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50화
신호가 왔다. 일행과 떨어져 수색과 감시를 하던 수희가 팔찌를 이용해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일행에게 베르칸과 함께 있으라 지시하고 수희와 접선했다.
“인간의 흔적을 찾았어요. 전투의 흔적이 아니에요.”
수희가 찾은 흔적을 향해 이동했다.
수희의 말대로 전투의 흔적이 아니었다. 일상적인 사냥의 흔적이 아니었다. 베르칸의 예전 동료가 남긴 흔적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동의 흔적, 그것도 수희가 숨기 좋은 자리를 찾아 움직였기에 찾을 수 있었던, 숨어서 이동한 흔적이었다.
“이곳을 잘 아는 자.”
적을 추측했다. 베르칸이 전투를 치러야 통과 가능하다는 곳을 흔적을 숨기며 지나간 자들이다. 베르칸보다 이곳 지형에 익숙한 자다.
추적을 시작했다.
서로 보고 있지 않아도 통신할 수 있는 에리에게 신호를 보내 거리를 두고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 * *
* * *
묵묵히 따라오던 베르칸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일행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이 길을 알아낸 거지?”
바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들어 쉿 하라는 손짓만 보였다.
베르칸은 어쩔 수 없이 일행을 이끄는 에리를 눈에 담았다.
거리를 두고도 준영의 신호를 받는 에리는 앞장서서 걸었다. 거석과 거석 사이, 무장한 인간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
헤스티는 바리스, 에리, 페로, 베르칸과 함께 한참을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베르칸의 굳어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는 적은 없었지만, 잔뜩 굳어진 베르칸의 표정에서 적진 깊숙이 들어왔음을 느꼈다.
“여기서 기다리래요.”
에리가 지시를 전했다.
베르칸이 입술을 깨물었다. 준영과 수희의 전진 속도가 달라졌다. 이는 둘의 전진을 멈출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결국,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서는베르칸을 바리스와 헤스티는 바싹 경계했다.
* * *
* * *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저었다.
아리나란.
베르칸이 구해달라는 소녀. 갈색 피부에 에리보다 작은 키지만 바바리안 종족이자 베르칸의 딸이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소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여자아이의 시체. 그렇게만 보였다.
바바리안 종족 여성은 외형도 외형이지만, 넘치는 생명력과 활기에 누가 봐도 바바리안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다.
어린 바바리안 소녀도 마찬가지지만,깊숙한 제단 위에 누워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이미 식어버린 체온처럼 창백한 뺨은 그저 참혹했다.
소녀의 표정만큼은 잠든 것처럼 고요했지만, 소녀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붉은 피가 커다란 제단을 완전히 덮고 아래까지 덮였다. 작은 소녀의 몸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피.
소녀의 손목과 팔목, 옆구리와 목의 상처는 피가 어디에서부터 흘러내렸는지 알려주었다.
나는 수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와이번 미궁층,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이 커다란 바위로 세워진 터, 터의 중앙 제단 위의 소녀를 두고 물러났다.
* * *
* * *
합류한 나는 베르칸에게 물었다.
“바바리안 소녀는 한 명인가?”
아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베르칸이 사소한 이기심을 부릴 수 있도록. 일족의 죽음은 가족의 죽음보다 가벼우므로.
“그래. 한 명이다. 미궁 안에서 다른 아이를 본 적 없다. 바바리안 소녀를 보았다면 아리나란이다.”
불길한 예감에 베르칸의 말이 떨렸다. 나와 수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살피는 베르칸의 시선에 무정한 타입인 수희도 결국 고개를 돌렸다.
“죽···었는가. 이미 죽었다고? 그럴 리 없다. 그럴 수 없다.”
나는 무심하게 고갯짓했다. 수희와 내가 빠져나온 방향을 가리켰다.
바리스가 베르칸이 흥분해 돌발행동하지 않을까,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손을 들어 바리스를 막았다.
나는 베르칸을 설득하지 않았다. 진정시키지 않았다.
이 미궁층으로 들어오기 전에, 베르칸은 딸이 살아있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이 없다.
나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죽은 딸은 인질이 될 수 없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과거로 왔다. 그렇다면 당연히 딸은 살아있어야 한다.
이 미궁층은 과거이므로, 베르칸이 그의 동료와 오기 전의 와이번 둥지임으로.
그럼에도 바바리안 소녀, 아리나란은 살해당했다.
“한 가지 의문만 남았군.”
“네?”
헤스티의 반문에 조용히 말했다.
“베르칸은 리버밸런스의 메달을 가지고 우리를 와이번의 둥지로 유인했지. 아리나란의 목숨으로 협박하니 굴복했겠지.
다만, 의심스러워. 베르칸은 쉽게 굴복할 자가 아니야. 딸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지 않고 그가 신념을 굽혔을 것 같지 않아.”
나의 말에 일행은 생각에 잠겼다.
“가자.”
나는 일행의 상념을 끊었다. 지금 와이번의 둥지는 과거의 와이번 둥지다.
베르칸을 이용하려면 그의 이용가치가 다할 때까지 아리나란이 죽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
즉, 지금 이곳은 함정은 완성 전이고 리버밸런스의 수작이 이루어지는 도중이다.
“안타까워요.”
함께 전진하며 바리스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동정심에 마냥 동감하기에는 내 정신의 마모가 길었다.
차가워진 나의 이성은 베르칸의 슬픔에 동감하기보다 그의 발악으로 일어날 사태를 대비했다.
아리나란은 제단 위에 죽어있었다.
그녀의 죽음이 제례의 결과가 될 수 없다. 리버밸런스에게 그녀의 죽음은 수단이자 도구일 것이다.
‘뭘 하려는 거지.’
그리고, 과거의 리버밸런스는 아리나란의 죽음으로 뭘 했던 것일까.
*
*
*
“아리나란. 네가, 네가.”
베르칸은 절규를 토해냈다. 말에 피가 섞인다면 이런 소리일 것이다.
“카르미단, 약속하지 않았나. 살려준다고, 네놈의 말을 들으면 내 딸을 살려준다고.”
격한 슬픔과 분노에 비틀거렸다.
전술은커녕 경계도 잃고 달려나갔다.
일행은 베르칸을 말리지 못했다. 아니 나의 지시에 말리지 않았다. 아직, 주된 적이 등장하지 않았다.
희생된 이가 보이지만, 가해자가 보이지 않는 지금, 일행은 모습을 숨겨야 한다.
베르칸을 잡으려 뛰어나가려다, 나의 신호에 제지당한 바리스의 미간에 근심이 서렸다.
그래도 내가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해줄 거라 믿는 만큼 지시에 따랐다. 그저 두 손으로 검을 꽉 쥐고 다음을 준비했다.
베르칸은 소녀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딸의 온기를 느끼려 했다.
떨리는 손끝이아리나란에게 닿았다. 베르칸의 절망이 확정되었다.
“크흑, 내 딸아, 내 딸아.”
소녀를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피를 뽑아내기 위함인 듯한 여러 곳의 상처 때문에, 소녀를 옮기기 위해 들어 올렸다가는 신체 일부가 흘러내리거나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바리스가 배낭을 천천히 내려 배낭 속의 망토를 소리 내지 않고 꺼내 들었다. 망토는 추위나 비를 피하는 데 쓰이지만, 두세 명이서 부상자를 옮길 때도 유용했다. 그리고 시체를 수습할 때도.
다만, 준비만 하고, 바로 베르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나와 함께 숨은 채로 상황을 살폈다.
바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본 것을 그녀도 발견했다.
검은 로브를 걸친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짝- 짝- 짝-
“애절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비의 사랑은 불구덩이라도 뛰어들게 하는 건가?”
손뼉을 치며 제단으로 다가가는 남자의 표정은 내뱉는 말과 다르게 무미건조했다.
베르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슬픔으로 가득 찼던 얼굴이 분노로 뒤덮였다. 죽은 딸에 닿았던 손이 도끼를 꽉 잡았다.
“카르미단.”
저주를 내뱉듯이 토해냈다.
“오, 나의 이름을 알아? 바바리안 주제에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군.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정보가 어디서부터 흘러나간 거지?”
“이 새끼, 네 놈이 알 수 있는 건 네가 죽을 거라는 거다.”
베르칸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이런이런, 하여간 바바리안이란, 손끝에서 바스러질 것들이 입은 거칠단 말이야. 내가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살려주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건 그렇고 네놈은 내 이름을 어디서 들었지? 아, 꼴에 바바리안이라고 고문을 해야 실토하려나.”
주변이 어두워졌다. 짙은 마력이 빛마저 가렸다. 카르미단마저 어둠으로 가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제단과 제단을 덮던 붉은 피는 선명해졌다. 마치 갓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것처럼 선홍색을 띠었다.
“아리나란.”
카르미단을 향하던 베르칸의 걸음이 멈췄다. 역으로 아리나란을 향해 달렸다.
제단의 붉은 피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아리나란의 시체를 덮었다.
붉은 피가 막을 이루었다. 막의 강도를 알지 못하는 베르칸은 도끼를 휘두르지 못했다. 대신 도끼를 왼손으로 옮기고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퍼펑. 소리 없는 소음이 터졌다.
거대한 나무도 동강 나버릴 공격이었지만, 붉은 피막은 그저 출렁거릴 뿐이었다.
마치 공격이 이어지는 것처럼 베르칸은 양손으로 도끼를 잡았다. 주먹질로 피막의 강도를 확인한 만큼, 주먹으로는 깰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내리찍으면 피막을 깬다고 해도 아리나란의 시체에 닿기에, 베어내기 위해 옆으로 당겼다.
크게 휘둘렀다.
둥근 과일의 윗부분을 옆으로 자르듯, 아리나란 위로 볼록한 피막을 베어내기 위해 거력을 쏟았다.
“후후, 무식한 바바리안아, 삶과 죽음 사이의 매듭이 그리 쉽게 끊어지겠느냐? 너마저 매몰될 것이다.”
선홍색의 붉은 피막은 바바리안의 공격을 튕겨냈다. 그뿐만 아니라 끈적한 송진처럼, 점액질의 슬라임처럼 늘어났다.
늘어난 유체가 베르칸을 덮쳤다.