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71화
나의 아래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흔들던 헤스티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헤스티의 앙앙거림을잊게 만들겠다는 듯이 바리스가 누워있는 내 위에 몸을 눕혀왔다.
휴식과 재정비의 시간.
이제는 바리스나 헤스티도 은근히 몸짓하며 더한 야릇함을 느끼기 위해 자세를 바꾸곤 했다.
'수희는 수동적이고.'
그래도, 선호하는 자세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싫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수희는 바닥에 엎드려 눕히고 뒤에서 덮쳐주면 여느 때보다 빠르게 성감에 빠져들었다.
심리적인 요인이 클 것이다. 과시욕과 자기파괴 욕구가 채워지던 순간과 닮았으니까.
바리스가 두 손을 뻗어와 내 머리를 잡았다. 딴 생각하지 말라는 듯이, 이 순간만큼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이 깊게 입 맞춰왔다.
*
뜨거움이 지나간 시간.
나와 바리스는 땀을 식히며 옆을 보았다.
로브를 입은 소녀가 로브를 입은 소녀를 앉고 토닥거렸다.
아리나란의 순진한 표정은 그녀를 인형 놀이가 어울리는 아이로 보이게 했다.
“성장이라고 봐도 될까요?”
“….”
나는 답하지 못했다. 바리스의 질문은 생존과 전투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어미에게 매달리는 아이가 인형을 좋아하기 시작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여기고 기뻐하고 싶어 하는 보호자의 마음.
내가 모르고 알 수 없는 분야였다.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에요.”
바리스는 답하지 않는 나에게 웃어 보이고는 아리나란과 아리시를 눈에 담았다.
이제 둘은 미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 될 정도로 외형을 감추는 데 익숙해졌다.
소녀가 소녀를 인형처럼 꼭 껴안고 다니는 정도는 극단적인 성격이 흔한 미궁 탐색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궁 밖이라….’
이제 미궁 밖에 나갈 수 있기에 수희에게 말해 미궁 밖에 저택을 마련했다.
그 지시를 내릴 때 수희는 기뻐했다.
다른 이들과는 나눌 수 없는 그녀의 독점성을 일깨우니까. 바리스와 헤스티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미궁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나와 수희의 단둘만의 비밀이 될 것이다.
“슬슬 12층을 준비해야겠어.”
나의 말에 바리스도 헤스티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보다 각오를 내비쳤다.
*
만신전은 12층 너머에 있다.
석판에서 얻은 뼛조각이 더 깊은 곳을 가리킴을 느꼈다.
‘12층부터는 라후카트 타라만과 만날 가능성이 있지.’
라후카트 타라만.
어버스나이트의 사제이지만, 가진 능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평범한 외형에 어버스나이트 교단 내에서 권력 다툼보다는 미궁 탐색을 우선하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어버스나이트 사도 요르네스가 주시한다고 예전 회차의 수희가 알려주었다.
그래서, 미궁 탐험 극초반에 고블린 던전에서 카이바린 마법사에게 제물이 될 뻔한 아이들 등에 문구를 새겨 라후카트 타라만을 찾아가라고 시켰다.
‘혼돈은 순수를 갈구한다’는 문구도 문구지만, 라후카트 타라만이라는 이름 자체가 교단에서 무시할 이름이 아니었다.
* * *
* * *
* * *
사도 요르네스가 여전히 미소지었다.
상냥함이 피어나는 미소, 하지만 그 미소를 마주하는 이들은 몸을 굳혔다.
“분명 경사입니다. 우리 어버스나이트의 힘이 더욱 강대해졌지요. 사도가 타격을 입는다는 것은 신성과의 통로가 줄어든다는 의미. 이제 카이바린 사제는 우리 사제와함께 있는 것조차 버거워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기가 딱딱해졌다.
“이 불길함은 뭘까요? 파도를 헤치며 노를 저었지만, 육지는 더 멀게만 느껴집니다.”
사도의 예감은 단순한 기우로 끝나지 않는다.
신성이 완전에 가까우며 심오한 ‘의미’를 전해주려고 해도,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였다. 인간의 이성은 신성이 넘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추측의 영역으로 넘겼다.
그래서, 인간과 신성의 접합인 사도가 있어야 했다. 통로가 있어야 사도는 보내는 의미를 인간이 알수 있고 신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사도님. 라후카트 타라만을 불러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여정이 심층에 이르는 만큼 지식이 쌓였을 겁니다.”
“후른 사제님.”
“네, 사도님, 말씀하시지요.”
“사제님은 최근 카이바린 공략에서 활약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혼돈과 모든 분 덕분이지요.”
“좋습니다. 후른 사제님이 원하시는대로 행하세요. 혼돈은 각자의 의도에 따른 난입마저 집어삼키니까요.”
“아, 저 그게···.”
“저는 허락했습니다.”
후른 사제라고 불린 자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이 사도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음을 알고 당황했지만, 이미 다른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
가랑트런트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어리석은 자.’
신도에서 공을 세워 사제가 된 자. 사도와 사제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몰랐다.
그저, 사제와 신도의 차이와 비슷하다고 추측하는 자였다.
어버스나이트가 카이바린의 영역을 먹은 만큼 더 많은 관리자가 필요했고 필요에 의해 사제로 올려진 단지 그뿐인 자였다.
야수의 입안에 자신의 머리를 밀어 넣는 것인지도 모르고, 사도의 어린 얼굴과 여린 미소에 속아, 나이 어린 왕 뒤에서 조종하는 섭정이 되려 했다.
“안드레드 수희가 12층에 진입한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래요?”
사도가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사제 후른과의 대화는 단순한 잡담이었다는 듯이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심계가 깊지 못합니다. 자기 딴에는 가린다고 가리지만, 품은 지식과 의도를 드러내지요. 욕망에 충실한 모습이기에 우리 교단에서는 흠이 되지 못합니다만.”
가랑트런트가 말했다.
“이미 교단과 밖 사이에 걸친 이가 아닌가요. 밖을 향한 이상 그녀의 특징은 의미가 없지요.
교단에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냐, 없냐만 남을 뿐이지요.”
가랑트런트는 사도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사도가 품은 수희에 관한 생각이 자신과 다름을 알았다.
가랑트런트는 수희가 직관적인 순수성을 품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선악과 별개의 개념이었다.
수희를 다시 어버스나이트로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도는 수희를 완전한 외부인으로 여겼다.
“거기에 배짱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와의 대담에서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 모습은 불쾌할 정도지요.”
“흠. 불쾌하셨다니 죄송합니다.”
“가랑트런트님이 죄송하실 일이 아니지요.”
“송구합니다.”
요르네스는 손을 까닥여 더 이상의 언급을 금지했다.
“12층, 12층이라···.”
사도 요르네스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톡톡거렸다. 예술품과 같은 모습이지만, 그 모습에 혹해 긴장을 푸는 이는 없었다.
“12층은 라후카트 타라만이 탐색 대상으로 삼는 층이기도 합니다.”
가랑트런트가 사도 요르네스의 심중을 추측하듯 말했다.
“혹, 이 불길함은···. 만일.”
사도 요르네스는 말을 잇지 않았다. 홀에 모인 사제 전부와 공유하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추측이었다.
신탁은 신성이 사도에게 내리는 의지였다. 사제와 공유해선 안 되었다.
특히 요르네스에게 내린 신탁은 단지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신성의 경계를 받을 만한 내용이었다.
“설마 그곳을 찾고 있는 건가. 타라만은.”
[ 판테온, 만신전을 접하는 사도는 그 영광을 신에게 돌리리라. 영광을 얻지 못하는 신은 종말을 피하지 못하리라. ]
신들의 멸망을 언급하기에 입 밖으로 흘리는 순간 신벌을 받을 신탁. 신벌 이전에 믿음이 무너져버릴 신탁.
“이루어진다면 나로 인해 이루어져야 할지어다.”
사도는 선언했다. 선언한 순간, 기이한 법열을 느꼈다.
어느새 자신을 덮었던 불길함이 사라졌다.
요르네스는 자신이 정확한 선언을 했다고 믿었다. 인간의 욕망이 불길함을 느꼈던 예지를 흩트리는 것이 아니라, 사도로서 정확한 선택을 했기에 불길함이 사라졌다고 믿었다.
“가랑트런트. 안드레드 수희에게로 가, 함께 하세요.”
“카이바린 전선에서 제가 빠지면 진행이 늦어질 겁니다. 마무리한 후에 움직이는 것이 깔끔합니다.
아니면, 라후카트 타라만에게 특명을 내리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니, 당신이어야만 합니다. 나와 채널링이 가능한 당신이요.”
가랑트런트의 얼굴이 굳어졌으나 요르네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 * *
* * *
* * *
싱그러운 풀 내음,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콧속에 파고드는 냄새가 ’엘프의 전장‘ 미궁층에 도착했음을 확신하게 했다.
12층에 진입했다.
바리스와 헤스티는 물론 수희와 페로도 사방을 경계하면서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미궁층 중에는 미궁 밖의 환경과 비슷한 층이 존재했다. 다만 대부분 비슷하기만 했다. 무언가가 다르고 어딘가가 어긋났다.
하지만, ’엘프의 전장‘만큼은 미궁 밖과 거의 같았다. 특히 나무와 풀은 고위마법사조차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언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무와 풀만 보고도 어떤 미궁층인지 확신할 수 있는 층이었다.
“여긴 엘프의 전장이야.”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내가 자연스럽게 긴장을 늦추는 모습에 일행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경계에 전력을 다하다가, 비중을 조금씩 낮췄다.
“여긴 정말 밖과 구별이 안 되는군요.”
호흡을 늘어트린 바리스가 말했다. 나무로 이루어진 숲은 감각이 뛰어난 바리스마저 이질감을 못 느낄 정도였다.
“그래, 마치 미궁 밖과 같지.”
이제는 편하게 미궁 밖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향수에 정신이극단적으로 몰리는 단계는 이미 지나갔다. 오히려 이제 비슷한 풍경에 위안을 얻을 단계가 되었다.
“으, 그래도 저 열매는 독이 있는 가짜겠지요? 너무 똑같으니까 괘씸한데, 확 태워버릴까?”
헤스티가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물론 긴장을 풀기 위한 대화였다. 새로운 층에 도착한 만큼 감정에 따른 돌발행동을 할 리 없었다.
“여기선, 파이어 계열 마법을 아껴둬. 아예 모르는 것처럼.”
“네, 알겠어요. 그런데 왜요?”
헤스티는 주의 사항을 받아들이고 궁금증을 부딪쳐왔다.
“하나씩 말해주지. 저 열매는 독이 없어. 먹어도 돼. 그리고, 나무를 태우거나 파이어 계열 마법을 쓰면 우든 엘프들이 우리를 적대할 거다.”
“먹어도 된다니. 으. 기쁘긴 하지만.”
신선한 과일에 대한 그리움은 본능이었다.
“엘프의 전장이라고 하셨죠? 우든 엘프가 몬스터와 싸우는 것을 도와야 하는 층인가요?”
“우든 엘프 역시 몬스터야. 외모만 보고 착각하지마.”
어쩌면, 우든 엘프는 몬스터가 아니라 이종족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죽어도 미궁의 미스터리에 의해 리젠 되어 부활하는 이상 몬스터로 생각하는 것이 혹시 모를 사태 때 더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다.
“여긴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가 싸우는 전장이지. 둘 다 몬스터이기에 보상을 보고 진영을 선택하면 된다.”
“우든 엘프를 선택하면 과일인가요? 활도 떠오르지만, 일행에 궁수가 없으니까.”
“그래, 활과 식물로 만든 옷을 얻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의미가 적어. 결국, 약간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열매가 주된 보상이야. 세공품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졌지만, 까다롭다고 들었어.”
“다크 엘프는요?”
“그 전에 다크 엘프에 대해 들은 적 있나?”
“몸이 더 작고 피부가 검다고 들었어요. 음침한 마법을 다루고요.”
“그런 엘프가 따로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 다크 엘프는 그렇지 않아. 외모도 우든 엘프와 거의 비슷해. 피부색 역시 갈색빛이 띠는 정도이고.
가장 큰 차이는 금속을 다루는 대장장이라는 것.”
“아, 그럼.”
헤스티가 알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쪽 보상은 장비인가요? 대장장이질로 만들 수 있는.”
“그래, 12층 기준으로 봐도 상급을 주지. 높은 단계의 보상은 쓰는 장비를 강화해준다더군.”
“와, 장비 강화라···.”
전사는 무기를 쉽게 바꾸기도 하지만, 오래 쓰기도 했다.
싸울 때는 무기 하나로 싸우더라도 두 개 이상을 준비했다.
무기의 파손이 흔하기 때문이었다. 레리아나의 검 정도가 아니면 다음에 쓸 무기를 반드시 준비해야 했다.
보통은 마음에 들고 익숙한 무기와 난전에서도 쓸 무기를 준비했다.
익숙한 무기는 위험한 상황에서 힘의 낭비 없이 전력을 이끌 수 있게 해줬다.
다만, 익숙한 무기란 오래 쓴 무기였다. 인간끼리와 전투와 다르게 미궁은 층이 깊어질수록 적이 강해지고 보상이 좋아졌다.
아래로 도전을 이어가는 한, 늦게 구한 무기일수록 이전 무기보다 좋았다.
미궁에서 무기는 완성된 순간에 가장 튼튼했다. 인간의 손질은 마모를 늦출 뿐 미궁 안에서의 시간과 몬스터의 피, 혹 인간의 피를 먹을수록 약해졌다.
인간 대장장이는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레리아나의 검처럼 특별한 검이 아니라면, 전사들에게 다크 엘프 대장장이 보상만큼 좋은 게 없지.”
“으으, 그렇군요. 그러면.”
헤스티의 어투에 아쉬움이 묻었다. 헤스티의 시선이 바리스, 에리, 수희의 얼굴을 살짝 훑었다.
미궁밖에 나가지 않는 생활은 음식 욕심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열매를 먹고 오른다는 능력치 상승 역시 탐이 났다.
하지만 마법사인 그녀는 장비 강화가 전사에게는 얼마나 큰 기회인지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과일을 땄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일행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강하게 내게 모였다.
나는 독이 없음을 확인했다. 예전 회차에서의 과일과 같음을 파악했다.
또 하나의 과일을 따서 헤스티에게 던졌다.
중요한 대화 중이었음에도 먹을 수 있음을 직감하자 헤스티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졌다.
“우린 우든 엘프 쪽에 붙을 거야. 무기는 더 아래층에서 더 좋은 것을 구할테니까.”
헤스티는 과일을 크게 베어 물면서도 바리스의 표정을 살폈다. 바리스의 수긍하는 기색을 느끼고야 과일의 맛에 몰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