징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힘의 중심점과 타격점이 떨어져 있을 때,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공격하는 방법은 창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채찍처럼 원을 그려 공격할 수 있지만, 이는 결국 창 휘두르기의 응용이자, 연장이다.
“정면으로 빠르게 가속.”
나는 다시 지시 내렸다.
뿌려둔 ‘종속물’로 공격을 파악하는 이상, 거리를 둔 공격은 모두 피해낼 수 있다.
물보라가 튀고, 배가 마구 흔들렸다.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쭉 뻗어진 크라켄의 촉수가 수면을 터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여러 개가 동시로 뻗어져 나오기도 했지만, 내가 힘의 중심이자, 공격의 시발점인 본체를 지켜보고 있는 이상, 피할 수 있는 공격이 되었다.
“좋아. 잘하고 있어.”
크라켄의 공격이 점점 더 복잡해졌지만, 우리의 배의 운용도 점점 더 정교해졌다.
공격이 반복되고 복잡해질수록, 네리미아와 시란느와 오노르가 압박감에서 벗어났다.
복잡한 공격은 3명이 쉽지 않다고 크라켄이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3명의 채워진 자존감은 무거운 존재감 앞에서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무거운 몸. 압박이 통하는 상대에게는 절망이겠지만, 나와 나와 함께 하는 이에게는 아니다.”
우리는 크라켄의 본체를 공격할 수 없다.
멀기 때문이다.
“거리는 크라켄의 것만이 아니야.”
거리는 공격을 인지하고 배를 움직일 시간을 우리에게 부여했다.
“다음은 감으려고 들 거다.”
나는 다음 공격을 예측했다.
창처럼 찔러 들어오고 빠져나갈 때, 크라켄을 파악해냈다.
약점을 확인했다. 크라켄의 촉수를 빠르게 거두는 움직임 자체가 약점을 증명했다.
크라켄은 내밀은 촉수를 빠르게 거두었다.
즉, 크라켄은 촉수의 강도에 상관없이 타격받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창처럼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모두 피해내는 이상, 크라켄은 촉수를 내밀어 접근한 다음, 쪼아오는 수밖에 없다.
“크라켄도 우리가 촉수를 아프게 할 수 있음을 아는 거다.”
일행에게 파악한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가 지쳐가는 만큼 적도 타격을 입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장기전에서는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된다.
“촉수 그 자체는 본체보다 강할 수 없다. 촉수가 더 강하다면 크라켄이 아니라 메두사겠지.”
바리스와 수희가 미소를 지으며 접근전을 준비했다.
우든 엘프들이 정성스럽게 제작한 나무줄기로 만든 끈을 허리에 맸다.
먼바다로 나간 선박이 해양 몬스터에게 습격받는 상황과 지금은 달랐다.
배 밖으로 한번 밀려나면 끝인 선원들과 달리 일행은 헤스티에게서 [물의 가호]를 받았다.
배 주변이라면 물 위에서 설 수 있고, 물 위에서 싸울 수 있다. 허리에 맨 끈을 당기면 바로 배로 돌아올 수 있다.
순간, 배로 접근하는 두 개의 촉수.
창처럼 찔러 들어와봤자 피해낸다는 것을 알고, 속도를 줄이는 대신 배의 움직임을 추격해 따라왔다.
접근을 허용했지만, 그뿐이었다.
언제 어디서 바다 괴물의 촉수가 올라와 배를 통째로 가라앉힐 거라는 공포는 일행에게 없었다.
“왼쪽에서 나온다.”
네리미아와 시란느, 오노르에게 알리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 세 명은 내게 의지를 전달받고 능숙하게 왼쪽에서 올라올 것을 피해 배를 움직였다.
바리스가 검을 잡았다. 수희가 자세를 취했다.
파아.
수면이 터지며 물이 흩날렸다. 물보라와 함께 촉수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이때까지와는 다른 촉수의 움직임.
빠르게 빠지지 않고 그대로 굽혀 배를 노렸다.
“내가.”
바리스가 외치며 배 위에서 전진했다.
“막아내겠어요.”
휘두르는 촉수를 향해 양손검을 휘둘렀다.
격한 충격.
바리스는 망설이지 않고 양손검으로 전해지는 충격을 다리를 통해 배로 전달했다.
배가 물을 가르고 그대로 밀려났다. 하지만, 전복되지 않았다.
그저 밀려나며 충격량을 감당해냈다.
“막혔네?”
수희가 단검을 휘둘렀다.
휘둘렀으나 바리스를 압살하지 못하고 막혀, 결과적으로 배를 밀어내기만 한 촉수에 단검으로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