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15층 공략 (3)
* * *
배를 멈췄다.
배 옆에서 헤엄치던 네리미아가 살기를 띄웠다.
아직 미궁층 보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알아채는 네리미아, 승리의 대가인 성장이 품고 있는 종족 특성과 아우러져 위험을 감지해냈다.
“해저 동굴이라…….”
이미 헤스티와 미궁층 보스는 신경전을 시작했다.
마치 작살을 던지는 것처럼 보스의 영역 밖에서 영역 안으로 깊은 물 속으로 물로 만든 창을 쏘아냈다.
헤스티 마력의 극히 일부분밖에 소모하지 않는 수십 개의 마법 공격.
보스의 영역을 침식하기 위해 계속 밀어붙이면 마력과 집중력이 유의미하게 소모될 테지만, 수십 개의 물로 만든 창은 그저 물리적인 힘만 담아 쏘아 보냈다.
다만, 창의 앞쪽 창두는 내게 종속된 창날로 이루어졌다. 물리적인 힘이 다해 물 아래 바닥으로 가라앉았지만, 상황과 지형 정보를 얻는 수단이 되었다.
“직접 확인하려고 했으면 힘들었겠어요.”
수희가 고개를 저었다.
동굴 안쪽으로 흐르는 해류가 순환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볼 때, 안이 막혀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접근하면 개미지옥처럼 해류를 끌어당겨 도망치지 못하도록 시도할 것이다.
페로가 있기에 탈출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지고 시작하는 상황이 유쾌할 수는 없다.
“그럼, 몇 가지 실험을 해볼까?”
이번 접근에서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할 이유가 없다. 정보만 모으고 뒤로 빠졌다가 다시 시도해도 된다.
[종속체 배치]가 있는 한 보급 물품은 물론, 종속된 인원을 밖으로 보내 휴식까지 가질 수 있기에 바리스와 수희, 헤스티와 페로, 나의 컨디션만 조절하면 된다.
다크 엘프들이 만든 금속통이 도착했다. 대포의 원리만 추측할 뿐 포탄의 제작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만들었다.
“이거 꽤 집중력 훈련이 될 듯해요.”
조금은 즐거운 듯이 헤스티가 말했다.
금속통 안에 화염의 힘을 극단적으로 압축한 다음 물속으로 집어넣어 터트리는 것이다.
급조된 물건이기에 계속해서 의지를 담아 조율해야 했다. 조화로 격을 이룬 헤스티가 아니라면 시도만으로도 지쳐버릴 것이다.
내가 금속통을 종속화시킨다고 해도 물리적인 힘을 더할 수 있을 뿐, 압축과 격발의 조율은 헤스티의 몫이었다.
*
배 위에서 다크 엘프 피리레가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았다.
채광뿐만 아니라, 금속 제품의 제작과 수리는 다크 엘프들의 특기였다.
함께 생존하고 번영한다는 가치 아래,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 간에 경쟁심보다 전우애가 싹텄지만 그래도 특기를 돋보이는 건 중요했다.
미궁 밖에서는 소소한 교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찰전 성격이 섞인 전투이기에 주력 인원이 직접 참가하지 않고, 엘프들이 병력을 이끌면서 지휘관 경험을 쌓아갔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우든 엘프들이 강세를 보였다.
숲을 이용한 소규모 기동에 익숙한 데다가, 점령지 도착 즉시 나무를 이용해 요새화하는 특기는 압도적인 효율을 보여주었다.
금속제 무기의 발전은 다크 엘프의 영광을 이어낼 기회였다.
“그럼, 이것부터.”
헤스티가 늘어놓은 금속통 중에 하나를 주웠다.
이미 내가 종속화시킨 물건, 그중에서도 표면이 두껍고 뚜껑을 닫을 수 있는 구조라 종속물에 발휘하는 염력으로 밀봉 가능한 금속통을 들어 올렸다.
두 눈을 감고 마법을 준비했다.
헤스티의 마력에 피부가 간질간질해질 때쯤 두 눈을 떴다.
나는 헤스티가 선택한 금속통을 공중으로 띄웠다.
끌려가 화염 마법사로 강제되었던 오노르가 조용히 주시했다. 이 시도에는 오노르의 경험으로 얻은 정보 역시 더해졌다.
화염 마법이 헤스티의 손 위에서 펼쳐졌다.
작은 금속통 속으로 화염이 압축되어 담아졌다. 화염 마법뿐만 아니라 중력 마법과 마력 자체에 대한 제어가 섬세하게 펼쳐졌다.
“날려주세요.”
“알았다.”
금속통을 배 밖으로 날렸다.
속도나 담긴 힘은 빠르지 않았다.
단순한 염력. 물 위는 여전히 나나 헤스티의 영역이 아니었다.
장악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미궁 보스와 기세 싸움이 시작되고 가진 기력의 총량을 겨루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물로 뒤덮인 곳에서 수속성 보스와 기력의 총량을 겨루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폭발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금속통과 배와의 거리를 띄우자, 헤스티가 힘을 제대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화염을 일으켜 금속통을 향해 날려 보냈다.
나는 금속통을 화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절했다.
마법으로 일으킨 화염은 닫힌 공간에서도 맹렬하게 타올랐다. 금속통 안에 담고 밀봉해도 꺼지지 않았다.
“마지막 하나.”
또 하나의 화염이 피어올랐다.
바리스가 입술을 말았다.
단순한 화염 마법일지라도 세 발은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같은 힘을 가했을 때 뭉퉁한 무기보다 뾰족한 무기가 더 치명적이다. 즉 면적이 작을수록 줄 수 있는 피해는 커지는 법이다.
헤스티가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왼손을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세 번째의 힘.
물의 힘을 부리기 시작했다.
금속통 아래쪽의 물이 요동쳤다.
미궁층 보스와 기세 싸움을 벌여 아주 작은 면적의 물 주도권을 확보했다.
전체를 보면 극히 적은 면적.
보스가 이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려면 특정 행동이 필요했다.
“드러내주면 좋고. 아니라면 드러나게 해주지.”
나는 전체를 둘러보며 말했다.
헤스티가 확보한 작은 면적.
물의 창을 만들기 충분했다.
이미 준영이 종속화한 창날을 창두로 삼아, 물의 창을 만들어 물속으로 날리는 건 시도했다.
다만, 창날 대신 금속통은 세밀한 힘 조절이 필요했다. 금속통은 내부에서 터져 나오려는 화염을 막는데 주력한 구조였다.
“어려워요.”
헤스티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눈썹은 부드럽게 휘어졌고 입술 끝은 웃었다.
“가자.”
“네.”
금속통 하나에 나의 집중과 헤스티의 의지를 담은 마력이 합쳐졌다.
*
뻥.
물 속의 폭발.
물 위로 들리는 소음은 적었다.
금속통 제작에 큰 기대를 하고 있는 다크 엘프 피리레가 조심스럽게 모두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피리레의 염려를 불식시키듯이 새로운 금속통이 떠올랐다.
헤스티의 앞에서 화염이 피어오르고 금속통 안에 담겼다. 금속통이 멀리 날아가고 헤스티는 세 개의 화염을 다시 한꺼번에 일으켰다.
“흠.”
바리스가 침음을 흘렸다.
그녀의 침음이 화염을 담은 금속통의 효과를 증명했다.
새로운 공격 수단을 보면, 아군의 공격 수단이라도 막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당연했다.
전사는 원거리 공격을 받을 때,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막을 것인가, 피할 것인가.
최선은 회피였다. 하지만, 뒤에 아군이 있다던가 격돌 시 일어나는 경직으로 반격을 할 수 있다면 막거나 막아야만 한다.
직접적인 화염 마법은 눈으로 보고 피할지 막을지 바로 판단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금속통에 압축된 화염은 순간적으로 내려야 하는 판단을 그릇되게 만들 수 있다.
거기에 응용 역시 가능했다.
약한 화염이 담긴 금속통 열 개와 강력한 화염이 담긴 금속통 하나가 동시에 날아온다면?
회피를 망설이는 순간, 서른 발의 화염이 쏟아지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
“후훗.”
헤스티의 콧소리 아래에서 금속통에 압축되는 화염이 점점 더 강해졌다.
과한 압력에 도중에 폭발하는 경우도 생겼지만, 강한 압축은 배와 거리는 둔 물 위에서 시도한 데다가, 바리스가 얇게 보호막까지 치니 아군에게는 피해가 없었다.
“히잉, 어지러워요.”
배 옆에서 헤엄치던 머메이드 네리미아가 투덜거리면서 배 위로 올라왔다.
어깨를 토닥토닥 안아주자, 뺨을 나의 가슴에 비비며 칭얼거렸다.
“아픈 건 아닌데, 엄청나게 불쾌해요. 몸 전체가 떨리니까 똑바로 헤엄치고 있는 건지 헷갈려요. 으으, 토할 것 같아요.”
“과연.”
“바닷가에서 대포를 쏘면 머메이드들이 도망칠 만하네요.”
나의 수긍에 수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에서도 옆에서 화염 마법이 폭발하면 직접적인 데미지를 입지 않아도 균형 감각이 흔들린다.
물을 통한 진동은 공기를 통한 진동보다 더했다.
인간과 머메이드의 혼혈인 네리미아가 이상 반응을 일으킬 정도니 수중 몬스터는 더크게 영향받는다고 봐야 했다.
바다의 전투선에서 쏘는 대포야 아예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지만, 화염을 담은 금속통은 인어의 눈물 미궁층 보스가 숨은 해저 동굴 근처까지 쑤셔 넣은 다음 폭발했다.
“실제 데미지는 적겠지. 외부 상처는 아예 없을 거야. 하지만, 수중 생물에 기반한 몬스터라면.”
“기분 나빠서 뛰쳐나올 거에요.”
네리미아가 품속에서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
배가 흔들렸다.
피리레가 배 위에서 아예 주저앉아 안정된 자세를 취했다.
화염 금속통 폭발의 여파가 아니었다. 더 거대한 것이 움직이며 만드는 흔들림, 물이 아닌 그 아래 박혀있던 것이 뽑혀 나오면서 일어나는 지진.
“나온다.”
미궁 15층, 인어의 눈물층 보스.
크라켄.
모든 바다 생물의 포식자, 15층을 지배하는 머메이드마저 먹이로 삼는 괴물.
머메이드가 흘린 눈물이 진주가 되어 바닥을 덮은 해저 동굴에서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