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전장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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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켄스 백작은 상황을 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 재능은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면에서도 드러났다.
“기사단장, 즉시 반격에 나서게.”
“하지만, 백작님. 부상과 피로가 심각합니다.”
“깊게 추적할 필요 없어. 나중에 계산할 때, 전공이 적게 나와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 전의를 반드시 보여야 해.”
백작가 기사단장이 후켄스 백작의 지시에 따랐다.
그가 분석한 전황도 후켄스 백작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부하와 병사들의 보존에 더 큰 의미를 두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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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 병사들의 동요가 커졌다.
백작가 성을 공략은 실패했고, 마법으로 나타난 후방의 요새를 공격한 기사단장이 후퇴했다.
화려하게 병사들을 지원해주던 마법사 하나는 적에게 잡혔고, 나머지 하나는 아군을 배려하지 않고 싸우는 바람에 혼란만 가중시키다가 아군과 대치했다.
누구에게도 탈영이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이는 전황을 크게 볼 줄 아는 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제대로 된 후퇴를 바랄 뿐이었다.
백작가에서 모든 기사가 성 밖으로 나와 전열 갖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으로 압박받아 탈영병이 증가하면, 후작가 부대는 양면 전투가 아니라 포위당할 수가 있었다.
“단장님….”
“...”
부관은 단장에게 조언을 올리지 못했다.
후작가를 위해서라면 남은 병력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지만, 기사단장에게는 부대가 전멸하더라도 저들을 처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후퇴한다.”
“단장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정신없을 거야. 더 이상 백작가 영지를 차지하는 전투가 아닐 테니까.”
베리랑트는 모험을 즐기지 않았다.
소극적인 전투로 책망받을지라도 미지의 힘에 갈려나가는 건 질색이었다.
“이번 전투는 후작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가 아니야, 대륙을 뒤흔드는 전쟁의 전초전이야.”
“아…. 지원마법사들.”
“그래, 귀족이 귀족으로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힘, 무력도 마법도 없는 귀족들이 하룻밤 사이에 암살당하지 않게 해주는 힘이지.”
미궁은 수많은 탐색자를 집어삼키는 대신,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월자를 낳았다.
초월자는 암살로 귀족들의 질서를 무너트릴 수 있다.
귀족과 귀족의 우두머리인 왕이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강자가 직접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
“지원마법사가 혼란에 빠진 건 관리상의 사고라고 할지라도, 탐색자의 손에 넘어가는 건 달라.”
“그렇다면.”
“그래, 왕이 움직일 거다. 그것도 귀족들 전부를 대동한 채. 왕궁의 마법사 역시.”
베리랑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나는 괜찮아. 후작님께서도 무례한 권력자들이 몰려오는데 집 지키는 개를 쫓아내지 않으실 테니.”
부관은 자신을 집 지키는 개로 거론하는 베리랑트에 차마 동의하지 못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만 보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들리는 베리랑트의 본심을 못 들은 척했다.
“왕과 왕을 따르는 무리, 왕궁의 마법사와 저 ‘숲에서 걸어 나온 자’와 충돌은 성장이 정체되어있는 내게 길을 보여줄 테지.”
그저, 부관은 기사단장 베리랑트의 지시를 전군에 전달하는 데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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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가는 후작가 병력을 압박했지만, 추적하지 않았다.
후작가 기사단의 여력도 문제지만, ‘숲에서 걸어 나온 자’들에게서 수상한 전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상자를 살피고 전력을 보존해, 다음 전투에 대비해라.’
후켄스 백작은 전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그들에게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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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리에게 다가갔다.
옷매무새를 잡아주는 척, 에리를 쓰다듬었다.
“후켄스 백작에게 선전 포고를 부탁해.”
“네, 맡겨주세요.”
에리의 옆에서 수희가 발끝을 까닥거리며 자신을 드러냈다.
“나도 가니까, 걱정하지마.”
시란느와 오노르는 휴식을 위해 빠지고 둘을 살피고 돕기 위해 머메이드 네리미아도 빠졌다.
나머지 엘프들까지 모아서 다음 계획을 밝혔다.
우리가 단순히 지원마법사를 사살했으면, 백작가와 동맹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원마법사를 종속시켰다.
적 기사단장 베리랑트 정도면 종속에 대해 몰라도, 지원마법사의 ‘세뇌’를 깨트렸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후작가나 후작가 정도 세력과의 전투라면, 백작가와 동맹을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이득을 줄 수 있다.
단순하게 보면, 영지전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적은 귀족 지배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이때, 똑같이 귀족 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동맹은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변수였다.
능력이 있지만, 시란느가 괄시받는 일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할 정도로 계산적인 후켄스 백작이라면 끊임없이 우리와 귀족 세계를 저울질할 테고 유혹받을 것이다.
차라리, 내 밑에 두고, 충분한 이득을 주는 것이 나았다.
“전투는 부상자를 수습한 3일 후, 그리고 성 밖에 비전투 지역을 지정할 테니, 부상자와 비전투 인원은 휩쓸리지 않게.
항복한다면 이전 소유물과 전리품은 인정할 거야. 뭐, 그 금력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간섭받게 될 테지만.”
“그리고, 오노르와 혼인을 포기시키고?”
수희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더했다.
“그렇지.”
나 역시 쉽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노르에게 백작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면 모르겠지만, 오노르는 자신의 운명을 감당하는데 버거웠으며 미련이 남아 있어도 시란느에 대한 미련이 전부였다.
우리는 성 앞에서 휴식을 취하며 후켄스 백작의 대응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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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하고 반나절이 지나갔을 때, 백작에게서 항복의 사자가 왔다.
화려하게 꾸민 마차와 함께.
이틀과 반나절이 쉽게 항복하지 않는다는 귀족의 자존심을 위해 보낸 시간이 아니라, 마차를 꾸미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고급 마차 안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두 명의 여인이 모셔져 있었다.
“하아.”
바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의 문을 열고 보인 광경에 고개를 흔들었다.
화려한 외부만큼 내부도 화려했고, 타고 있는 귀부인의 두 팔과 발을 묶고, 입에 물린 비단천마저 범상치 않았다.
“일어설 수 있어?”
부드럽게 건네는 바리스의 말에 세니안과 세니안의 어미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부어오르는 눈은 얼마나 울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했다.
물론, 바리스라고 해도 마냥 동정하지 않았다.
후작가의 이름을 등에 지고, 시란느와 오노르를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바리스와 일행은 충분히 파악했다.
나이가 많은 시중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세니안과 세니안의 어미를 포기하는 백작의 행동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웅읍 우.”
세니안이 비틀거리며 재갈을 물린 입으로 웅얼거렸다.
눈앞에 표정 없이 바라보는 시란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란느는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할 수 있기에 굳이 입에 물린 비단을 풀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바리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바리스가 격리된 장소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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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시란느는 두 모녀의 처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해도 배신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미궁 저층에 데리고 다니다가 완전히 몰리고 굴복하면 종속하기로 결정되었다.
종속한 후에는 시란느의 아래에서 행정 요원 등으로 부려먹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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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느는 살짝 건드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을 느끼기도 전에 접촉할 수 있는 강한 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시란느의 시선의 끝에서 오노르가 미소지었다.
“자, 가자. 지금이 기회야.”
웃으면서 팔짱을 껴오는 오노르에 시란느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시란느보다 키가 조금 더 큰 오노르는 마치 언니 같았다. 어려 보이는 몸뿐만 아니라 행동도 젊어서 시란느에게 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마냥 자신을 보호하던 어머니에서 옆에서 함께 하는 이로, 같은 적과 싸워야 할 동료로.
오노르는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상대해왔던 적에 대해 털어놓았다.
적은 백작의 보호 아래의 시란느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단순히 마부와 바람이 났거나 집안사람들의 괄시가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님을 시란느에게 말했다.
“네, 어머니.”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떠났던 어머니가 낀 팔짱에 힘을 줬다.
“아이,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
다만, 시란느가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 동감하기 어려운 감성이 있었다. 시란느가 어릴 때는 잘도 숨겼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 준영님 보니까, 연상 취향인 것 같지 않아. 에리도 그렇고 연하로 보이는 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
자신이 안겼고, 어머니도 안은 남자의 취향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나눌 정도로 시란느는 스스럼없는 성격이 아니었다.
“내가 무릎을 꿇고 오른쪽 아래로 파고들 테니까, 네가 왼쪽에서 서서 다가가.”
전략까지 세워가며 준영에게 안기려는 오노르에 시란느는 마냥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이전에 엘프들의 사고 방식을 접하지 않았다면 크게 당황했을지도 몰랐다.
엘프들은 종족을 지키고 번영시켜줄 수 있는 남자에게 종족 전체가 매달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시란느는 오노르의 어깨에 뺨을 부볐다.
경지가 낮지만, 시란느는 알 수 있었다.
보이는 것처럼 오노르는 마냥 요염한 마녀가 아니었다. 오노르가 시란느를 경계하지 않기에, 시란느는 오노르가 깊고 먼일을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소한 행동은 이해할 수 없지만, 오노르가 걷는 길이 시란느 자신을 위한 길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