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69화
건조한 흙.
동굴 타입의 미궁층이 계단을 통과한 일행을 맞이했다.
‘내가 가진 길잡이 스킬로 올 수 없는 곳이다.’
계단을 이 미궁층으로 연결한 이는 아리나란에게 안긴, 검은 날개 소녀의 일부인 아라시.
미궁 몇 층인지도 추측되지 않았다.
길잡이 스킬이 부족 하다기보다는궤가 달라 분석하기 힘든 느낌.
“적이다.”
나의 외침에 일행은 바로 전투태세를 확립했다.
인간처럼 생긴 몬스터.
인간과 비슷한 키, 비슷한 골격. 몽둥이를 들었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역량만큼의 무력으로 덤비는 이족 보행 몬스터.
강하지만 어렵지 않았다. 미궁 안에서 인간의 무력은 몬스터만큼 강했지만, 진작 무서운 점은 조직력과 응용에 있다.
하지만, 나타난 적은 인간에게서 무력만 가져온 듯한 몬스터였다.
바리스가 양손검으로 밀어낸 몬스터를 수희가 부드럽게 마무리했다.
에리와 에드샤가 진형의 한쪽 면을 충실하게 책임지고, 헤스티와 페로가 마력을 충분히 예비한 상태에서 잔잔하지만 필요한 곳에 마법을 쏘아내 일행을 보조했다.
아리나란은 아리시를 껴안고 기다렸다. 여전히 한 방향을 향하려는 아리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리나란에게 엉긴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리시의 몸 외곽선만큼은 평범한 인간을 닮아갔다. 바지와 윗도리를 입혀 찢어진 부분을 채우는 피막을 감춘다면 인간의 몸으로 보일 것이다.
“묘하게 전투가 편해요. 속임수일까요?”
“으음, 우리가 강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바리스도 헤스티도 난이도를 체감하고 의심했다. 시선을 에리에게 보내 물었다.
“아래도 옆도 동굴면은 안정되어 있어요. 격렬한 변화의 조짐은 없어요.”
이제 지형은 단순한 엄폐물이 아니었다. 지형 자체를 변화시키는 적을 대비해야 했다.
특히, 동굴은 한정된 공간인 만큼 변화가 일어나면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대비할 수있다.
나뿐만 아니라, 에리와 에드샤도 리버밸런스 신도를 처치하는데 한 손 거들어 성장했다.
현격히 높은 격을 가진 적이 아니면 둘에게 전조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깨어나기 전의 미궁층인가.”
“트리거 발동되기 전의 미궁층 말하는 거죠?”
나의 의심에 수희가 말을 더했다.
“그래, 인간이 보는 관점이지만.”
일반 몬스터가 약하다면 특별한 적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지하 5층 에드샤가 나오는 층이 그랬고, 계단을 내려오기 전 층도 검은 날개 소녀에 비하면 일반 몬스터 다크림은 터무니없이 약했다.
*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일행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동굴이 끝났다.
햇빛과 버석버석한 땅, 양질의 토양은 아니었다. 농부가 보았다면 잔뜩 인상을 찌푸릴만한 땅, 그렇다고 해도 잡초가 꽤 많았다. 식물이 버티지 못하는 모래땅은 아니었다.
멀리서 보이는 인간이 만든 구조물. 높이가 낮은 집과 성벽들.
레리아나의 검이 징하고 울었다.
나는 새끼손가락 끝으로 검 끝을 간지럽혔다. 그녀가 떠나왔던 레오나드의 성을 떠올리는 것이겠지.
“변화의 느낌은 없어. 인과가 연결된 과거도, 리버밸런스가 간섭한 과거도 아니야. 현재야.”
레리아나와 일행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말했다.
레오나드의 성에 들어설 때만 해도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했지만, 이질감을 느꼈었다.
이곳에는 그런 이질감이 없었다.
미궁 이해 스킬과 인과 장악 스킬, 리버밸런스 사도급까지 처치한 지금의 감각은 레오나드의 성에 들어설 때와 비교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 있다.
성벽은 온전하지 않았다. 무너진 틈은일행이 한꺼번에 지나가기에 충분했고 너머로는 집들이 보였다.
온전한 집도 있지만, 대부분 부서졌다. 부서진 형태는 마치 투석기에 날린 돌에 당한 것이 같았다.
달려드는 이족 보행 몬스터의 수가 늘었다.
하지만 일행은 침착하게 상대해나갔다.
부서진 도시는 장애물이 많은 전장이었다. 상대가 지형을 이용하면 까다로워지는 곳이지만, 인간과 닮은 이족 보행 몬스터는 단순하게 달려들었다.
조직력과 지형을 이용하는 등의 전투 테크닉을 부리지 않는 모습에 연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심력의 소비만 따지면 미궁의 저층보다 못했다.
미궁은 저층 몬스터도 온갖 수작을다 부리기에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다.
오래간만에 압도하면서 농락할 수 있는 적에 수희는 들뜬 미소를 지으며 정원을 거닐 듯이누볐다.
그동안 수희의 성장이 더뎌 일행에 못 미쳤기에, 일행도 기꺼이 양보하고 보조했다.
“잃어버린 이들일까요?”
다만, 바리스는 이상을 느꼈다.
바리스의 감각은 탁월했다. 나의 인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내가 냉정하게 객체화해서 분석한다면 바리스는 느끼는 것에 가까웠다.
바리스는 레리아나의 검을 구한 레오나드 성에서 성 밖에서 밀려드는 키메라들의 비틀린 운명에 휩쓸릴 뻔할 정도로 타인을 느끼곤 했다.
“무엇을?”
헤스티가 끼어들었다. 다만 헤스티의 관점은 또 달랐다. 연결점을 파악해 본질에 접근하려는 사고방식은 마법사에 어울렸다.
“몰라. 소중한 것이 아닐까.”
“흐응, 소중하다라···. 너무 광범위하잖아. 전사들에겐 무기가, 망자에게 목숨이 소중했겠지. 신도에겐 신성이 소중하고, 신성에게는 신도가 소중할···까?”
신도와 신성에 관한 이야기, 특히 잃어버린 신성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누어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 수희가 어버스나이트의 힘을 다시 쓰고, 페로도 자신의 노력으로 이전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이상,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피해야 할 주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래를 위해서는 심도 깊게 다뤄 더 깊고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생겼다.
“우린 신도가 신성에게 버림받는 것을 알아.”
나는 입을 열었다.
일행과의 대화보다 다음 전투를 위해 호흡 가다듬기를 우선하던 수희가 눈썹 끝을 올렸다. 페로 역시 늙고 회한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버림이 아니라 신성이 아예 사라져버리면 신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게는 [신성 이해] 스킬이 있다. 이 스킬이 보조해주기도 했지만, 사도급과 사제들과 전투를 통해 느꼈던 신성에 대한 감각이 추측을 이끌었다.
검은 날개 소녀가 비명을 내지를 때, 그녀의 기억이 절규로 터져 나와 비산할 때, 그 안에서 한 집단의 이름을 인지했다.
아라크라크 학파.
그리고 그 학파가 추종하는 자.
검은 날개 소녀가 의식의 절반을 잃고도 잊지 못하는 원한.
마법사 아라크라크.
검은 날개 소녀를 영겁으로 묶을 만큼, 신성이 되어버릴 만큼 강력한 마법사.
아리나란에게 피막을 얻어 아리시가 된 소녀의 일부가 이끈 곳이 이곳이었다.
도착한 이곳에는 신성이 없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이족 보행 몬스터만 있을 뿐이다.
수희의 호흡이 다시 살짝 거칠어졌다.
하지만, 전투의 피로가 아닌, 떠오른 생각 때문에 거칠어진 호흡이기에 일행은 다시 전진했다.
*
내성을 향해 걸었다.
나타나는 이족 보행 몬스터들이 조금 더 강해졌다. 무기도 몽둥이에서 지팡이로 바뀌었다.
하지만 일행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마법사용 지팡이를 몽둥이처럼 쓰는데 나오는 빈틈을 이용할 뿐이다.
“여기부턴 알 수 없어요.”
에드샤가 고개를 모로 눕히며 말했다. 에드샤는 동굴 속의 박쥐처럼, 이동하면서도 발아래 대지에 파장을 보내 반향을 들었다.
익숙한 곳이 아니기에 고급 정보는 뽑을 수 없지만, 강력한 적에게 대지가 장악되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내성 안쪽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바리스, 아리나란을조금 더 신경 써줘.”
“네, 준영씨.”
마모된 내성의 성문을 열었다.
일반인의 힘으로는 열 수 없어 기관을 이용해야 하는 문이지만, 미궁의 전사에게 어렵지 않았다.
끼리- 끼. 문이 억지로 열리면서 돌과 돌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거대한 홀, 중앙의 통로를 두고 양옆에는 기둥이 섰다.
긴장하며 진입했지만,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홀의 중앙에 성인 남자의 키 정도의 석판이 있었다. 아리시의 얼굴이 석판을 향했다. 흔들리지 않고 노려보았다.
바리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영역을 장악할 수 없는 성소라고 해도 일행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정도로 활성화된 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소의 중앙 석판은 흔적이었다.
언제인지도 추측할 수 없는 과거에 이곳에 있던 신성의 흔적이었다.
아리시가 아리나란의 품을 벗어나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걸을 때마다 피막이 흘러내려 통로를 붉게 물들였다.
아리시가 스스로 밀어냈다. 성소의 힘이거나 아리나란의 의지가 아니었다.
남은 것이 전투가 아님을 검은 날개 소녀 의식의 일부도 느낀 것이다. 스스로 매듭을 묻으려는 것이다.
석판에닿았다.
먼지만큼 미세한 조각이 표면에서 보풀처럼 일어났다. 시간을 견뎌온 석판도, 마찬가지로 시간을 견디온 이를 만나자 스스로의 결합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검은 날개 소녀가 품었던 악의가 원래의 대상을 만났다.
소녀를 괴롭혔던 악의는 함께 방주를 탔던 이들이 남기고 간 잔재였다. 소녀를 괴롭히기 이전부터 마법사 아라크라크를 원망하던 이였다.
악의가 석판을 부식시켰다.
악의는 석판을 녹이고 재가 되어 흩어졌다.
나는 다가갔다.
내가 접근하자 아리나란이 바닥에 흩어졌던 피막을 다시 거두면서 따라왔다.
아리나란은 내가 아리나란을 보호하고자 한다고 믿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아리시에게 내가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사실이기도 했다.
아리나란과 아리시는 이전 회귀 때는 이어지지 못했던 인연이었다. 미궁의 미지를 밝혀주는 인연은 내게 알지 못했던 길을 보여줄 것이다.
악의가 사라진 소녀의 일부가 무너질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아리나란이 다가가 다시 피막으로 감쌌다.
아리나란의 피막을 받아들여 다시 아리시가 되었다. 피막으로 채워지는 소녀의 일부는 편안해 보였다.
*
“끝났군.”
내 말에 아리나란과 아리나란에게 안긴 아리시를 제외하곤 큰 숨을 내쉬었다.
“으으, 이제 이 성소 좀 뒤져봐도 돼?”
수희가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그래, 페로랑 함께 가.”
“칫, 감시자는 필요 없는데, 중요해 보이는 것 있으면 당연히 내놓을 거야.”
내성 안, 이 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석판이었다. 성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금전적 가치가 높은 물건이 있을지 몰라도 영성의 가치는 낮을 것이다.
나는 말 없이 손을 흔들었다.
수희가 얼굴로만 심통 부리고는 고갯짓으로 페로를 부르고 멀어졌다.
성소 안에는 몬스터가 없는 만큼 수희와 페로는 빠르게 유물을 수색할 것이다.
*
헤스티가 다가왔다. 바리스, 에리, 에드샤와 함께 내가 보는 것을 보았다.
[ 우리의 세계는 무너졌다.
뼈로 이루어진 거인과 황금빛 용과 검은 숲은 시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영겁을 잇는 마법사인 나만이 남을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죽는 것이 당연하고, 생겨난 것은 사라짐이 당연하다. 나는 이를 거스르나 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망할 것이다. 우리 세계 안식을 부속물로 전락시킨 이를 저주할 것이다.
만신전.
판테온이라고 이름 붙인들, 사라져 안식을 취해야 할 이들에게 무슨 위안이 될까.
나의 석판을 부순 이여, 나는 너를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미궁의 의지에 먹힌 곳, 성소와 석판이 유지되는 현상마저 깨트린 자라면 만신전의 세 석상을 부술 수 있겠지.
일찍이 뼈로 이루어진 거인이 내게 주었던 뼛조각을 남긴다. 뼛조각은 원래 그 조각이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
석판 아래에 글-의미가 새겨져 있었다. 석판을 제거한 자만이 볼 수 있는, 간단하지만 명확한 트릭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석판이 놓였던 아래판에 파인 홈에 놓인 보석을 꺼내 들었다.
새하얀 보석 안으로 뼛조각이 비쳐 보였다.
‘만신전이라···.’
수희와 페로를 딴 곳에 보낸 이유였다. 수희와 페로가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버스나이트 신성과 카이바린 신성을 믿을 수 없다.수희와 페로, 둘의 격이 현재의 나만큼 오르지 않는 한, 신성이 거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머릿속 기억을 긁을 위험이 존재했다.
석판 아래판이 석판처럼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