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15층 공략 (2)
* * *
심상찮은 파도.
해류를 장악한 헤스티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때?”
“아직 괜찮아요.”
나는 헤스티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집중했다.
네리미아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키던 머메이드 챔피언과 동일급의 챔피언이 인지되었다.
머메이드 챔피언.
한때는 절망의 벽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저 미궁층 내의 중간 보스일 뿐이다.
“우선 챔피언에 집중한다.”
헤스티는 네리미아를 통해 감지한 챔피언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너머를 살피고 있다.
“하지만….”
“헤스티, 옆을 봐.”
“아.”
바리스가 미소지었다. 수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미궁층 최종 보스는 함께 잡을 거야.”
힘을 얻게 되면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아래로 거느리는 이들의 부족함을 더욱 예리하고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다.
냉정한 성격이라면 쉽게 극복해낼 수 있지만, 다정다감할수록 자신이 인지한 상황이 그대로 펼쳐져, 거느리는 이가 다치면 자신의 잘못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조언이 필요했다.
눈은 적을 보더라도 옆을 느끼게 해야 한다.
“후우. 네. 준영님.”
헤스티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눈썹을 천천히 늘어트리는 헤스티. 살짝 인지가 둔감해졌다.
머메이드 챔피언 너머에 보스가 인지된다고 해서, 계속해서 노려볼 순 없다.
격이 올랐을 때, 중요한 건 한없이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어휴, 뜨거워.”
수희가 손부채를 만들어 흔들었다.
“천천히 가까운 것부터 처리하자.”
바리스가 원칙적인 이야기를 했다.
뻔하지만 정답이기도 했다.
“온다.”
머메이드 챔피언, 계단에서 처리했던 것과는 다르게 계단을 지킬 의무가 없으니 우리를 발견하자 다가왔다.
바리스가 아리나란과 네리미아에게 손을 저었다.
머메이드가 상대라면 개인기 실전 훈련이 될 수 있지만, 챔피언부터는 아니었다.
이전 전투에서는 까다로워 아리나란을 이용해 준영이 고공 낙하해서 처치했었다. 환경 때문에 전력으로 맞부딪힐 수 없어 쓴 편법에 가까운 전술이었다.
“헤스티.”
“응, 맡겨줘.”
바리스가 헤스티를 불렀다.
헤스티가 바리스에 응했다. 더 큰 존재를 의식하되 매몰당하지 않고 집중을 끌어모았다.
머메이드보다 4배는 큰 몸.
몸도 크지만, 물고기의 형태를 가진 하체와 지느러미도 길었다.
쓰는 창 역시 크고 길어 바리스의 양손검을 이용한 사정거리도 머메이드 챔피언의 사정거리보다 훨씬 짧았다.
게다가 길고 크면 그만큼 속도가 떨어지는 법인데, 챔피언은 오히려 더 빨랐다.
‘무엇보다도 버거운 건. 물.’
환경 그 자체가 문제였다.
바리스는 머메이드 챔피언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더 강하고 더 빠른 공격이라도 양손검 반경 안쪽은 바리스의 영역, 적의 창날이 몸에 닿기 전에 양손검으로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바리스도 전사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형, 자세를 초월하지 못했다.
머메이드 챔피언은 창의 사정거리 열 배가 넘는 원거리에서 숨 쉬듯이 물을 제어했고 근접 전사들의 자세를 흔들었다.
창과 물의 악의를 담아 내지르는 마법의 창은 튕겨내고 막아낼 수 있지만, 아래에 깔린 물을 배제할 수 없었다.
바리스가 천천히 양손검을 들어 올렸다.
웃으며 그려지는 둥근 눈썹처럼 검으로 호선을 그렸다.
양손검으로 천천히 물을 헤치며 원을 만들고, 만들어진 원이 물을 밀어냈다.
악의가 담긴 물이 밀려난 공간에 헤스티의 의지가 담긴 물이 채워졌다.
물속에서 급격한 움직임은 어렵다. 이는 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헤스티는 바리스의 움직임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저 바리스에게 익숙한 흐름을 만들고 머메이드 챔피언의 개입을 차단시켰다.
“충분해.”
헤스티에게 감사를 전한 바리스는 빠르지 않았다.
그저 한걸음, 느리지만 부드러운 걸음이 머메이드 챔피언을 압박했다.
더 긴 팔, 더 긴 창, 더 빠른 공격.
격렬하게 찔러넣는 챔피언의 창이 모두 양손검에 막혔다.
‘머메이드 챔피언의 모든 공격은 바리스의 몸을 향하니까. 마치 물을 모으는 깔때기처럼.’
더 큰 덩치는 큰 동작을 만들었다. 긴 사정거리는 더 느린 바리스의 검이 방어점에 도달하는 것보다 느리게 도달하게 만드는 방해하는 거리가 되었다.
조금씩 가까워졌다.
거리가 줄어든 만큼, 머메이드 챔피언의 공격이 더욱 매섭게 부딪혔다.
“더 가까워지면 너의 공격을 막기 힘들겠지.”
하지만, 바리스가 한 발 더 앞으로 내디뎠다.
챔피언의 창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끼릭끼.
물속인데도 검과 창이 격돌하는 음파가 터졌다.
“하지만, 이쪽은 혼자가 아니야.”
나는 바리스의 몸 그림자 뒤에서 튀어 나갔다.
“잘했어. 바리스.”
레리아나의 검을 살며시 잡고 빠르게 접근했다. 레리아나의 핑크빛 검기가 그 색에 어울리지 않게 살기를 띄웠다.
레리아나는 비록 어린 나이의 검에 맺혔을망정 적에게 잔혹했다. 몬스터에 그것도 여성형 몬스터라면 특성을 드러내기 주저하지 않았다.
크에에에.
머메이드 챔피언이 포효를 내지르며 꼬리를 휘둘렀다.
거력을 담은 질량이 육중한 물결을 만들며 덮쳤다.
다만, 나는 흐름에 몸을 싣는 데 익숙했다. 거기다가 뒤는 헤스티가 장악한 물이 받치고 있는 만큼 밀려드는 육중한 물결에 거스르지 않고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마치 낙엽이 빗자루가 닿기도 전에 빗자루가 일으킨 바람에 날아가는 것처럼.
밀려 날아가면서 레리아나의 검을 휘둘렀다.
핑크빛 검기로 덮쳐오는 머메이드 챔피언의 꼬리에 얕은 선을 만들었다.
크에.
미세한 상처.
하지만, 머메이드 챔피언은 고통에 날뛰었다.
리자드맨 계열은 꼬리를 공격 무기로 활용하곤 했다. 꼬리를 흔들고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
꼬리에 힘을 담아 휘둘러도 두 다리로 균형을 잡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메이드는 중심을 꼬리와 꼬리에 달린 지느러미로 잡았다.
“잘못된 공격은 아니지.”
주변의 물을 장악하고 뛰어난 육체 능력을 지닌 머메이드 챔피언의 꼬리치기는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한다.
다만, 상대가 나빴다.
“지금이야.”
동작이 큰 만큼, 나와 바리스, 수희에 비해 근접전 감각이 떨어지는 네리미아, 오노르, 시란느도 힘을 투사할 타이밍을 잡았다.
헤스티의 주도 아래, 의지를 담은 물결이 모여 머메이드 챔피언의 영역을 밀어붙였다.
물이 밀려 나간 자리는 채워지는 법.
헤스티의 의지가 투영된 물이 머메이드 챔피언에게 밀려들었다.
머메이드 챔피언의 영역에서 헤스티의 영역으로 바뀌는 변화.
변화 사이에 음습한 그늘이 숨어들었다.
스며들 듯 접근한 수희가 비늘과 비늘 사이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온몸으로 요동치는 머메이드 챔피언.
레리아나의 검에 당한 첫 번째 상처. 수희의 단검에 당한 두 번째 상처.
더 이상의 상처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거세게 창을 휘둘렀다.
끼가가각.
다시 한번 챔피언의 창과 바리스의 양손검이 격돌했다.
바리스가 밀려났다.
그러나 자세는 굳건했다.
양손검의 검면에 챔피언의 창이 막혀 멈췄다. 바리스와 챔피언이 정지했다.
바리스가 미소지었다.
“내겐 동료가 있으니까.”
바리스가 챔피언을 방어를 전담하는 동안, 공격과 마법이 이어졌다.
머메이드 챔피언이 쓰러졌다.
*
물 위로 올라갔다.
“파하.”
바리스가 크게 숨을 토해냈다.
원래부터 짧은 시간이라면 무호흡 전투가 가능한 데다가, 헤스티의 [물의 가호]로 수중 호흡까지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물 위에서 호흡하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따를 수 없었다.
“물기를 제거할게요.”
네리미아가 배 위에 오른 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전투에서 묻은 피와 오물이 물기와 함께 제거되었다.
“고마워.”
질척한 습기를 걷어내고 부드러운 수분을 다시 머금은 네리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리미아가 레리아나의 검을 검집에 넣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었다.
나는 안겨 오는 네리미아의 허리에서 등으로 손가락 끝으로 쓰윽 쓰다듬으며 다음을 생각했다.
네리미아는 긴장을 풀었지만, 헤스티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수중 전투 대비라는 면을 볼 때, 훌륭한 결과야.”
나의 말에 바리스가 헤스티와 일행을 둘러보고,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격렬하게 싸우긴 했지만, 체력이 남았다.
희생자가 나온 결전이 아니었다. 중상자가 없는 만큼 성장을 위한 전투였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개인 수중전 능력은 물론 파티 연계 능력이 크게 상승했다.
“여기서 쉬는 것이 중요해.”
네리미아를 안은 채로 헤스티를 끌어당겨 안았다.
“하지만….”
“그래, 수상하지.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미궁층 보스 존재감이 느껴지는데, 참전하지 않았어.”
“그래요. 그래서 더….”
“다르게 생각하면 어떨까? 보스는 난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난입할 수 없는 것이라면?”
“혹시, 고정형 몬스터.”
수희가 다가왔다. 헤스티의 컨디션을 관리하며 나누는 대화에 수희 역시 참가했다.
“고정형 몬스터라면 경험해봤잖아. 개미지옥 같은 거.”
“쉽게 처리했었지.”
“촉수를 사출해서 끌어당긴다고 해도 에드샤가 미끄러지는 경사면 자체를 무력화시켰으니까.”
에드샤가 활약했었다.
“비슷한 형식의 전투라면, 범위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안전하겠군요.”
“그래, 해보고 싶은 것도 있고.”
바다 지형을 벗어나기 전에 쇠통 안에 화염을 압축해 폭발시키는 방식, 대포를 쏘는 방식을 흉내를 내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다.
헤스티가 화염 마법에도 익숙한 만큼, 나의 [종속체 부유력 부여]와 연계하면 흉내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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