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52화
카르미단은 나를 몰랐다.
그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아리나란을 연료로 완전히 소모할 생각이었다면 반격의 여지가 적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힘으로 도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방어가 준비된 제단이기에 불가능에 가까운 줄타기를 시도하다가 후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나란이 다음을 위한 재료라면 달랐다. 약탈자가 끼어들 틈이 생겼다.
아직 생명이 꺼지지 않은 깨끗한 고깃덩어리는, 하늘로 잡아채려던 독수리와 호시탐탐 노리던 뱀 사이에서,
하이에나에게 도둑맞았다.
거대한 심력이 소모되었으나 결과는 오히려 빨랐다. 아리나란은 자아가 완전히 흐트러진 상태이기에 그저 농부에게 주워진 이삭처럼 내게 종속되었다.
‘그저 방해로만, 구출로만 끝낼 수 없지.’
그녀의 마음은 모른다. 물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원기가 손상되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삶보다 괴이한 힘을 지니는 것이 나았다.
아리나란을 통제해냈다.
이어서 아리나란의 것이었던 것에 의식을 뻗쳤다. 아리나란의 피에서 기인한 피막에, 아리나란을 통한 나의 의지를 담았다.
“바리스 물러서.”
바리스는 망설이거나 질문하지 않았다. 그대로 뒤로 빠지면서 보호막을 거두었다.
붉은 피막이 나와 함께 하는 아리나란을 향해 크게 넘실거렸다가, 깨어질까 봐 조심하는 것처럼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피막을 통제해냈다.
아리나란의 상처로 피가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헤스티, 페로. 카르미단의 아래를 봐라. 그를 공격하지 말고 그와 제단이 이어진 피를 태우고 잘라라.”
바바리안 베르칸은 카르미단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를 돕기 위해 헤스티와 페로는 마법을 날렸지만, 베르칸과 호흡을 맞춘 기간이 짧은 만큼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바닥의 피는 달랐다.
근처에 아군이 없고 고정된 타겟. 마법사에게 이보다 더 좋은타겟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그 결과가 내게 이어졌다.
제어하고자 하는 의지의 격돌.
제단의 주인은 카르미단이었기에 그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아리나란에게서 나온 피였다.
나 역시 마법사로 성취를 이룬 적 있었다.
기술로는 나를 압도할 수 없다. 아리나란이 내게 속하는 순간, 제단의 마법적, 주술적 기교는 의미가 줄어들었다.
리버밸런스에서 만든 제단이라 세부적인 사항은 모를지라도큰 흐름을 비트는 것은 나의 지식으로도 충분했다.
거기에 더해 헤스티의 파이어 볼과 페로의 윈드 스피어가피의 연결성을 물리적으로 끊어버렸다.
피막의 붉은 피가 아리나란의 몸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많은 피가 남았다. 제단의 증폭이 이룬 결과였다.
‘인간을 벗어나 버렸군.’
카르미단에게 이용당하는 것과 비교하면 차라리 구원에 가깝긴 해도.
베르칸은 슬퍼하겠지만, 내게는상관없었다. 에리는 물론 에드샤, 레리아나도 인간이 아니었다.
*
붉은 피가 춤을 췄다. 더 이상 나를 노리지 않았다. 나를 노리던 붉은 피막은 아리나란을, 나를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 누구? 나의 주인?”
목으로 나온 것 같지 않은 끈적한 소리. 아직 회복되지 않은 성대로 소리를 내 물었다.
“너, 네가 누군지 기억하는가?”
내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주인이라는 말에 의심이 갔다. 카르미단이 아리나란의 생명을 이용해 키메라를 만들 때, 자신을 따르도록 제약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한 일은 그 제약을 부수는것이 아니라 방향을 내 쪽으로 돌린 것이다.
“저, 저는 명령을 받드는, 아니···. 아리나란, 바바리안의···. 아, 그대를 모시는 종입니다.”
혼란스러운 아리나란의 상태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그나마 베르칸과 아리나란에게 다행이라면 바바리안인 아리나란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아리나란을 품었다. 온몸의 상처 사이로 붉은 피가 내비치는 아리나란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붉은 피막과 함께 확인하듯 나를 감쌌다.
“저놈이, 감히.”
“아아.”
두 명의 음성이 들려왔다. 분노에 가득 찬 음성과 안도와 안타까움이 섞인 기이한 탄성.
저절로 카르미단과 베르칸의 전투가 멈췄다.
“저 둘을 기억하나.”
“흐릿해요.”
아리나란은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대답했다. 몸에서 빠져나간 피는 돌아왔지만, 상처는 원래대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슬라임처럼 움직이는 붉은 피막이 상처를 채웠다.
“저 사람, 친숙한데. 나와 함께 했었나? 아닌가.”
베르칸은 딸이었던 것의 말에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 저거 싫어. 나를 죽인.”
자아가 지워지면서 퇴행이 일어났지만, 적과 아군을 구별했다. 카르미단이 심어놓은 복종심은 내게 향하고, 그가 한 행동만 기억했다.
“그래, 저 바바리안을 보호하고, 저자를 처치하자.”
아리나란은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순종한 후, 처음의 지시였지만 그녀에게 남아있던 심상과 일치하기에 부담은 적을 것이다.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은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오히려 흐릿한 자신을 선명히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리나란과 이어진 붉은 피막이 크게 부풀어지듯이 펼쳐졌다. 그저 공격성을 내비치는 행동, 어린 새가 적을 만나, 자신이 커 보이도록 날개를 부풀리는 것과 닮았다.
‘카르미단이 아리나란의 심상에 새겨넣은거다.’
그리고 심상에 새겨넣은 건 적대 반응뿐만이 아니었다. 날개가 존재하는 원래의 이유, 아리나란의 피막 날개의 움직임은 적대 반응에서 원래의 목적을 위한 날갯짓으로 변해갔다.
날갯짓은 이곳에서 사냥한 와이번과 닮았다.
카르미단이 와이번 둥지에 제단을 세운 이유. 그는 아리나란에게 와이번의 인자를 심었다.
없는 날개 대신 피막으로, 와이번이 본능에 새겨진 비행법으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이능의 흐름을 만들어서.
와이번과 다른 건 혼자가 아니라 나를 안고 함께오르려고 한다는 것.
차이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리나란은 나의 종속물이 되었다. 나는 컨트롤러 클래스의 스킬로, 나의 종속물을 공중으로 띄울 수 있다.
오히려 더 안정적으로 변했다.
컨트롤러 종속물 부유 스킬로 보조하고, 아리나란과 이어진 감각으로 아리나란이 하고자 하는 바를 조율하자, 처음 하늘을 나는 어린 새가 아니라, 하늘에서 삶을 이어가는 맹금류가 되었다.
“내가 가져야 할 것이다. 네놈 따위가 아니라.”
카르미단이 절규했다.
나는 위에서 카르미단을 내려다봤다. 경멸과 비웃음을 품고 입술 끝을 올렸다.
“너 여유가 있어. 여유가. 너를 걱정하라고. 슬슬 도망칠 때 아니야?”
카르미단을 조롱했다.
내 말에 베르칸이 위치를 살짝 바꾸었다. 카르미단의 퇴로를 예측하고 막을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베르칸의 마음은 추측할 수 있다. 죽어도 카르미단을 놓칠 수 없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복수도 복수지만, 베르칸은 카르미단이 아리나란을 다시 손에 넣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나를 안은 아리나란이 카르미단을 향해 급강하했다.
검 3개의 길이만큼 가까워졌을 때, 나는 아리나란을 조율해 나를 던졌다.
속도와 높이를 검 끝으로 모았다. 카르미단의 정수리를 향해, 일점을 내질렀다.
키가라-
피했으나,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의도했던 바였다.
나는 전투의 열기에 몸을 맡기면서도 전황을 분석했다. 카르미단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비틀고 흔들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대에 가까웠다.
괜히 ‘도망’을, 퇴로를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카르미단은 고블린 던전 3층의 허접한 마법사와 수준이 달랐다. 마법 수준이 아니라, 의지가 달랐다.
필요하다면 자신을 내던져 적을 파괴할 자였다.
그런 자이기에 퇴로를 언급했다. 이 전투의 승률보다 다음 전투의 승률을 계산하도록, 카르미단에게 다음 전투의 승률이 더 높다고 속삭였다.
카르미단은 다음 전투의 승률을 더 높게 볼 수밖에 없다.
마법사에게 지식이 힘임으로. 이번 전투로 나에 대해 알아낸 만큼, 앞으로 알아낼 만큼 카르미단의 승률은 올라간다.
‘이것이 마법사의 약점이지.’
마법사는 지식으로 지혜를 쌓아 미래를 본다.
미래를 보는 만큼, 현실의 무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네놈들.”
카르미단은 분노를 터트리며 우리와 마주했다.
‘하지만.’
카르미단은 격돌의 순간에 적의 파괴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미래를 도모했다. 내 말에 영향을 받았다.
올바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바바리안이 없다면.
바바리안은 마법사를 잡는다.
현재에 모든 것을 던지기에.
베르칸의 도끼가 카르미단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나와 격돌 전에 베르칸이 견제하기 위해 날린 스피어 마법을 몸으로 받아내고서.
도끼가 어깨를 부수고 심장을 갈랐다.
카르미단이 파괴되었다.
*
한 존재를 파괴하고 또 하나의 죽음을 앞뒀다.
카르미단의 파괴와 베르칸의 죽음.
수없이 경험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것.
그저 마음을 닫아 상처 입지 않는 법만 익혔을 뿐이다.
일행은 침묵했다.
나는 침묵을 깼다. 죽은 자와 산 자, 무엇보다 살아남은 자를 위해서.
”웃어라. 베르칸, 너의 넋은 바르하르의 신성이 거두어갈 것이다. 너의 딸은 나의 보호 아래에 머물 것이다.
그녀의 현재는 나와 함께 한다.
딸의 미래를 걱정하지 마라. 나의 종말이 올 때, 너의 딸에 대해 바르하르와 교섭할 것이다.
바바리안의 신성, 바르하르는 너의 딸을 기꺼워할 것이다.“
나는 마지막 숨을 내쉬는 베르칸에게 예언처럼 말했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이기에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루어낼 수 있는 미래이기에베르칸을 속이는 것이 아니었다.
베르칸은 두 눈을 감았다.
여전히 염려가 엉긴 눈에 그의 딸을 담은 채로.
어버스나이트의 신성이 침묵했다. 카이바린 신성이 침묵했다.
리버밸런스의 악취가 사라졌다. 카르미단의 파괴는 또 다른 불씨가 될테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베르칸은 먼 곳에서, 먼 옛날의 선조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투를 바쳤고, 다시 전사로 태어날 것이다.
바르하르 신성이 내게 속삭였다. 신에서 신성으로 격하되고, 두 다리로 디딜 땅을 미궁에 먹히면서도 지켜온 바르하르의 본질에 따라.
장례는 필요하지 않았다.
썩은 고기를 까마귀에 양보하고 오래된 나무에 걸어놓은 시체가 바람에 풍화되듯. 베르칸의 몸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