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76화
나는 차가운 눈으로 드리아데를 보았다.
드리아데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들과 같은 귀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속임수에 가까운 제안을 하고 이용하는 것이다.
계약조차 그러했다.
노예 까짓거 되어줄 수 있다고 했지만, 자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죽지 않고 노예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엘프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속임수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은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긋는 선이지. 선을 그은 자는 선을 넘기 전에는 선을 넘지 않았다고 변명하지.’
하지만, 이성으로 인지하는 선과 마음이 떠올리는 선은 다른 법이다.
나의 목적은 드리아데를 노예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이라도 노예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순수를 더럽히는 것이다.
더럽혀진 순수는 스스로가 그릇됨을 알기 때문에, 변명에 변명을 더하더라도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았다.
‘순수한 자의 의지는 꺾기 힘들지.’
하지만, 자신에게 변명하는 꽃은 꺾기 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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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읏-”
수희가 기지개를 켰다. 드러난 나신이 매력을 흩날렸다.
속 시원한 얼굴. 다른 미궁층에서 내가 상세한 지시를 내리곤 했지만, 그때는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미궁층에서는 제약만 했다.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그럼, 시작해요.”
요염하게 웃으며 앞장서서 나아갔다. 내가 제약을 풀었기에 마음껏 날뛸 수 있다는 기대에 성큼성큼 움직였다.
원래부터 약한 적 다수를 쉽게 상대하는 수희였다. 이는 다크 엘프들의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수희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적의 사격을 인지했다.
동시에 땅에서 돌조각으로 뭉쳐진 기둥이 솟아올랐다.
수희를 향해 날아가던 화살이 돌기둥에 박혔다. 돌조각이 떨어져나가 흩날렸지만, 애초에 화살을 막기 위해 세운 기둥이었다.
“에드샤, 고마워.”
춤추듯 손짓하는 수희에 에드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든 엘프보다는 화살이 약하군요.”
에드샤가 어스 마법을 이용해 화살을 모두 막아내곤 말했다.
드리아데는 우든 엘프가 아닌, 다크 엘프를 비하하는 말임에도 웃을 수 없었다.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와 돌기둥이 생겨나는 속도는 비교할 수 없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럼에도 생겨난 돌기둥에 박혔다는 것은 사격을 미리 감지했음을 뜻했다.
마법사로 보이지만, 전사의 감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기량이 탁월하다는 의미였다.
수희가 파고들었다. 화살을 날린 다크 엘프의 숨을 끊었다.
물 흐르듯이 이어 움직였다. 다른 위치의 다크 엘프가 사격이 이어지기도 전에 달려들었다.
헤스티가 손을 내렸다.
그녀가 쏘아낸 마나 스트라이크가 파고드는 수희를 피해 거리를 벌리던 다크 엘프를 쓰러트렸다.
“역시, 흩어지면서 뒤로 빠지는군요.”
다크 엘프들은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평상시부터 훈련이 된 것이지. 추적당한 일부는 다른 곳으로 우리를 유도하고 나머지는 후방에 재집결하려는 거야.”
“그럼 우리도 흩어져서 추적해요? 나누어도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드리아데가 입술을 깨물었다.
평상시에 동족을 속이지 않는 생활을 하는 만큼,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 병력의 능력은 비슷했다. 다크 엘프가 당하듯이 우든 엘프도 우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직선으로 전진한다. 달라붙는 날파리는 에드샤가 막아줘.”
“네, 충분해요.”
흩어진 다크 엘프가 후방에서 재집결하지 않고 우회해서 일행의 옆을 노린다고 해도 문제없다.
교단의 사제급 다크 엘프가 아닌 이상 에드샤가 세우는 돌기둥에 모두 막힐 것이다. 원거리가 아니라 접근전을 펼친다고 해도 에드샤가 막아낼 수 있다.
에드샤는 원래 가지고 있던 마전사의 능력을 잃지 않았다. 마법 능력이 더해졌을 뿐이다.
*
비틀린 대지, 환경이 바뀌었다.
풀이 확연하게 줄었다.
세월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에 의한 풍화도 비와 비가 고여 흘러내린 물결에 의한 마모도 없는 거친 암석들.
“흠.”
에드샤가 침음을 흘렸다.
고정되어 있지만, 위태로워 보이는 돌조각과 바위들, 자연스럽지 않았다. 돌조각과 바위를 불규칙하게 쌓아 올린 모습과 쌓아 올린 무더기를 옆으로 쳐 무너트린 모습이 뒤섞였다.
앞서서 나아가던 수희의 걸음도 느려졌다.
“에리, 에드샤 역할을 맡아줘. 에드샤는 탐색 우선으로.”
내가 지시를 내리자 수희도 그것에 맞게 수희가 태세를 전환했다.
흩어진 적을 빠르게 이동하면서 처리하는 태세에서 일행과 함께 강자를 대비하는 태세로 우리와 거리를 좁혔다.
에드샤가 다시 탐색에집중했다. 성장한 에드샤의 탐색은 탐색뿐만 아니라, 탐색을 위해 퍼트린 파장을 공격을 위한 영역 장악으로 전환할 수 있다.
에리 또한, 원거리 공격이든 접근전이든 우회 기습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정말, 여기까지 왔군요.”
지친 표정으로 넋두리하는 드리아데의 시선이 암석지대 너머 성벽에 닿았다.
*
적 병력의 이동이 느껴졌다.
일행과 접전을 치르고 일부가 당하는 동안, 도망쳤던 다크 엘프도 재정비하고 성 위에 섰다.
일행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성을 살폈다. 화살이 닿는 거리지만, 먼 거리에서 쏘아낸 화살은 쉽게 쳐낼 수 있기에 관찰이 쉬운 거리에서 성과 마주했다.
“저들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오히려 수비를 계속 보강하고 있어.”
궁수를 배치하고, 성벽 위로 올라왔을 때의 접근전까지 대비했다. 헤스티와 페로의 정체를 보인 만큼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마법 저항 방패까지 보였다.
“저 안으로 쳐들어갈 거야? 여기서 대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전공이라고 생각해. 음···. 내가 우든 엘프의 세공품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할 테니까.”
“훗.”
나는 비웃었다. 드리아데의 제안을 거절했다.
엘프의 세공품을 제공하겠다는 말은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드리아데는 나의 비웃음에도 말을 이었다.
“장애물과 높이를 장악한 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해. 성은 그 환경의 정점, 거기에 방어 준비가 된 성은 우든 엘프도 뚫을 수 없어.”
드리아데가 우든 엘프가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며 변명을 이었다.
“성 앞은 개활지야, 장애물이 없지. 하지만, 성 위는 사격자를 보호하는 엄폐물이 완비되어있어. 우든 엘프가 가진 사격술의 이득을 상쇄해버려.
너희 마법사의 공격 역시 마찬가지, 마법 저항 방패로 사수를 보호할 거야.”
헤스티가 드리아데의 말을 듣고 다크 엘프들의 마법 방패를 보았다. 승부욕이 일어나는지 입술 끝을 올리고 지팡이를 살짝 세웠지만,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성벽 역시 일반 성벽이 아니야, 금속과 대장장이의 다크 엘프지만, 직접 광석을 캐는 만큼 어스 마법에도 조예가 있어. 성벽 강화뿐만 아니라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마법이 걸려있어.”
바리스가 에드샤를 바라보자, 에드샤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드리아데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렸다.
“최소한 어스 계열 마법사로 성벽에 걸린 마법을 해제해야 해. 준비되고 누적된 마법인 만큼 오래 걸릴 테지만.”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한 마법을 분쇄하려면, 그 배가 되는 실력으로 배가 되는 마력을 부어야 했다.
“본적이 없었을 텐데 잘 아는군.”
“지식 전승을 받았으니까. 또 접전 지역 요새는 직접 부딪혀봤어.”
하지만, 나는 빈틈을 보았다.
“투석기에 대한 대비가 없군.”
“인간을 상대하는 성벽이 아니니까. 우든 엘프는 돌을 날리지 않아.”
“그 덕분에 쉽게 되었어.”
드리아데가 말을 잇지 못했다.
“돌을 날릴 수 있어?”
“비슷하지.”
에드샤가 미소지었다. 준비되었다는 듯이 에리와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바리스가 보호 태세를 취했고, 수희는 드리아데의 돌발행동을 경계했다.
“성벽 안쪽 내성에 강자가 있어요. 어스 계열의 강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기파로 나의 탐색을 쳐낼 만큼 대지에도 조예가 있는 자예요.”
“우리가 성을 넘을 때 습격할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내성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에드샤의 알림에 수희와 바리스는 다른 추측을 했다. 수희는 싸우는 자의 추측을, 바리스는 서브 리더인 만큼, 조금 더 확장된 사고를 했다.
“결국, 적 병력 배치는 두 군데, 성벽과 내성. 그 사이를 오가는 이들은 전투 병력이 아니니 굳이 건드릴 필요 없을 테고.”
바리스가 미소지었다.
엘프는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가졌다. 내가 드리아데에게 약탈을 말했지만, 일반인처럼 보이는 개체를 학살하는 것을 좋아할 리 없었다.
물론 전투를 지원하는 일반인 개체는 또 달랐다.
비정한 말이지만, 반항할 여력이 있는 자는 전투원을 지원하는 곳에 달라붙어야 죽일 때 공격자의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반대로, 여력이 없는 자는 성벽 안쪽, 내성 바깥쪽 각자의 집에 숨어주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으니 바리스의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나는 에리와 에드샤를 품속에 안았다. 에드샤가 준비한 토대에 에리와 함께 공감했다.
힘의 전개에 호응하며 컨트롤러 스킬을 운용했다.
[골렘]
일행의 뒤편 대지가 요동쳤다.
돌조각이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모여들고 응축되었다.
돌조각 덩어리가 크기를 가졌다. 꿈틀거리는 대지가 돌조각을 토해내고 토해낸 자리를 또 다른 돌이 솟구치고 뭉쳐졌다.
순식간에 집의 크기를 넘었다. 성벽의 크기를 넘고, 내성의 크기와 비슷해졌다.
“영역을 쉽게 내어준 결과지.”
다크 엘프의 무력 구조를 추측했다.
공격 역할을 맡은 무리와 방어 역할을 맡은 무리.
공격을 맡은 무리는 최전방을 넘어 어버스나이트 가랑트런트와 우든 엘프를 공격 중이고, 방어를 맡은 무리는 내성 안을 자신의 영역으로 한 채 웅크리고 있다.
강자와 병력을 둘로 나눈 만큼, 성 내부로 집결해 방어를 견고히 했다.
하지만, 다크 엘프는 나의 역량을 오판했다.
강자의 영역이 되지 못한 성벽은 사제급 몇몇이 준비하고 있더라도 부피를 가진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에리와 에드샤, 그리고 나의 힘이 거인을 일으켰다. 내성보다 큰 골렘이 성벽을 내려다보았다.
“투석기로 돌을 던지지 못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종속물 배치]
사도급인 리버밸런스 신도를 잡고 얻은스킬. 내가 장악한 영역 내에 종속물을 배치시킬 수 있는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스킬.
이를 응용하면 이런 것도 가능했다.
골렘의 몸은 내게 영역이었다. 골렘의 몸 주변 역시 종속해냈다.
나는 골렘의 몸을 구성하는 돌조각과 바위를 순차적으로 대각선 앞쪽에 배치했다.
에드샤와 에리만으로는 이끌 수 없는 방식.
둘이 만들 수 있는 어스 슬라임은 대지와 이어져야 했다.골렘 형태일 때는 나의 [종속물 부유]가 없으면 골렘 팔을 공중에 휘두르는 것도 어려웠다.
골렘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땅을 박차 뛰어오른 것이 아니지만, 뛰어오른 것과 똑같은 높이를 획득했다.
떠오른 것은 추락한다.
하늘과 땅이 울렸다.
성벽이 사라졌다. 내려올 때 성벽의 라인에 따라 골렘의 팔을 내리찍었기에 먼 곳의 성벽도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끝없이 올라가는 경험치가 학살을 증명했다.
드리아데가 경악을 넘어 눈물을 터트렸다. 무서운 줄 모르고 악마와 계약한 소녀처럼 온몸을 떨었다.
수희가 드리아데를 경계하다가 말고 부축했다. 그럼에도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