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8화 〉 주둔지 공략 (108/139)

〈 108화 〉 주둔지 공략

* * *

후켄스 백작으로부터 응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도 원하는 바였으니까요. 후작이 반응을 늦게 전할 이유가 없지요.”

수희가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으면서 의견을 말했다.

외부에 나가서 물건을 사 오면서,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것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에게 안기며 보고하기를 좋아했지만, 그래도, 바리스가 있으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곤 했다.

“켐프텐 주둔지에 모인 무리는 후작가의 병사가 아니다….”

“네, 시란느가 전해준 후작가의 반응이에요.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 귀족들은 병사들의 목숨을 쉽게 보는군요.”

바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토니오 후작은 시란느가 속해있는 후켄스 백작의 영지를 욕심내고 있다.

다만 마냥 점령하고 그들의 것으로 하기에는 왕과 다른 귀족에게 눈치가 보였다.

서로 경쟁 관계인만큼, 적당한 명분이 없는 확장은 개입을 야기할 것이다.

켐프텐 주둔지의 모인 병사들은 후작가가 개입할 이유가 만들어지면 즉시 투입하기 위해 배치된 부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부대였다.

“후작가에서 토벌을 권했다는군요. 마냥 권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도적을 토벌할 역량이 없다면, 즉 영지를 보호할 역량이 없다면 영지를 내놓는 것이 어떠냐고 모욕하면서.”

에리가 시란느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우리가 개입하기 전까지 백작가에서는 켐프텐 주둔지의 군대를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영지 경계 지역에 무장 세력이 있는데도 토벌하지 못하는 후켄스 백작가의 무능을 안토니오 후작이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시란느가 켐프텐 주둔지를 점령할 이유가 완성되었군.”

수희가 손을 들어 올렸다.

“투입하는 엘프들의 귀는 가리지 않을 건가요?”

“가리지 않을 거야.”

나의 확언에 회의에 참석한 드리아데와 피리레가 미소지었다.

“또 다른 개입을 부를 수 있어요.”

엘프들과 다르게 수희는 염려를 드러냈다.

“시란느와 후켄스 백작은 원하지 않겠지만, 그 역시 우리의 목적이야. 더 큰 분쟁에서 승리해야 엘프들이 자리 잡을 수 있다.

또한, 분쟁 자체가 이득이 된다.”

백작가를 차지하기 위한 병력 동원과 방어하기 위한 병력 동원의 수준을 넘어 후작가 전체 역량과 그 이상을 동원하는 전쟁이 되면, 미궁은 반응할 수밖에 없다.

“드리아데, 피리레.”

“네, 준영님.”

“말씀하세요.”

“엘프들은 시란느가 빌려준 선임병과 함께 켐프텐 주둔지로 이동해. 앞으로 부대 단위 작전이 이어질 만큼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에리.”

“네, 준영님.”

“시란느에게 연락해. 켐프텐 주둔지로 호위대를 이끌고 오라고 전달해.”

“그럼.”

“그래, 켐프텐 주둔지를 점령한다.”

* * *

* * *

한스는 불안한 눈으로 눈치를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의 페르는 마음껏 고르게 한 장비에 희희낙락한 모양이지만, 한스는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페르, 우리 싸우러 나가나 본데.”

입을 여는 한스에게 한스를 담당하는 우든 엘프가 차갑게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경고가 없었다.

“뭐, 그런가 보지.”

“우리 큰일 난 거 아니야?”

“큰일이야, 이미 일어났고. 시발, 문장도 없는 지휘관한테 끌려올 때부터 이미 끝났었어. 그런데 너 알아?”

“뭘?”

“이분들이 알려주는 거.”

페르라고 불린 중년 남자는 자신을 시야 안에 두는 엘프를 향해 비굴하게 웃었다.

보는 앞에서 잡담하면 안 될 모양새지만, 이미 자신들은 언제나 엘프들의 인지 반경 안에 있었다.

잡담을 위해 인간들끼리 은밀히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고급 기술이야. 내일 당장 죽을 놈한테 가르쳐줄만한 것이 아니야.”

“뭐?”

한스는 페르의 말에 다시 한번 엘프들의 눈치를 보았다.

딴에는 중요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엘프들은 탈출 시도가 아니면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반응하지 않았다.

“당장이 아니라, 길게 써먹을 놈한테 필요한 기술이야.”

“그, 그럼.”

“그래, 그러니까. 몸 관리나 해. 저기 일찌감치 퍼져서 냉대당하는 브렌 꼴 안 나려면.”

한스와 페르도 엘프들과 함께 산과 언덕을 헤매던 것을 기억했다.

늘 냉정해 보이던 엘프들도 긴장한 것 보면 중요한 일인듯했고, 한스와 페르도 죽을힘을 다해 엘프들을 따라다녔다.

“시발, 너도 눈이 있으면, 우리에게 지급된 장비 수준을 알잖아.”

“그렇지.”

“경비대 얘들 장비보다 좋아. 한번 써먹고 죽을 놈한테 왜 이런 장비를 줘. 음식도 그렇고.”

“그런가.”

“그래, 병신아. 몸이나 만들어. 뒤에 들어올 놈들한테 장비 빼앗기지 않으려면.”

“아, 그렇군. 그래.”

이전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병사들.

노예병이라고 명명했지만, 취급이 나쁘지 않았다.

준영도 엘프도 굳이 이들을 괴롭힐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인원에 비해 물자가 충분했다.

후작가에 지휘선상에 있던 자들은 모두 처리했기에 이들은 단순히 끌려온 징집병에 불과했다. 그전에도 충성심이 없던 이들이었다.

엘프들은 이들이 배고파서 픽픽 쓰러지기를 원하지 않아 충분히 식량을 지급했고, 이후 작전을 위해 이전 전투에서 수거한 장비 중에 제대로 된 것을 나누어주었다.

딱 봐도 전투에서 생존율을 올릴 수 있는 장비. 건강한 몸을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배급되는 식량.

거기에 차갑게 내뱉긴 해도, 엘프들이 팀을 나누어서 훈련한 후로는 짧은 조언까지 해주었다.

엘프들이 상대 팀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한 조언이지만, 노예병이 쉽게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받아졌다.

계속해서 이용해야할 병력이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

*

*

이른 새벽, 켐프텐 주둔지 인근.

두 부대가 합류했다.

담담한 표정의 ‘숲에서 걸어나온 자’들의 부대와 긴장한 시란느의 호위대.

‘숲에서 걸어나온 자’는 준영의 부대를 일컫는 부대명이었다. 숲속의 저택을 안식처로 여기는 원래 일행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엘프들이 더욱 흡족해했다.

시란느의 호위대는 수가 늘어났다.

전술 능력이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원래의 호위대에 밑 아래 징집병이 늘었다.

이전의 구성은 시란느의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기에 단순 징집병이 적었다. 하지만, 켐프텐 공략은 전략 목표가 확실한 만큼 단순 동원 병력이 더해졌다.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시란느 호위대 아래 징집병에게 엘프 산하 노예병이 으쓱거리는 일이 있었지만, 전투의 공포를 흩트리기 위한 사소한 일일 뿐이었다.

“이번에 마법사가 중요해.”

나의 말에 헤스티는 눈빛을 반짝이며 두 손을 꽉 쥐었다.

나는 헤스티에게 웃어주고 에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법사가 중요하다는 말은 마법사 보호 역시 중요하다는 의미야.”

이제 완전히 우리 일행이 된 마법사 페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숲속에 저택을 마련할 때께지만해도 미궁에 남는 등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미궁 밖에서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꼈는지, 힘을 보태주기로 했다.

“이전의 호위대 구출과는 두 가지가 달라.”

나는 브리핑을 이었다.

“이번은 기습이 아니야. 적은 대비하고 있다. 후켄스 백작을 통한 교섭은 승리 후에 시란느가, 우리의 외부 교섭인 역할을 하는 시란느가 켐프텐 주둔지를 소유할 명분이 되지만, 동시에 안토니오 후작이 켐프텐 주둔지에 경계 명령을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나는 긴장하는 엘프들을 둘러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전보다 불리한 점만 있는 건 아니야. 시란느 호위대를 습격했던 후작가 부기사단장 마그레가 이전 전투에서 우리에게 죽었지.”

“그가 이 구역 총대장이었군요.”

“그래, 그는 켐프텐 주둔지를 확보한 다음 시란느 호위대를 습격했던 거야. 물론 후작가에서 다시 지휘관을 보냈을 테지만, 마그레보다 대단한 자를 보낼 수 없고,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주둔지를 통제할 수 없어.”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래.”

나는 에리의 이해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에게 외부와 접하는 활동을 맡기고, 같이 정치와 외교에 관해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켐프텐 주둔지에는 마그레보다 못한 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마그레의 이름이 알려진 이유는 그자가 기사임에도 명예에 얽매이지 않아서였다.

귀족들은 그들의 분쟁에 있어서 명예와 명분을 따졌다.

그들이 고귀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전쟁은 전제 조건이 있었다.

승자와 패자 모두 공멸하는 전투를 주변에서 두고 보지 않았다. 승자는 최소한의 방어병력을 유지한 채로 승리해야 했다.

전력의 공백 지대가 나타나면 안 되었다. 몬스터는 전쟁의 폐허를 누비는 순간 수가 급격하게 팽창했고 이는 전투를 치르지 않는 주변 지역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는 주변 권력자들을 개입하게 만들었고, 개입할 수밖에 없는 명분이 되었다.

다만, 개입하더라도 합의가 필요했다. 개입 세력이 전쟁을 치르는 세력 각각에 합류한다면 더 큰 전쟁으로 확대될 뿐이었다.

결국, 합의를 위한 명분론과 명분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예에 목을 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기사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무력을 넘어 권력까지 꿈꾸는 기사들은 명예를 소중히 했다.

‘마그레처럼 명예롭지 않은 일에 투입되기를 바라는 강자는 적어. 켐프텐 주둔지에 투입되는 지휘관은 마그레 이하다.’

방어 효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형지물과 각 병사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만 한다.

*

“그럼. 출진이다.”

호위대와 합류한 부대를 전진시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