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59화
투르반을 따라 옮긴 걸음.
한 명의 키벨레가 무리를 이끌고 나타났다.
길게 쭉 뻗은 팔다리가 아름다웠다. 발목과 손목에 장신구처럼 붙은 암석은 어스 계열의 성취를 추측할 수 있게 했다.
“세디메샤, 거기 돌덩어리 좀 내려놓지 그래.”
세디메샤라고 불린 여자의 머리 위에는 송곳처럼 뾰족한 끝을 가진 돌창 수십 개가 일행을 향한 채 공중에 머물렀다.
“이들은 이용할 수 있는 자야.”
나는 투르반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불쾌한 말을 할지언정,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세디메샤, 강한 척할 때가 아니지. 힘을 예비해야 할 시점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흥, 그러는 너는 왜 우리의 휴식을 방해하는 거야?”
세디메샤가 틱틱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을 흔들었다.
뾰족한 돌창은 땅으로 돌아가 사라졌다. 키벨레에게 땅 위에 돌창을 세우기가 가장 쉽고, 그다음은 돌창을 던지는 것이었다.
돌창을 공중에 띄우는것이 가장 어려웠다. 일행을 압박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시가 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행에게는 무의미했다.
일행은 공중에서 뜬 투사체에 대한 대비는 질릴 정도로 반복했다. 내가 석궁구 운용을 훈련하면서 일행은 석궁구처럼 공중에 뜬 투사체에 대한 훈련을같이했었다.
“도와주러왔다.”
“저 수상한 놈들도?”
“도움이 되게 만들어야지.”
나는 한 발짝 나섰다.
“마법진 연계 지식이 필요합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나의 말에 세디메샤는 물론 투르반도 인상을 썼다.
투르반에게 쌓은 인상을 바꾸는 언행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투르반과의 관계는 이미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세디메샤는 달랐다.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위압을 우선했다.
자신이 믿는 것만 믿는 자였다.
그런 이에게는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한 법이었다. 남을 아래로 둘 이유가 필요했다.
이는 현재 상황과 상관없었다. 아니, 현실이 절망적이면 절망적일수록 가식이 사라져 원래의 사고방식대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회귀 속에 나의 일행의 죽음만 보아오지 않았다. 적이거나 아군이거나 아니면 그저 타인이거나. 무참히도 많은 죽음과 죽음을 앞둔 자들을 보아왔다.
투르반은 유하지만, 신념을 가진 자였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디메샤는 달랐다. 어스 슬라임을 소환한 자신의 결심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의심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근거가 있다.
‘후회하고 고통스러운 세디메샤.’
미궁 심층에서 보았던 스쳐 지나간엔피씨. 네임드이지만, 특별하지 않았다. 특정한 미궁층에 고정되지도 않았다.
떠드는 혼령을 랜덤으로 소환하는 적에게 소환당하고 처치당하는 키벨레 종족의 언데드일 뿐이었다.
언데드 세디메샤와 싸우면서 들었던, 그저 넋두리에 불과했던 말들이 근거였다.
*
나의 요구에 세디메샤의 얼굴이 흉악하게 변했다.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다가 일행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시선이 에리에게 멈췄다.
“저아이는···.”
외형으로는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 보이는데도 대뜸 에리를 아이라고 칭했다.
“아이야, 이리 와라. 네 이름이 뭐지?”
세디메샤가 에리를 대하는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불안해할까 봐 미소까지 지으며 물었다.
에리가 지시를 바라며 나를 쳐다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야.”
“성은 뭐니?”
“몰라.”
나는 컨트롤러 스킬로 에리에게 성을 가르쳐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으응, 얼굴을 보면 에드리와 닮았는데, 그럼 에드샤랑 자매이려나? 잠시, 네 몸에 손을 대도 되겠니?“
”안 돼. 싫어.“
”그래, 미안해.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적어서 마음이 급했어.“
에리의 딱 끊는단호한 말에도 세디메샤는 부드럽게 응했다. 키벨레 종족의 종족애는 다른 종족과 비교할 때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높았다.
순수혈통도 아니고혼혈인데도 지도자급인 세디메샤가 에리에게 양보하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이런 유대가 있기에 종족 단체 마법이 가능한지도 몰랐다.
세디메샤가 고개를 내게 향했다. 다시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진 연계 지식이 필요한 건 이 아이 때문인가?“
”그렇지.“
”익힌다고 해도, 에리 혼자서는 써먹지 못할 텐데.“
”써먹을 수 있어. 세상에마법을 쓰는 건 키벨레뿐만이 아니야. 아니, 키벨레 종족은 몰라. 마법사의 마법이 얼마나 확장성 있고, 적응도가 강한지.“
순간, 세디메샤의 시선이 헤스티를 향했다. 헤스티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턱을 살짝 들고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히도 세디메샤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크고 화려하게 귀족의 인사를 보냈다.
누가 봐도 비꼬는 인사였지만, 세디메샤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고개만 까닥이고 에리에 대해 말했다.
”조건이 있어. 에리와 함께할 시간을 줘. 그리고 에리는 다음 전투에 우리, 키벨레와 함께할 거야.“
”시간은 줄 수 있어. 하지만 전투에서 에리와 함께 하는 건 우리야.“
* * *
세디메샤는 아니, 키벨레 종족은 처음 보는 에리를 아낀다.
그런데도 절망적인 전투에서 에리와 함께하려고 한다.
이는 레오나드 성에서 레리아나의 일을 떠올려보면 이상했다.
레오나드는 자신과 함께 있으면 죽을 것을 알고, 나에게 레리아나를 맡겼다.
세디메샤는 우리에게 에리를 맡기지 않았다.
이는 키벨레 종족은 살 방법이 있다는 의미였다. 나와 일행과 리크는 죽거나 혹 저주받더라도.
* * *
일행은 마을 밖에 자리 잡았다. 리크들은 우리 일행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을 출입을 허락받았음에도 일행의 옆에 주둔지를 조성했다.
에리는 세디메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은 천막을 세웠다.
나는 일행에게 상황을 맡기고 천막에서 명상에 들어갔다. 키벨레의 마을은 많은 키벨레와 마법진이 있어 집중이 필요했다.
떨어져 있는 에리에 동조했다.
*
나는 에리가 보고 듣는 것을 받아들였다.
”에드리님. 이 아이를.“
”아. 이 아이는···.“
처음으로 만나는 이는 에리와 닮았다고 말한 에드리라는 이름의 키벨레. 어쩌면 어미이거나, 최소한 직계 친척일 것이다.
하지만, 에리는 두 키벨레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한 여자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키는 에리보다 작았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친숙한 얼굴이었다.
”못 보던 언니네.“
에리보다 작은 여자아이가 다가와 에리의 손을 잡았다.
에리는 키벨레 종족과는 접촉하지 않겠다는, 분석 당하지 않겠다는 처음의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아이처럼 다가와 만지작거리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언니, 언니 이름은 뭐야?“
”에리.“
”에리 언니, 나는“
에드샤, 에리의 보호자이자 스승.
”에드샤야. 또래가 없어 심심했는데, 잘 됐다. 엄마 나 에리랑 놀아도 돼?“
에리보다 조금 작을 뿐, 인간이라면 성인이라고 봐도 될 정도인데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행동했다.
아이인 기간이 긴 키벨레 종족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에리는 마음 한구석에 이질감을 느꼈다.
어쩌면 퇴행한 아리나란과 비슷한 느낌.
무엇보다도 사랑받고 행복하게 자랐음을 물씬 흘러내는 행동.
에리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에리가 자랐던 뒷골목은 차갑고 잔혹한 세상.
어른 흉내를 내지 못하는 아이는 사라지는 세상이었다.
그래도, 에리는 손잡아오는 에드샤의 손을 맞잡았다.
일행과 함께하면서 싸우는법을 배운 것 이상으로 선의를 만끽했기에,
바리스와 지하 5층의 에드샤의 마음은 뒷골목 기억을 지워버릴 만큼 따뜻했기에.
”안돼. 에드샤, 마법진은 다 외웠니? 아, 에리랑 같이 가면 되겠다. 지금 마법진을 파악하는 게 제일 급하니까.“
* * *
나는 에리와 연결된 상태이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에리의 인연은 귀중했다. 급한 상황이지만, 추억이 될 순간을비틀 수 없었다.
비극 자체를 없앨 힘이 있다면, 추억은 중요하지 않았다. 비극을 추억으로 기억하는 건 뇌 속의 방어기제일 뿐이니까.
하지만 비극 자체를 없앨 수없다면,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에리에게 왜곡 없이 전해지도록 물러서는 것이 전부였다. 비극이라도 추억은 소중하니까.
‘마법진.’
투르반은 키벨레가 아껴야 할 힘을 이미써버렸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에드샤의 어미, 에드리는 마법진을 파악하고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미 써버린 마법진은 얼마나 중요할까?’
교육이 목적이라면 절대적이었다. 종족 연계 마법진은 쉽게 새길 수 있는 진이 아니고, 반드시 후대에 전수해야 할 지식인만큼 무엇보다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생존이 목적이라면?
거시적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할까? 다 함께 살아남은 후에는 얼마든지 가르쳐줄 수 있는데,
원래의 에드샤도 에리에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마법과 기술부터 가르쳤다.
나는 다시 생각을 전환했다.
‘지금 익히는 마법진 지식이 당장 생존에필요한 지식이라면.’
추론을 확정했다.
‘마법진은 하나가 아니야.’
이미 쓴 어스 슬라임을 일으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마법진이 키벨레에게 준비되었거나, 준비되고 있다.
*
천막 밖에서 바리스가 투르반과 네이투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리스는 내가 에리에게 집중하는 동안, 나를대신하려고 했다.
투르반에게 다가가 대화로 투르반이 현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한 근거를 알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투르반은 종족 내부 사정과 관련되면 이야기를 꺼렸다. 그리고 비극을 암시하는 듯한 불편해하는 투르반의 모습에 바리스는 추궁하지 못했다.
대화를 옆으로 비틀어 정보를 얻어내는 수작은 바리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이야기는 바리스 자신이 궁금해하는 내용으로 넘어갔다.
”아까,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일족과 함께 보내고 싶지 않아?“
투르반은 머뭇거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바리스의어색한 정보 탐색에는 안 넘어오더니 걱정을 담은 말에는 반응했다.
”흠, 뭐, 즐거운 얘기는 아니지만 숨길 일도 아니니까. 패가 갈렸어. 키벨레와 함께 지키자는 파와 도망치자는 파로. 지금쯤이면 고향을 버렸을걸.
사실, 내심 키벨레 종족이 부러워. 저렇게 같은 마음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나는 구하기 위해, 타종족이라도 함께하는 자네들이 더 나아 보여.“
바리스는 위로하듯 살짝 고개를 저어 부정하고, 다독거렸다.
나는 당장은 쓸모없지만, 바리스의 대화 덕분에 미궁과 연결된 정보를 또 하나 얻었다. 리크는 미궁 5층뿐만 아니라, 깊은 곳에서도 나왔다.
깊은 곳의 리크들은 투르반과 함께 싸우지 않고 도망친 무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