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87화
미궁 지하 13층과 14층을 넘었다.
전력과 전력의 격돌.
이때까지 나왔던 몬스터보다 더 빠르고 강한 몬스터가 나왔지만, 속임수나 속임수 패턴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트롤이 나와도 정정당당하게 트롤만 나왔다. 가짜 트롤을 섞어 보내 탐색자의 마법을 소모시키는 술책을 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미궁은 미궁, 공격 하나하나가 매섭고 방심은 죽음으로 직결되는 곳이다. 하지만 일행은 건실함으로 묵묵히 버텨냈다.
*
전투를 끝내고 멍하니 있는 피리레를 일행은 호위했다.
쾌감이 깃든 다크 엘프 피리레.
성장을 이루어 순간은, 있는지도 몰랐던 신체 기관을 당연하다는 듯이 쓸 수 있게 되는 감각이 몰아친다.
어렵고 막막하던 것이 쌓이고 쌓인 노력과 경험을 통해 한순간에 당연해지고 쉬워진다.
‘피리레가 드리아데보다 성장이 빨라. 믿음 덕분인가.’
미궁 밖 저택에서 나에게 안겼던 다크 엘프 피리레는 나를 맹목적으로 믿었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새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
훈련 목적이 컸던 11층과 12층 탐색과 달리 13층과 14층은 우든 엘프나 다크 엘프 각 개체의 능력 차이도 고려해서 소환해야 했다.
나를 믿어 흔들리지 않고 시킨 그대로 해내는 피리레를 우선하여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
‘나의 말이라면 아리나란의 피막도 꺼리지 않으니까.’
아리나란은 불안정했다.
리버밸런스에게 이용되면서 열린 상처를 새 살과 피부로 재생하지 못했다. 대신 피를 뭉치고 피막을 이루어 현재 몸을 유지했다.
나나 바리스의 맨몸에 몸을 딱 붙이고 있기 좋아하는 것도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몸을 붙이고 있는 면만큼은 타인의 몸일지라도 안정적으로 느껴지니까.
‘불안정하기에 영역을 확보해낼 수 있지.’
인간은, 아니 생명체는 각자의 영역을 가졌다. 이는 무력이나 마력과 전혀 관련 없는 갓 태어난 생명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생명체의 몸은 그대로 자신의 영역이었다.
심층의 악마조차도 어린아이의 몸속에 자신의 영역을 키우려면, 힘과 의지와 매개체가 있어야 했다.
그만큼 생명체의 몸은 영역을 나누는 벽이었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도 적용되었다. 자신의 몸 밖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어려웠다.
‘이미 더 강한 자가 장악한 영역 내라면, 불가능에 가깝지.’
[종속물 배치]는 나에게 종속된 곳에 배치할 수 있다.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전장으로 다시 불러들일 때는 내가 먼저 나의 주변을 영역으로 확보하고 종속한 다음 엘프들을 ‘종속화한 영역’에 불러들였다.
‘아리나란은 외부에 자신의 영역을 투사하는 데 특화되어있다.’
자신의 주변으로 영역을 투사하지 못하면 존재가 무너지니까.
*
“아리나란, 정면의 떠돌이 오크를 상대해.”
“응, 주인님. 아리시 가자.”
아리나란이 인형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대답했다. 아리나란 역시 나에게 종속되었기에 미궁 밖 저택에서 머물 수 있었고, 엘프들이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끼어들기도 했다.
다만, 끼어들어도놀이에 가까웠다. 엘프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인 주인님을 따라 하기도 했다.
바리스와 수희가 다른 떠돌이 오크를 견제하는 가운데, 아리나란이 나섰다. 아리나란과 피로 연결된 인형, 아리시가 아리나란을 따랐다.
아리나란의 접근에 떠돌이 오크가 반응했다.
두려워하지 않고 역으로 파고들어왔다. 맞부딪히는 접점에서 도끼를 찍기 위해 도끼를 끌어당기고 돌진해왔다.
“하나둘 핫.”
엘프들이 펼치는 집단 창술이 아리나란에게 큰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하긴, 다수가 동시에 펼치는 동작은 위력과는 별개로 마음을 자극하는 감성이 있다.
옆으로 펼쳐진 피막, 피막에서 고슴도치처럼 뾰쪽한 가시 형태로 피의 창이 내질러졌다.
엘프들의 흉내,
떠돌이 오크는 경시하지 못하고 피의 창을 향해 도끼를 내질렀다.
아리나란의 전투는 변덕이 심한 아이 같았다. 한순간에 엘프들을 흉내 내던 것을 잊었다.찔러 들어갔던 피의 창이 휘어져 충돌을 피하고, 떠돌이 오크의 몸을 향해 파고들었다.
“잘했어.”
“주인님 덕분입니다.”
아리나란이 또다시 엘프들의 말투를 따라 했다.
바리스가 미소지었다. 주위를 흉내 내는 것은 성장의 시작이었다. 성장이 다다르는 곳이 원래의 모습과 다를지라도 변화가 반가웠다.
“다시, 아리나란에게 한 마리.”
“네, 준영씨.”
“알았어요.”
바리스와 수희가 가볍게 대답하고 전투를 조율했다.
여유로운 움직임. 더 큰 먹이를 먹기 위한 투자임을 아는 수희는 바리스 못지않게, 아리나란이 전투의 주축이 되어 경험치를 많이 먹을 수 있도록 보조했다.
본격적으로 아리나란에게 경험치를 몰아주기시작했다.
아리나란은 영역 확보에 특화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제단위에서 와이번까지 섞여졌다. 공중을 장악하는 능력은 미궁 지하 15층, ‘인어의 눈물’에서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
*
가득한 물 냄새.
일행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주변을 훑어 경계를 끝냈다.
15층 첫 진입이기에 잔뜩 긴장한 드리아데와 피리레, 긴장과는 별도로 불쾌감을 보이는 에드샤와 에리.
“물이 너무 많아.”
칭얼거림이 섞인 에드샤의 말에 나는 다가가 꼭 껴안았다. 에드샤 옆에서 슬쩍 나의 눈빛을 살피는 에리의 머리 또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가지 점검하고 넘어가자.”
에드샤와에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대지 속성을 가졌다. 대지 마법을 쉽게 펼칠 수 있지만, 약점 역시 이어졌다. 에리는 [종속체 부유력 부여]로 공중으로 띄우면 불안해했다.
변화없는 지형을 바꾸는 것은 물이었다. 대지 속성은 수속성에 취약했다.
이는 에드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지가 수용할 수 있는 용량 내의 지하 수맥이나 작은 시냇물 정도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미궁 지하 15층, ‘인어의 눈물’ 미궁층은 대지 위에 고인 물웅덩이가 아니었다. 미궁의 불가사의에 의해 바다 위에 섬이 떠 있는 구조였다.
에드샤의 대지로 기파를 투사하는 권능도 물에 막혀 차단되었다.
악영향은 다크 엘프 피리레가 가장 적게 받고, 다음은 에리, 에드샤가 가장 크게 받았다.
다크 엘프는 금속과 대지에 친숙하지만, 일체화가 아니라, 이용하는 형식의 접근이라 에드샤나 에리보다 확연하게 영향을 적게 받았다.
“우선 지하 5층 거점으로 보낼 거야. 10분 뒤에 다시 이곳으로 소환하겠어.”
에드샤와 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속체 배치 에드샤][종속체 배치 에리]
둘을 미궁 지하 5층으로 보냈다.
*
“아리나란, 품을 만들어줘.”
“응, 내 품으로 돌아와. 아가들.”
아리나란이 피막을 움직였다. 내가 주변을 종속화한 후, 종속체 배치를 쓰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미 내게 종속된 아리나란이 두 팔로 자신을 안았다.
그리고는 다가오는 아이를 반겨 안으려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렸다.
두 팔 사이에 피가 머물렀다. 아리나란의 권능.
‘아리나란은 우리 일행의 별명을 좋아해.’
이번 회차 초반에 다른 모험가를 약탈하면서 피를 흘리게 하고 살려 보냈었다.
그 때문에 얻은 악명, ‘흐르는 핏자국’을 아리나란은 마음에 들어 했다.
일반적인 인간은 물론 몬스터를 포함해도 아리나란의 몸과 권능은 특이했다.
그런 그녀가 일행의 별명을 통해 안정감을 찾는다면, 별명에서 풍기는 삼류 악당과 같은 느낌 정도야 무시할 수 있다.
[종속체 배치 에리]
마치 핏속에서 마녀가 태어나는 것 같았다.
아리나란이 품은 핏덩어리 속에서 에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에리에게 핏방울 하나 묻지 않았다.
아리나란의 의지 아래에 피는 이어지고 통제되었다.
에리에 이어 에드샤까지 미궁 지하 15층으로 불러들였다.
“아리나란 고마워. 수고했어.”
“히잇.”
아리나란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쓰다듬듯이 에리와 에드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에리와 에드샤는 아리나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바바리안 여성은 물론, 키벨레 종족도 모성을 중요시하는 종족이었다.
다크 엘프 피리레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
“수희씨, 긴장했어요?”
“어…. 약간?”
수희는 주변을 다시 한번 훑고는 헤스티의 물음에 대답했다.
“15층은 의미가 남다르니까. 14층을 무난히 정복하는 파티도 그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려 해.”
헤스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심층을 노리는 파티에 대한 정보는 수희가 헤스티보다 많았다. 비록 정확성은 떨어지더라도, 나와 합류하기 전에 떠도는 소문밖에 접하지 못한 헤스티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아. 정보는 귀중하니까. 얻어도 15층에 도전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가 많다는 것 정도. 하지만, 와보니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잡이 스킬이 높아도 이 ‘인어의 눈물’ 미궁층은 피해갈 수 없어. 그리고 이곳은 준비가 되지 않으면 공략이 거의 불가능해.”
“이 호수 때문인가요?”
“그렇지. 떠돌이 오크를 쉽게 상대하는 전사도 무릎 이상 물에 잠긴 채로 머메이드를 상대할 수 없어.”
미궁 밖에서는 머메이드의 악명이 알려지지 않았다.
바다는 심연을 담고 있는 만큼, 괴이하고 강력한 몬스터가 많았다. 그래서, 연안 조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연안으로 작은 배가 항해하지 않으니 머메이드에게 당할 일도 없었다.
몬스터를 상대할 준비를 한 대형 선박은 화포를 장비했고, 머메이드가 머무는 얕은 바다에서 쉽게 당하지 않았다.
비싼 비용과 낮은 명중률, 오폭의 위험이 커서 전쟁에서도 잘 사용되지 않는 화포라도 엄청난 광음을 낼 수 있고, 머메이드는 광음에 약했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도망칠 계단을 찾는 것조차 버거운 층이야.”
일행은 나의 시선에 따라 페로를 보았다.
페로는 모이는 시선에 마치 귀족처럼 허리를 숙여 예와 자신의 권능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페로의 탈출 권능은 공략을 포기할 때 빛을 발하고, 탈출 권능이 있다는 자체가 공략을 향한 용기를 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가지 수단이 더 있지.”
아리나란이 기지개를 켰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피막을 펼쳤다. 아리나란은 하늘을 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