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94화
헤스티가 나의 신호에 지팡이를 흔들었다.
불타오르던 파이어 볼이 부드럽게 사그러들었다.
헤스티의 성장이 느껴졌다. 불속성은 내뱉는 것보다 서서히 거두는 것이 더 어려웠다.
머메이드 혼혈 네리미아가 몸을 흠칫 움츠리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헤스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헤스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네리미아의 반응.
조금 전까지 협박의 수단으로 띄웠던 파이어 볼을 없애니, 그저 머메이드가 불편할까 봐 없애준 것처럼 반응해왔다.
헤스티는 이런 경우를 경험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게 대화를 맡겼다.
“우리는 탐색자야. 여기는 미궁이고.”
네리미아가 이해가 안 가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마법 같은 거에 당했어. 이곳은 너에게 익숙한 곳일 테지만 기억이 완전하지 않을 거다. 붙잡힌 기억이 나나?”
“으…. 나지 않아요.”
“여기 오기 전은?”
“흐릿하게….”
“역시 그렇군.”
네리미아는 내게 종속되면서 미궁의 망령화에서 벗어났다.
“헤스티.”
“네, 준영씨.”
“네리미아를 보살펴줘.”
“네, 알겠어요.”
일행을 네리미아가 살폈다.
무의식중에 어울리는 상성을 찾는 거지만, 그나마 그녀에게 편할 우든 엘프는 파티에서 타인을 보호할 만큼 기세를 퍼트리지 못했다.
특히, 에드샤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헤스티가 슬쩍 움직여 에드샤의 시선에서 네리미아를 가렸다.
“하아.”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는 네리미아를 보고 헤스티가 입을 열었다.
“네리미아는 입으로 숨을 쉬는군요.”
“네, 당연히? 아, 물속에서는 피부로 호흡을 해요.”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네리미아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강자의 존재가 반가운지, 성의를 가지고 대답했다.
내게 종속된 것이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네리미아는 머메이드와 접한 적 없었다.
“저는 머메이드를 몰라요. 인간들과 지냈어요. 으으, 다리가 없다면서요?”
다리가 있는 걸 정상으로 여기고 그녀가 인간들을 통해 전해 들은 머메이드를 비정상으로 자신과 다른 존재라고 여겼다.
“전 샘의 요정이라고 받들여졌어요. 아….”
과거가 떠올랐는지 머리를 살짝 올리며 으스대려다가 바로 현실을 깨달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지상에서는 엘프들조차도 네리미아보다 강했다.
그래도, 중요한 사항, 머메이드를 동경한다던가, 머메이드 편이 되고 싶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을 눈치는 있었다.
‘머메이드를 동경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이 아니야.’
이는 네리미아의 성장환경에 기인했다.
‘의외로 무난한 환경에서 자랐어.’
누가 인간의 정자가 수정된 머메이드의 알을 샘에다가 놓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노예를 사냥하는 매매범들이 알이 마르지 말라고 샘에 넣어두었다가 다른 이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시작은 어떻든 간에 네리미아는 잘 자랐고 샘의 주인이 되었다.
세금과수탈을 피해 오지로 들어온 농민과 접하면서 인간과 어울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무뢰한도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내가 구하기 힘든 과일이나 불로 구운 고기를 줬어요.”
“고기를 익혀서 먹어?”
“네, 그들이 특별한 날이라고 가지고 왔던 돼지고기가 참 맛있었지요.”
헤스티가 미소지었다. 이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고기지만, 한때는 헤스티도 돼지고기 노래를 불렀다.
‘인간과 혼혈인 덕분에 샘에서도 살 수 있었어.’
샘 정도의 크기로는 머메이드 하나의 식사량을 감당할 수 없다.
“저는 그들에게 식수를 정화해주거나, 홍수가 났을 때 물길을 진정시키곤 했지요.”
샘의 요정이라고 받들여지며, 공물을 바칠 만했다.
세금을 피해온 농민이 새롭게 농사짓는 땅에 저수시설이 제대로 있을 리 없었다.
네리미아가 없었다면 홍수에 농작물을 모두 잃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헤스티와 대화를 나누는 네리미아를 지켜보며 저택과 미궁 5층의 엘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내 엘프들이 수속성을 강화하는 로브와 장비를 찾아 가지고 왔다.
“우와 이거 제가 써도 되는 거예요?”
샘을 벗어나마른 지역에서도 지내려면 장비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행에 수속성을 추구하는 이가 없기에 수속성 장비는 남아돌았다. 페로가 아이스 스피어 등으로 연관이 있긴 하지만, 순수한 수속성보다는 융화력을 중시한 장비만 쓸 뿐이었다.
“저도 여행을 떠날 수 있겠군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헤스티가 파이어 볼을 일으켰던 것도 잊고 헤스티의 품에 파고들어 꼭 껴안겼다.
내가 헤스티에게 네리미아를 보살피라고 한만큼, 헤스티를 통해서 장비를 전달해 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헤스티에게 조화로운 느낌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반응이기도 했다.
*
일행은 각자 정비와 경계, 혹은 휴식을 하면서 둘을 지켜보았다.
에드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조심스럽게 에리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에리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어 위로하듯이 꼭 껴안았다.
머메이드 혼혈 네리미아의 어린 시절과 에리의 어린 시절의 차이.
세상의 가혹함 차이가 아니었다.
네리미아는 혼혈인데도 능력이 개화했고 능력이 삶을 도왔다. 하지만, 에리는 역으로 특성 때문에 괴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에리가 마치 어른처럼 에드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
“요새로 복귀한다.”
헤스티가 네리미아의 행장을 도왔다. 배낭을 하나 빌려줬지만, 담을 물건은 거의 없었다.
농민들이 네리미아에게 사당과 같은 개념으로 지어줬던 집과집 안의 물건들은 이미 오크들에게 부서지고 사라졌다.
복귀 신호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바리스와 헤스티, 수희는 네리미아가 이번 탐색의 목표였음을 알았다. 다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네리미아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수속성이 일행의 약점인 만큼, 미세하게나마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보완의 핵심은 네리미아가 아니라, 헤스티야.’
극단적인 마법속성을 선택하지 않았고, 배움만 베풀 뿐 한쪽 길로 강제하지 않으니 헤스티는 조화로운 경향을 추구했다.
파이어 볼이 눈에 띄긴 하지만, 극초반부터 바리스를 보조하기 위해 썼던 [사이킥 쇼크]는 미궁 16층의 오크를 상대하는데 보조할 수 있을 정도로 파워와 캐스팅 속도, 정확도가 올라갔다.
거기에 중력 마법은 처음부터 페로와 함께 연구하면서, 응용이 가능한 말랑말랑한 체계로 자리 잡았다.
15층, 인어의눈물 층에서 이미 중력 마법을 화염 마법의 보조로 사용해 열기의 방향성을 통제해내 보였다.
‘거기에 네리미아의 수속성 친화력이 더해지면….’
일행은 요새를 향해 걸었다.
도중에 네리미아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뭔가가 나올 때마다 헤스티에게 조잘조잘 물었다.
평생을 작은 샘에서만 지냈으니 호기심이 들만하기도 했지만, 생존 본능이기도 했다.
무의식중에 헤스티가 자신을 살려줄 수 있는 강자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
우든 엘프들은 당연히, 다크 엘프들은 긍정적으로 네리미아를 반겼다.
나무는 물 없이 자랄 수 없고, 채광은 수맥의 탐지와 회피가 중요했다.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면 모르지만, 통제되는 이를 배척할 이유가 없었다.
함께 나누는 회식에서, 미궁 밖 저택에 강으로부터 수로를 끌어오면 될 것 같다는 이야기 등이 나왔다.
*
밤이 왔다.
“하.”
나는 엘프들이 조성해놓은 숙소를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의 숙소는 중요한 요지이기에 요새에 중앙에 있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뭔가 곱상했다. 일회용으로 소모되어도 되는 천이 아니라 엘프들이 귀하게 여겨 배낭 속에 넣어왔을 만한 천이 바닥에 깔리고, 옆면에 장식되었다.
“천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소리가 전파되기 쉬운 구조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옆에 있던 바리스도 민망한지 시선을 피했다.
신체 수준이 일정 이상 되면 잠자리에 영향받지 않았다. 그래서, 보온 등의 이유로 닫힌 공간보다 열린 공간을 선호했다.
기습을 방지하기 위해, 적의 접근을 소리 등으로 감지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엘프들의 성관념이 묘하게 박혀버렸어.”
내가 그녀들의 처음이다 보니, 엘프들에게는 나와 나누는 성이 상식이 되어버렸다.
나의 아래에서 흐느끼는 여성의 울음을 밖에서 훔쳐 듣는 것이 당연해져 버렸다.
“어쩔 수 없지요. 개인 공간이 없으니까요.”
바리스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납득해버렸다.
그러면서 아래에 깔린 천을 만지작거렸다.
엘프들이 준비한 천은 부드러웠다. 움직일 때마다 고운 모래가 흐르는 것 같은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천이네요.”
“엘프들은 소리만으로 자세를 추리해낼 거야.”
바리스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입술을 가까이했다. 숨기듯 작아지는 바리스의 호흡.
바리스는 시작할 때는 언제나 많이 부끄러워했다.
그런 그녀가 나의 입술을 입술에 허용하고, 살짝 누르는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파고드는 혀에 뜨거울세라 혀를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었다.
바리스가 혀를 빨아들였다. 바리스의 처음 같은 설렘은 뇌리에 새겨넣었던 정욕을 건드리니, 기대로 변해 달려들었다.
긴 입맞춤, 길어질수록 짙어지는 딥키스.
“하아-.”
입술을 떼니 내 귓가에만 들릴 뜨거운 숨을 흘려냈다. 아직 밖에서 귀 기울이고 있을 엘프들이 머릿속에 있는지 속삭이듯 숨을 쉬어냈다.
어느새 바리스의 옷을 벗긴 나는 손을 움직여 바리스의 엉덩이를 꽉 잡았다.
“아흑.”
무례한 손길에도 가꾸어진 정욕은 성감으로 받아들였다. 어느새 내 목에 팔을 감고 몸을 비비어왔다.
“어서요. 흐으-.”
“벌써?”
“아이, 심술부리지 말고요.”
내게 부리는 애교가 부끄러운지, 귓가에 입을 대고 소근거렸다.
“하긴,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지.”
“네, 힘들었어요. 흐읏.”
탄력을 머금은 바리스를 돌아 세웠다.
허리를 잡고 그대로 당겼다.
“아악-. 하아, 하앗 하 하으으.”
허리를 살짝 굽힌 채 나에게 박히는 바리스가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빠듯하면서도 촉촉하게 맞이하며 매달리는 그녀의 속처럼 뜨거운 신음으로 이어졌다.
일부러 엘프들이 준비한 천에 눕히지 않고 서서 성교를 이어갔다.
바리스에게 집중하기 위해 엘프들과의 종속체 연결을 둔탁하게 했지만, 안달내는 듯한 모습이 그대로 느껴졌다.
바리스의 머리를 당겼다. 바리스가 아래로는 남성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로, 상체를 돌려 나의 입술을 찾았다.
열기가 짙어진 바리스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입술을 말아 내게 신호를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리스의 입술을 나의 입으로 덮었다.
신음 하나 흘러나오지 않도록 막았다. 점점 가빠지는 숨이 바리스를 열락으로 밀어 넣었다.
안타까운 호흡의 부족이, 무호흡으로 수십 번 검을 휘두르는 몰입의 순간을 연상시켰다.
“하아아- 하흐으으.”
바리스가 오르고 오른 순간, 호흡을 개방했다.
정숙하고 당당한 바리스가 토해낼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환희에 찬 울음이 요새에 가득 찼다.
바리스는 이미 머릿속에서 다른 이는 지워버리고 나와 자신만을 생각하며 흐느꼈다.
“하흐 아니, 저 벌써 하으-.그만해도 하읏 하윽.”
바리스가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쾌감에 올랐기에 만족을 나타내는 바리스를 더욱 몰아붙였다.
오늘 밤은 바리스와 나만의 밤이니까, 쉽게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