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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화 〉 습격 (104/139)

〈 104화 〉 습격

* * *

수희는 고개를 숙인 채, 손짓했다.

다크 엘프 피리레가 지시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 모습에 수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피리레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엘프는 기본적으로 살기와 기척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특히 우든 엘프는 숲에서 작정하고 숨으면 동급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다.

갈색 피부를 가진 다크 엘프 또한, 빛이 없는 동굴에서만큼은 우든 엘프 못지않았다.

하지만, 피리레는 그 이상을 원했다.

‘언제까지 종족 특성에만 의존하지 않을 거야.’

준영에게 안기면서 아이가 맺히길 기원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았다.

아이를 얻게 되더라도 힘이 없다면 아이를 지킬 수 없다. 자신과 아이를 지키지 못하는 종족에게는 비극이 펼쳐질 뿐이다.

다크 엘프 수호자들. 그들은 피리레와 아래의 다크 엘프들과 다르게 너머를 볼 줄 알았다.

너머를 보았기에 절망했고, 우든 엘프에게 비극을 강요하고 자신도 붕괴되는 방법을 택했었다.

‘나는 그들과 다를 수 있어.’

피리레가 그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이런 예상마저도 무의미해졌다.

피리레는 수희를 따라 은신을 펼쳤다.

준영의 아래에 속하게 되면서 미궁 탐색자들의 특징을 다크 엘프들도 얻었다.

하는 행동에 따라 성장했다.

성장은 다크 엘프의 번영을 가져올 것이다. 성장은 엘프들에게 맺힐 아이들의 아버지, 준영의 옆을 차지할 자격을 줄 것이다.

피리레는 숨어서 웃었다.

은은한 우월감. 완전히 준영에 속하기에 피리레가 보고 느낀 것을 준영에 그대로 전할 수 있다.

노예의 족쇄 자랑 같을지라도 상관없었다. 수희의 은신이 뛰어나지만, 보고 느낀 것을 준영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은 피리레처럼 완전히 종속된 이만 가능했다.

시란느와 시란느 호위대,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자들의 정보가 숨어서 정찰하는 수희와 피리레에 의해 완전히 파악되었다.

* * *

‘더이상 접근하지 마라.’

나는 피리레를 통해 수희와 피리레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보다 격이 떨어지는 피리레는 느끼지 못했지만, 시란느를 노리는 자 중에는 피리레의 감각을 속일만한 자가 있다.

더 이상 다가가면 피리레의 은신을 간파할 것이다.

저들이 나의 것을 노린다면 급하게 움직일테지만, 대상은 시란느와 시란느의 호위대였다.

상황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바리스.”

“네, 준영씨.”

따르는 엘프 앞에서 내게 대답했다.

바리스는 꾸준히 엘프들을 데리고 미궁을 탐색했다. 새로운 층이 아니라 이미 경험했던 층의 반복이지만, 엘프들에게 뿐만 아니라 바리스에게 의미가 있었다.

내가 참가하지 않은 전투는 그만큼 위험했고, 바리스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웠다.

바리스와 엘프의 유대감 강화도 큰 이득이었다. 바리스는 전력으로 지키고자 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했고, 전장은 따르는 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엘프에게도 바리스를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시간이 되었다.

“단순한 용병대가 아니야. 어딘가의 기사단일 가능성이 커. 오랫동안 통일된 훈련을 받은 집단이 시란느의 호위대를 노리는군.”

“적을 보지 못했지만….”

바리스가 웃었다.

“우리도 쉽지 않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방심하지 않기에, 세상이 넓기에 얌전하게 말했을 뿐 바리스의 어투에는 자신감이 담겼다.

‘외부 군대와 싸우는 첫 번째 전투로 더할 나위 없지.’

우리가 먼저 다른 귀족의 영지군을 공격한다면 바리스는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와 에리가 통제하고 유도한 결과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을 보호한 시란느의 호위대를 공격하는 자들을 적으로 삼는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로브의 후드는….”

“쓰지 말고. 엘프들을 드러낼 거다.”

미궁 밖에서 엘프들은 보기 힘들었다. 미궁 주변 국가에도 보이지 않고 더 먼 곳에 산다는 소문만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엘프라고 하면 미궁 안의 엘프를 가리킬 정도였다. 미궁에 들어갈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몰라도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강력한 아인종처럼 느낄 것이다.

“명령에 따릅니다.”

우든 엘프 드리아데가 각오에 찬 얼굴로 후드를 내려 머리를 드러냈다.

미궁 밖의 세계는 인간에게 장악된 만큼, 엘프의 번영을 위해서 인간과 함께하거나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대기 인원을 제외한 40명의 엘프와 일행의 주력이 뒤를 따랐다.

* * *

숲이 아닌 개방된 지역.

백작가에서 다시 숲속의 탑 주변 마을 주둔지로 향하던 시란느는 불길한 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소속은.”

“알 수 없습니다. 전부 문장이 없습니다.”

“용병대인 척도 하지 않는 건가. 하긴, 저런 진형을 보이는 데 누가 속을까.”

“어디 소속일까요? 미궁 도시 소속 병력일까요?”

시란느는 다가오는 자들의 정체를 추측했지만,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시란느를 깊게 따르는 기사들은 흔들리지 않겠지만, 병사들이 문제였다.

병사들은 세니안의 외가인 후작가는 후켄스 백작가와 동맹이기에 전멸전을 할 이유가 없고, 귀족들의 사정으로 병사들은 단순하게 포로로 잡은 후에 그쪽 병사로 받아들일 거라고 착각할 수 있다.

‘전멸시킬 생각이야.’

기습을 하지 않고 개활지에 접근하는 것 보면 확실했다.

어떤 상황이라도 기습이 화전보다 유리했다. 특히 숲 등을 이용하면 큰 피해를 먼저 주면서 전투를 이끌어 갈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시란느가 지형을 이용해 도망치는 것을 막고 확실히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쪽 시체는 버리고 저쪽 사망자 중에서 신원이 드러나는 시체는 숲속의 탑에 버려버리면 되니까.’

그리고 진상은 적당히 은폐될 것이다.

시란느의 호위대가 숲속의 탑에 무리하게 도전했고, 인원이 크게 준 호위대는 강도로 돌변한 용병대의 먹이가 되었을 거라고 소문날 것이다.

‘안토니오 후작, 결국 거친 수를 쓰는군요.’

시란느의 사망은 후켄스 백작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다. 백작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안토니오 후작의 무력까지 등에 업은 세니안과 세니안 어머니의 잠식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전투 준비.”

몇 배나 되는 병력이었지만, 곱게 죽어줄 생각 없었다.

“틈을 만들겠습니다.”

부관이 시란느의 기세를 읽고 조용히 말했다.

시란느가 살아나가면 시란느의 호위대는 다 죽을지라도 정치적인 반격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아니. 저 인원과 진형, 주변 지형을 볼 때 돌파를 완전히 차단할 생각이야. 추적을 위해 별도의 부대를 운영할걸.”

다가오는 부대보다 뒤에 있는 부대가 더 뛰어날 것이다.

“억지로 틈을 만들다간 도리어 쉽게 잡아먹힐 거야.”

시란느는 입술 끝을 올렸다.

“최소한 이빨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나. 돌파하는 척은 적 진형을 흩트리는 시도로만 할 생각이야.

하지만, 이는 제대로 싸우기 위함이야.”

이를 악물었다.

끝은 패배일 것이다. 그러나 쉽게 내줄 생각 없었다.

“승리를.”

“승리를.”

시란느는 조금이라도 지형지물을 이용하기 위해 이동하고 진형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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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게 하는군.”

안토니오 후작의 기사단 부단장 마그레는 인상을 썼다.

“그래봤자, 독 안에 든 쥐 아니겠습니까.”

“그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줄 알았지만, 저년도 꽤나 인물인가 보군.”

“외모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뭐 손끝에 굳은살이 좀 있겠지만, 대신 탄력이 있겠지요.”

부관이 입술을 핥으면서 마그레에게 은근하게 권했다.

이미 이긴 승리로 보는 그는 전리품에 눈이 돌아가는 모양새였다.

“네놈이 그래서 이런 일에 동원되는 거야.”

“크흐흐. 그건 부단장님, 아, 아니지. 대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 그렇지. 수련을 한 년이니 네놈한테 넘어가기 전까진 살아있으려나.”

“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입니다.”

“변태 새끼.”

“흐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후작가의 부기사단장과 부관이 음담패설을 나누는 도중에도 부대는 단단하게 전진했다.

입과 귀로는 음담을 나누면서도 눈은 쉬지 않았다.

전리품이 도망치면 뒤가 귀찮아지는 전투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와아­.

정식 영지전에서 열리곤 하는 전투 전 회담은 없었다.

경쟁적으로 함성을 터트리고 그대로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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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느는 달려드는 병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붉은 피가 뿌려지고 시란느에게 닿지 못한 창이 땅에 떨어졌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창의 거리를 속도로 극복했지만, 시란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진 채였다.

“제기랄.”

욕설을 내뱉었다.

강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탐욕을 담은 시선이 난전 속에서 시란느를 훑었다.

하지만, 시란느는 시선을 보내는 자를 찾지 못했다.

“일반 기사 이상이야. 소문으로 듣던 마그레인가.”

안토니오 후작가 기사단 부단장 마그레, 나쁜 소문이 끊이지 않는 남자였다.

평민의 딸은 물론 후작가를 지원하는 상인의 딸까지 죽을 때까지 범했음에도 무력과 병사들을 다루는 통솔력이 뛰어나 후작에게 중용된다고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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