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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97화 (97/139)



〈 97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97화

오크들에게 바리스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이유를 [분노의 일격]을 막아냈지만, 상처 입어 전력에서 제외되었다고 추측할 것이다.
부상이 아니라 바리스의 성장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다르긴 하지만, 전력에서 제외라는 결과는 같았다.

“방어를 무너트려라. 인간 방어 전사가 사라졌다. 사방으로 포위해라.”

오크 지휘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바리스를 오크 지휘관 역시 기억했다.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초반 전투에서 전방에서 몰아치는 오크 부대를 극소점에 모이게 하고 바리스가 막아섰었다.
한 점에 모이도록 버틴 것은 방벽과 엘프들이지만, 바리스가 접점에서 격렬한 전투를 연속해서 치러내지 못했다면 무너질 방어였다.

바리스가 없고, 방벽이 없었다. 개방된 곳에서 접전이라면 오크가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크들은 그런 방심으로 물들었다.

“후퇴. 접전 유지, 전방 경계하면서.”

진형과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전투력을 유지한 후퇴는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맹렬한 기세의 오크의 물결에 휩쓸리는 형세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저, 돼지 새끼가.”

수희가 인상을 쓰며 험한 말을 내뱉었다. 얼굴만 닮았을 뿐, 전신이 근육으로 꿈틀거리는 오크에게 돼지라는 욕은 어울리지 않지만,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오크의 지휘는 수희의 탱킹이 바리스보다 못하다는 걸 노리고 있으니까.

오크가 일행을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아니, 포위하는 진형을 갖추도록 유도했다.

‘오크 지휘관은 우리에게 성채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 오크 창병이 없다는  알겠지만.’

우리를 포위한 상태에서 우리를 격멸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 내리지 못한다.

느리고, 짧은 후퇴.
광분하며 달려드는 오크들에게 둘러싸일 수밖에 없는 후퇴. 하지만, 이동했다.

“전장이 바뀌었다. 에드샤.”
“응, 맡겨줘.”

제단 근처에서는 영역의 장악이 중요한 에드샤가 힘을 발휘하기 버거웠다.
아리나란의 고공에서 낙석 떨구기도 [분노의 일격]에 아리나란이 직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땅이 갈라지고, 벽이 생겨났다.
상체뿐만 아니라, 하체도 건실한 지하 16층의 오크들은 몸의 중심을 낮추는 것만으로 흔들림을 극복하고 다리 근육에서 나오는 힘으로 갈라지는 땅에서 거슬러 올랐다.

“좋아. 고마워. 에드샤.”

수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면 방어라면, 바리스와 차이가  나.”

사실과 다르지만, 그냥 넘어갔다. 바리스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제대로 상대해낼 뿐만 아니라, 두 방향이 뚫린 전장이라면 오크를 상대로도 압박감까지 일구어낸다.

수희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마치 잔상과 같았다.
포위되었지만, 에드샤의 지형 변경은 사방이 아닌 두 면에서만 전투가 일어나도록 강제했다.

*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은 포위가 유지되는 동안 유리하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덕분에 오크 지휘관이 후퇴를 결정할 때까지  피해를 줬다.
상황을 정리한 후에 엘프들을 배치해두었던 요지로 향했다. 뒤를 급습해서 집결했던 인근 부족 오크들의 전투력을 제거했다.

“바리스.”
“…. 네, 준영씨.”

명상을 끝낸 바리스가 눈이 부신 듯이 반개하고 나를 보았다.

“저…. 준영씨는 어떤 경험을 해오셨길래.”
“인지가 늘었구나.”

경이를 마주하는 눈빛,
나의 너머를 보고 있다. 바리스는 나의 행동과 능력을 분석해서 내린 추론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리스는 감각이 뛰어났다. 그리곤 감각으로 인지하는 단계를 어느새 따라잡곤 했다.
사도급의 격을 느낀 바리스는 사도급으로 성장할 것이다.

나는 제단 쪽을 향해 턱짓했다.
관심을 돌렸다.
바리스가 나를 직관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나조차 나를 얽매는 운명을 직관하지 못한다. 이제 막 인지를 확장한, 예리할 만큼 예민한 바리스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외부와…, 신성과 이어져 있군요.”
“그래.”

추론이 아닌 인지.
나는 바리스가 신벌과 유사한 [분노의 일격]을 막아낼 수 있음을 확신했다. 바리스는 [분노의 일격]에 이미 저항했다.
저항하는 것과 막아내는 것은 달랐다.
타인을 향한 공격을 대신 막아내는 ‘방어’는 자신을 향한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고 극복하는 ‘저항’의 상위에 있다.

“가자. 제단으로.”
“네, 준영씨. 우리…. 함께 가요.”

어느새 바리스에게 신성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신성이 직접 강림해 직시하면 몰라도, 인간과 유사인간이 끌어내는 신성의 힘은 바리스를 절망시키지 못할 것이다.

*

“사냥감 주제에.”

오크 사제가 분노를 터트렸다.
그의 옆구리는 피가 굳어져 검붉었다. 바리스에게 권능을 부리며 만든 상처. 신성에게 바친 상처이기에 치료하지 않은 것이다.

“누가 누구를 사냥한다는 거지?”

나는 오크 사제를 비웃었다. 제단을 향해 걸으며 모습을 드러낸 순간, 오크 신성 헤토르칸의 주시를 받았지만, 무시했다.
바리스의 성장을 제외해도 오크의 수를 줄인 만큼 이끌어낼 수 있는 신성량 자체가 줄었다.

“신성의 글레이브 아래에 찢겨라.”

오크 사제가 자신의 심장 아래를 찔렀다. 줄어든 신성량을 목숨을 걸어 강화했다.

“목숨을 걸려면, 처음부터 걸었어야지. 너와 달리 바리스는 제단을 마주한 순간부터 목숨을 걸었어.”

나의 말에 바리스가 미소지었다.
양손검을  잡았다.

끼야아아아-.
쇠의 비명.

[분노의 일격]이 바리스와 격돌했다.
땅이 파이고 잔해가 비산했다. [분노의 일격]은 신성의 글레이브로 내리찍는 일격.
막아내도 충격은 대지에 상처를 남길 정도였다.

“하아.”

바리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대각선 뒤로 용이 발톱으로 대지를 긁은 것처럼 크고 깊은 홈이 파였다.

“역시, 바리스인가. 비껴냈어.”

바리스는 나의 예상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항상 고민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할  있지만, 주입할 수 없는 해답.
미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만큼 커지는 양손검 탱커의 한계.
탐색자가 스킬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다고 해도, 미궁의 몬스터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욱 강력해진다.
피해야만 하는,막을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한다.

“그저 한계점을 늘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아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거다.”

비껴내기.
자신을 믿지 않고 흔들려버리면 막는 것보다 못한 기술.

어쩌면 미궁의 인간을 투영한 기술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끝에 닿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걸음 한 걸음 전진할 뿐이니까.
[분노의 일격]보다 더 강한 공격, 미궁의 심층이나 신성이 직접 가하는 공격은 비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걸음씩 이어간 걸음이 해답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격전이 시작되었다.
리젠 되어 움직이던 오크에게는 마지막 싸움이, 우리에게는 거쳐 가는 전투가 격렬하게 이어졌다.

*

오크의 시체가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제단을 덮었다.
죽음이 가득 채워졌지만, 이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크 신성은 죽음 자체를 제물로 받아들이는 신성이 아니었다.
사냥감의 도살과 동족을 가리지 않는 포식도 살아남은 오크에게 내려질 영광이지, 차갑게 식어가는 오크 시체에게 부여되지 않는다.

바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손검을 만지작거렸다.
경계를 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 내리지 못했다.

“다른 신성이 느껴지지?”
“아, 이 느낌. 신성이군요.”
“그래, 미궁층 전체 승패를 좌우하는 전투가 끝난 자리는 여러 생각이 맴돌지. 이때만큼은 신성들이 관찰하기 쉬운 듯해.”

그리고 속삭이기도 한다.
어버스나이트 신성이 공양을 원한다고 속삭여왔다. 이제는 확연하게 힘이 줄어든 카이바린 신성 역시 어버스나이트 신성보다는 친절한 느낌으로 제단을 공양하라고 유혹했다.

“편하게 인지해. 손을 잡든 적대하든 내가 책임질 테니까.”
“네. 준영씨.”

바리스가 미소지으며, 한결 편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나는 오크의 시체를 밟으며 걸었다.
오크 신성 헤토르칸의 제단.
제압된 신성의 제단은 다른 신성에게 먹음직한 먹이다. 신성은 다른 신성의 영광을 잡아먹음으로써 힘을 키울 수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내면서 유혹하는 카이바린 신성의 속삭임이 이해되지 않는다.

‘카이바린 신성이 절박한 시점이긴 하지.’

이미 미궁 밖의 교단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내게 여성의 목소리로 의지를 전할 정도로.’

예전 회차 때, 카이바린 신성은 성을 들어낸 적 없었다. 남자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무성으로 존재를 비췄다.
그런데, 카이바린 신성이 소멸하기 전에 내가 사도급에 도달하고, 컨트롤러 클래스로 여러 여성을 종속시키는 것을 보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여성으로 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넘어갈 리 없지만.’

카이바린은 결코 받들어 모실 신성이 아니다.

나는 오크 사제가 섰던 자리에 섰다.
 손을 내밀어 제단을 잡았다.

“신성의 잔재를 내게 종속시킨다.”

내게 [강제 종속화]와 [종속체 배치] 스킬이 생긴 이후로 많은 경험을 했지만, 다음 스킬이 나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강제 종속화와 종속체 배치가 강력한 만큼, 최종 스킬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남았지.’

경험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상위의 격과 접하는 경험이 부족했을 가능성.
그렇기에 오크 신성의 제단은 좋은 제물이었다.
종속화는 어떤 면에서 신성이 사제와 사도들에게 공양을 받는 방식과 유사했다. 외부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 바꿨다.

오크 신성 헤토르칸의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새로운 경험과 충분한 경험치는 새로운 스킬을 등장시켰다.
[신성 영역 창조]
[리제너레이션]

사도의 격보다 신성의 격에 가까운 스킬.
리제너레이션은 신성 영역 안에서 죽은 종속된 존재를 리젠시키는 스킬.

‘[신성 영역 창조]는 신성이 가진 힘과 비슷하지만….’

신성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신성이 머무는 궁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성 영역으로 창조된 신성이 머무는 궁전, 방문자에게는 궁전이겠지만.’

침입자에게는 미궁이라고 불려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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